[종교개혁]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루는 교회개혁
본문
오늘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그 성 교회 문에 써 붙이므로 시작된 교회개혁 48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 사건을 '종교개혁'이라고 불러 왔습니다만, 그 당시 종교는 오직 기독교 하나만 있었기에 그것은 바로 교회개혁을 뜻하는 것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는 종교개혁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이 사건을 말할 때에는 '루터의 교회개혁'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루터의 교회 개혁
루터의 교회 개혁은 성경에 비추어 전통적으로 교회가 지켜온 교리나 혹은 교황청의 결정들에 대하여 비판하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 성경은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기 때문에 성경은 아주 귀하였고, 따라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성경을 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지켜온 교리나 제도가 성경에 어떤 근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교황청이 결정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되고 모든 교회는 그 결정을 따라야 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런 권위를 잘 활용하여 교회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교황청은 1096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이 전쟁에 나가게 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발행하였습니다.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 이 다음 죽어 연옥에 머물지 않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면죄부를 받기 위하여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였던 것입니다.
그후 교황청이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면서 많은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8천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건물입니다. 이것을 짓는데 100년이 걸렸고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 같은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고 건축되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교황청은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요즈음의 판매원처럼 면죄부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러 다닌 신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테첼이라는 신부였는데, 루터가 살고 있는 비텐베르그 성 근방에 와서 면죄부를 팔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돈이 헌금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당신의 어머니는 연옥에서 천국으로 뛰어 오를 것입니다. "
마틴 루터는 이 면죄부가 성경에 근거한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비롯한 교황청의 문제를 함께 토론하기 위하여 95개조의 논제를 써 붙였던 것입니다. 일개 수사에 불과한 루터가 이렇게 용감하게 교황청에 도전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만용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동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공덕사상(功德思想)은 성경의 가장 핵심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토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공덕사상이란 훌륭한 성인들이 쌓은 선행은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많기 때문에 그 남은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그 사람은 그 성인의 공덕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면죄부는 바로 이런 사상에 근거하여 발행되는 것입니다. 성인의 남은 공덕을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인 교황이 맡아 가지고 그것을 면죄부를 산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결국 공덕사상은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사상인데, 루터는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와 배치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의 논제 32항에서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520년 루터는 작은 책 세 권을 펴냈는데, 첫번 것은 독일의 기독교인 귀족에게라는 책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교황청의 세 가지 권한을 공격하였습니다. 속권(俗權) 즉 일반 정치권에 대한 교권(敎權)의 우월성을 반박하였고, 성경 해석에 대한 교황의 절대권을 부정하였고, 교회회의를 교황만이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인 그의 개혁방침을 제시하였습니다. 교황권의 악정과 직임 임명과 과세는 억제되어야 하며, 부담이 되는 의식은 철폐되어야 하며, 교직자의 결혼은 허락되어야 할 것이며, 수많은 성일(聖日)은 줄여서 산업과 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탁발교단을 포함한 구걸은 금지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창가들을 폐쇄되어야 하고, 낭비는 억제되어야 하며, 대학의 신학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두 번째 책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교회의 성례전을 다루었는데 이제까지 행하여 온 일곱 가지 성례를 비판하고 오직 세례와 성만찬만이 성례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책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가장 자유한 만물의 주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는 만물의 가장 책임 있는 종이"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얽매여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자유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리고 그의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사랑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황에게 종속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분명하게 내세운 것입니다.
루터는 1520년 12월에 학생들과 비텐베르그 시민들 앞에서 정부당국의 아무런 제재도 없이 교황의 교서와 교회의 법전을 불태워 보임으로써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과감하게 교황청이 지켜온 교회의 틀을 깨트린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곧 죽음을 의미하였지만, 그 당시 구라파 사회가 문예부흥을 거치면서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횡포에 모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때라 루터의 이런 도전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서 교회개혁의 불길이 구라파 전체에 파급되었던 것입니다.
