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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믿음이 만드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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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종교개혁주일인데 492년 전 종교개혁 당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날 루터라는 분이 독일의 뤼텐베르크라는 작은 성교회에 1517년 10월 31일, 95가지의 반박문을 교황청에 조목조목 붙인 날입니다. 그 때 루터는 뤼텐베르크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성이었고 거기서 수도사들을 가르치는 신학교수였습니다. 95가지 조목을 달아서 교회는 바꾸어져야 한다고 붙인 날, 그 날이 10월 31일입니다. 그 날을 저희들이 종교개혁 기념일로 지키고 주일을 지키다보니 앞당겨서 오늘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근데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려웠을 때3. 1운동을 부른 날이 1919년 3월1일입니다.
3. 1운동은 1919년 3월1일이다. 맞는 말인데 사실은 그 전에3. 1운동을 위한 준비가 많이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고 그 날 저희들이 일어나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는 모임을 전국 사찰과 교회와 공회당에서 했기 때문에 그 날을3. 1절이라고 부릅니다. 1945년 해방이 되어서 광복절이라고 부릅니다만 그 전에 일본은 광복절은 이미 완벽하지 않지만 부분 부분으로 누리고 있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도 저희들이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 날을 정하기도 합니다만 1517년 10월 31일 이전부터 이미 교회는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개혁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왔습니다. 다만 전체 개혁을 하는 큰 흐름이 어느 날 갑자기 불을 당기듯이 촛불 점화하듯이 점화하여 전 세계로 그 움직임이 그 계기가 뭔지 얘기하다가 후세 사람들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아침에 95개조 반박문을 뤼텐베르크 성교회에 붙인 날을 기념으로 삼자고 해서 종교개혁주일이 정해진 것뿐입니다.
잠시 돌이켜 보면 그거 하나 때문에 개혁의 불길이 일어났다고 얘기하기에는 어패가 있습니다. 내부상황도 있고 외부상황도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을 시키실 때 촛불을 횃불을 당기는 아주 기본적인 사건이 있는가 하면 그 사건과 함께 주변의 사람들, 정치 경제 사회적인 여건, 문화적인 상황 발전, 이 모든 것이 합해야 개혁운동에 성공한 것이지 합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루터가 이 일을 할 때 이미 종교개혁의 운동은 유럽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성공을 못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루터의 이 사건은, 1517년 10월 31일 사건은 그렇게 촛불을 당기듯이 성공했을까
이미 당시 유럽에는 각 민족별로 나라별로 민족 국가를 세우자는 의견이 강했습니다. 특별히 독일에서는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에 이태리 성직자 중심으로 너무 유럽독재가 강하다, 우리 민족도 독립을 해야 한다는 그 독립 열정이 독일이 특별히 강했고 이 강한 열정을 루터의 종교개혁이 불을 붙인 겁니다. 또 하나 당시 유럽에 보면 경제성장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봉건주의가 무너지고 도시 근로자들이 생기면서 각자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사는 새로운 경제운동이 출발했습니다.
경제가 바뀌고,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와 민족국가가 태동했고, 그러면서 더욱 중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라 이름하는 인문학, 사회학, 모든 분야의 학문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자유롭게 학문도 연구하고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은 그리면 안 된다, 예수의 얼굴은 그리면 안 된다고 중세기 내내 억압받고 나서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맘대로 그려라, 이것도 르네상스의 일종입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도 신앙고백으로 그려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얼굴도 그려도 되고, 음악도 맘대로 표출해도 되고, 언어도 마음대로 표출해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사를 표출해도 됩니다. 특별히 성경말씀은 라틴어로만 쓰여서 아무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부님만 예배 때 낭독하면 그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각 나라별로 언어를 바꾸어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경우는 루터가 독일말로 라틴어로 된 성경을 번역합니다. 물론 라틴에서 번역한 게 아니라 원어인 헬라어에서 번역합니다. 성경말씀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자기말로 쓰여진 성경을 손에 들고 예수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을 읽습니다.