루터의 교회개혁은 지금까지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로마 교황에 대하여 도전하고,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교회의 관습의 틀을 과감하게 깨트리므로 교회를 개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용기는 바로 성경을 공부하므로 얻은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 개혁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늘 읽어 드린 마태복음 말씀에 보면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루터 당시 로마 교회가 행한 모든 일들이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바로 이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많은 일들이 실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거나 혹은 그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내쫓고, 많은 기적도 행하였지만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것일 수 있음을 이 말씀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어서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하였는데, 바로 그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더욱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직은 공공연하게 매매되고, 성물(聖物) 숭배와 같은 잘못된 신앙이 도입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각종 유골 유품 등을 진열해 놓고 교인들을 그곳으로 불러 순례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유골은 4천년의 연옥생활을 감하는 효력이 있고, 사도 바울이 찼던 쇠고랑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때 사용된 동전은 1천 4백년 연옥생활을 삭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로마를 성지로 알고 로마에 순례하는 것은 천국표를 보장받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믿어 로마 순례를 평생소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바로 율법을 빙자하여 자기들만이 의인이며, 구원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한 일에 대하여 비판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가졌다고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 속에 담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종교인 유대교가 형식화되고 부패하여 율법이 간직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불법집단'이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음으로 폐기시켜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그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굳게 지켜온 유대교 전통의 틀을 모두 깨트려 버리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는 율법적 전통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시므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한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굳게 그 율법을 지켜온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위험한 이단자로 보였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개혁
오늘 우리 교회를 돌아보고 무엇이 개혁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도 115년이 되면서 굳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렸던 교리나 의식이나 교회생활의 여러 부분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깨트릴 것은 깨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의식이 개혁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그 말씀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는 열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롭게 들려오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그 시대의 잘못된 흐름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고민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았을 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 뜻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의 교회와 사회의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시대와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고민하면서 성경을 보고 기도할 때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교회의 잘못됨을 알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개혁하려 하지 않고 그냥 교회를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포기하고 나가지 않는 사람도 상당수가 됩니다. 그들이 개혁을 주장하기에는 교회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 가운데도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목회를 새롭게 해보려고 하지만 교회 안의 기존 세력들의 완강한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굳어져 있어서 개혁이 대단히 어려운 것만은 사실입니다. 특히 연합사업이나 교단 정치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알게 모르게 여기 저기서 조용한 개혁들이 일어나고 있음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이 끓을 때 한꺼번에 끓지 않고 처음에는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다가 그것이 점점 커지고 계속해서 열이 가해지면 마침내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모든 교회가 한꺼번에 개혁되지는 않습니다. 여기 저기서 작은 개혁들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그것들이 뭉쳐지면 마침내 한국 교회의 큰 개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교회개혁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루터 이전에 이미 많은 개혁자들이 교황청에 대항하여 교회 개혁을 부르짖다 화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일어난 작은 개혁의 불길들이 모여 마침내 큰 교회개혁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개혁주일을 다시 맞이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가 과연 올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지, 교회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그 틀을 깨트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각인된 고정관념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발견되면 과감하게 그 고정관념을 깨트려버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보면, 부자가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기보다는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나를 중심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할 것이며, 도시 문명에 길들여져 살기보다는 거친 들로 나가 나그네처럼 살아야 하고, 넓은 길로 편안히 가기보다는 좁은 길에서 십자가를 져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은 이런 말씀과는 달리 부자 되라고 축복하고 출세하라고 축복하며 편안하게 살라고 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깨트리고 우리 자신을 개혁하며 교회를 개혁하고 이 사회를 개혁하여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때 주님 앞에 서게 되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는 무서운 심판의 선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안심하지 말고 진정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헤아려 그 뜻을 순종하므로 그 신앙의 집을 만세 반석 위에 든든히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심판의 폭풍이나 불길 속을 지날 때에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주님 앞에 이르러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며 더 나아가 이 사회를 개혁하여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켜 나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루터의 교회 개혁
루터의 교회 개혁은 성경에 비추어 전통적으로 교회가 지켜온 교리나 혹은 교황청의 결정들에 대하여 비판하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 성경은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기 때문에 성경은 아주 귀하였고, 따라서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성경을 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지켜온 교리나 제도가 성경에 어떤 근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교황청이 결정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되고 모든 교회는 그 결정을 따라야 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런 권위를 잘 활용하여 교회를 이끌었던 것입니다.
교황청은 1096년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을 이 전쟁에 나가게 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발행하였습니다. 전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어서 이 다음 죽어 연옥에 머물지 않고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면죄부를 받기 위하여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였던 것입니다.
그후 교황청이 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하면서 많은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으로 8천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건물입니다. 이것을 짓는데 100년이 걸렸고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 같은 당대의 유명한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고 건축되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교황청은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요즈음의 판매원처럼 면죄부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러 다닌 신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테첼이라는 신부였는데, 루터가 살고 있는 비텐베르그 성 근방에 와서 면죄부를 팔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돈이 헌금통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 당신의 어머니는 연옥에서 천국으로 뛰어 오를 것입니다. "
마틴 루터는 이 면죄부가 성경에 근거한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이를 비롯한 교황청의 문제를 함께 토론하기 위하여 95개조의 논제를 써 붙였던 것입니다. 일개 수사에 불과한 루터가 이렇게 용감하게 교황청에 도전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만용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 동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공덕사상(功德思想)은 성경의 가장 핵심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문제를 토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공덕사상이란 훌륭한 성인들이 쌓은 선행은 자신을 구원하고도 남을 만큼 많기 때문에 그 남은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그 사람은 그 성인의 공덕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면죄부는 바로 이런 사상에 근거하여 발행되는 것입니다. 성인의 남은 공덕을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인 교황이 맡아 가지고 그것을 면죄부를 산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결국 공덕사상은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사상인데, 루터는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다는 성경의 진리와 배치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루터는 그의 논제 32항에서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520년 루터는 작은 책 세 권을 펴냈는데, 첫번 것은 독일의 기독교인 귀족에게라는 책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교황청의 세 가지 권한을 공격하였습니다. 속권(俗權) 즉 일반 정치권에 대한 교권(敎權)의 우월성을 반박하였고, 성경 해석에 대한 교황의 절대권을 부정하였고, 교회회의를 교황만이 소집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학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인 그의 개혁방침을 제시하였습니다. 교황권의 악정과 직임 임명과 과세는 억제되어야 하며, 부담이 되는 의식은 철폐되어야 하며, 교직자의 결혼은 허락되어야 할 것이며, 수많은 성일(聖日)은 줄여서 산업과 사회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탁발교단을 포함한 구걸은 금지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창가들을 폐쇄되어야 하고, 낭비는 억제되어야 하며, 대학의 신학교육은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두 번째 책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교회의 성례전을 다루었는데 이제까지 행하여 온 일곱 가지 성례를 비판하고 오직 세례와 성만찬만이 성례임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책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가장 자유한 만물의 주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는 만물의 가장 책임 있는 종이"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 아래 얽매여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자유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그리고 그의 이웃에 도움이 되도록 사랑으로 묶을 수 있기 때문에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황에게 종속되지 아니한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을 분명하게 내세운 것입니다.
루터는 1520년 12월에 학생들과 비텐베르그 시민들 앞에서 정부당국의 아무런 제재도 없이 교황의 교서와 교회의 법전을 불태워 보임으로써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던 것입니다. 과감하게 교황청이 지켜온 교회의 틀을 깨트린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곧 죽음을 의미하였지만, 그 당시 구라파 사회가 문예부흥을 거치면서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횡포에 모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때라 루터의 이런 도전이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서 교회개혁의 불길이 구라파 전체에 파급되었던 것입니다.
루터의 교회개혁은 지금까지 누구도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로마 교황에 대하여 도전하고,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교회의 관습의 틀을 과감하게 깨트리므로 교회를 개혁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용기는 바로 성경을 공부하므로 얻은 신념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교회 개혁의 불씨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늘 읽어 드린 마태복음 말씀에 보면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루터 당시 로마 교회가 행한 모든 일들이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바로 이 사실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많은 일들이 실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거나 혹은 그 뜻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도 하고, 귀신도 내쫓고, 많은 기적도 행하였지만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것일 수 있음을 이 말씀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이어서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질타하셨습니다.
루터는 로마 교황청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당시 교회의 부패는 극에 달하였는데, 바로 그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더욱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직은 공공연하게 매매되고, 성물(聖物) 숭배와 같은 잘못된 신앙이 도입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각종 유골 유품 등을 진열해 놓고 교인들을 그곳으로 불러 순례하게 하였습니다. 어떤 유골은 4천년의 연옥생활을 감하는 효력이 있고, 사도 바울이 찼던 쇠고랑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길 때 사용된 동전은 1천 4백년 연옥생활을 삭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로마를 성지로 알고 로마에 순례하는 것은 천국표를 보장받는다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믿어 로마 순례를 평생소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바로 율법을 빙자하여 자기들만이 의인이며, 구원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한 일에 대하여 비판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가졌다고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 속에 담긴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종교인 유대교가 형식화되고 부패하여 율법이 간직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불법집단'이라는 사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신 것입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음으로 폐기시켜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그 유대교의 중심인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굳게 지켜온 유대교 전통의 틀을 모두 깨트려 버리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키는 율법적 전통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하시므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한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굳게 그 율법을 지켜온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위험한 이단자로 보였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개혁
오늘 우리 교회를 돌아보고 무엇이 개혁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한국 교회 역사도 115년이 되면서 굳어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동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렸던 교리나 의식이나 교회생활의 여러 부분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검토하고 깨트릴 것은 깨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고 그 뜻을 알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의식이 개혁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그 말씀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는 열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롭게 들려오는 말씀을 듣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그 시대의 잘못된 흐름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고민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았을 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 뜻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오늘의 교회와 사회의 일어나는 현상들을 보면서 그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시대와 이 시대의 교회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고민하면서 성경을 보고 기도할 때 우리는 거기서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도 교회의 잘못됨을 알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개혁하려 하지 않고 그냥 교회를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을 포기하고 나가지 않는 사람도 상당수가 됩니다. 그들이 개혁을 주장하기에는 교회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 가운데도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목회를 새롭게 해보려고 하지만 교회 안의 기존 세력들의 완강한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전반적으로 굳어져 있어서 개혁이 대단히 어려운 것만은 사실입니다. 특히 연합사업이나 교단 정치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지금 알게 모르게 여기 저기서 조용한 개혁들이 일어나고 있음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이 끓을 때 한꺼번에 끓지 않고 처음에는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다가 그것이 점점 커지고 계속해서 열이 가해지면 마침내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도 모든 교회가 한꺼번에 개혁되지는 않습니다. 여기 저기서 작은 개혁들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그것들이 뭉쳐지면 마침내 한국 교회의 큰 개혁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루터의 교회개혁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루터 이전에 이미 많은 개혁자들이 교황청에 대항하여 교회 개혁을 부르짖다 화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기 저기서 일어난 작은 개혁의 불길들이 모여 마침내 큰 교회개혁을 이루어 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개혁주일을 다시 맞이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가 과연 올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지, 교회는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로 그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그 틀을 깨트리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각인된 고정관념이 무엇인가를 돌아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발견되면 과감하게 그 고정관념을 깨트려버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보면, 부자가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고,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기보다는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나를 중심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할 것이며, 도시 문명에 길들여져 살기보다는 거친 들로 나가 나그네처럼 살아야 하고, 넓은 길로 편안히 가기보다는 좁은 길에서 십자가를 져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회들은 이런 말씀과는 달리 부자 되라고 축복하고 출세하라고 축복하며 편안하게 살라고 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들을 깨트리고 우리 자신을 개혁하며 교회를 개혁하고 이 사회를 개혁하여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때 주님 앞에 서게 되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는 무서운 심판의 선고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안심하지 말고 진정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헤아려 그 뜻을 순종하므로 그 신앙의 집을 만세 반석 위에 든든히 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심판의 폭풍이나 불길 속을 지날 때에도 무너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주님 앞에 이르러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를 개혁하고 교회를 개혁하며 더 나아가 이 사회를 개혁하여 이 땅에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켜 나가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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