인도네시아에 말은 있으나 글이 없는 사람들에게 훈민정음 한글을 가지고 글자를 줬다고 우리 권사님께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말은 있는데 글이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 한글로 성경말씀을 번역해 주면 인도네시아에서 이 분들에겐 혁명입니다. 자기 글로 자기가 쓰는 언문으로 말씀을 터득하게 된 사람들은 누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고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변하고 경제생활도 변합니다.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은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이야기,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축복의 이야기, 로마서에 나오는, 믿으면 누구든지 다 구원받습니다. 죄인도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처벌받지 않고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말씀으로 읽고 깨달아보십시오. 사실 제 손으로 성경을 들고 내 말로 내 글로 읽을 수 있으면 그 자체가 이미 혁명적 변화를 예고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붙였습니다. 그러면 폭발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연유를 가지고 어느 한 사건이 정말 크게 번지려고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외부의 모든 여건이 합쳐서 합동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대로 그래야 합니다.
당시 교회는 뭘 못했습니까 각 민족별로 독립한다고 그랬고 경제도 자율경제로 시장경제 비슷하게 봉건주의가 망해가고 언어도 발견되고 새로 번역되는데 왜 교회는 이 일에 능동적으로 적응하지 못했습니까 음식이야기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 흰 쌀밥 드십니까 흰 쌀밥만 드시면 비타민 B6가 부족해서 뇌신경이 퇴화하고 치매에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흰 쌀만 드시지 마십시오. 제 이야기가 아니라 통계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여름에 참외 많이 드시죠 참외하고 땅콩을 동시에 섭취하면 위경련에 걸릴 수 있습니다. 뭐가 잘 맞아야 하는데 음식도 안 맞는 것입니다. 교황청이라 이름하는 거대한 우리 교회가 참외처럼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뀌어서 민족주의, 민족국가, 경제발전, 언어개발, 성경번역 등 땅콩이 등장했습니다. 부를 같이 먹으면 좋았을텐데 엉뚱하게 언어를 먹고 민족을 먹었어야 될 것을 권위주의, 라틴 말, 신부의 권리, 이것만 가지고 번역된 성서를 같이 못하다가 땅콩이 아닌 다른 것으로만 하다가 땅콩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교황청과 교회본부와 땅콩 사이에 위경련을 일으켜서 교회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종교개혁에 말했던 교회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말씀은 누구나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진실해야 합니다. 궁합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사실 신앙의 궁합이 잘 맞지 않아서 교회는 깨지고 그러나 새로운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내적으로 훨씬 더 심각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교회는 컸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러 교회에 들어왔고 예배도 드렸고 찬양도 했고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복되다고 했는데 왜 행복을 찾지 못했을까, 그 말은 다른 말로 펼치면 제가 예수 믿는 목적이 뭘까
믿으면 내가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사는 목적이 뭘까 사는 의미는 왜 이렇게 망가질까 삶의 가치관은 왜 이렇게 망가뜨려질까 예수를 믿어도 교회원이 되어도, 헌금을 내도, 봉사를 해도, 내 마음에 불만이 쌓여가기 시작하고, 도대체가 믿는 것 자체가 행복하지 않다. ’ 그 말을 신앙에서는 영성이 교회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속에서 형식이 있지만 영성이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있지만 진한 맛이 없고 찬송은 부르는데 감동은 없고 기도는 하는데 중언부언이고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영성이 없으면 경건성이 없으면 속에 담고 있는 깊은 샘솟는 기쁨이 없으면 그 예배나 모든 것은 안 됩니다.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를 쓴 막스위버의 이야기를 잠깐 쓰면, 경제가 바뀌었다고 했는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특별히 개신교가 발전하면서 왜 자본주의가 발전했는지 논문을 쓰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장점은 샘솟는 기쁨,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샘솟는 행복감을 영성으로 표현하면 이 영성을 교회, 아주 거룩한 지성소에 갖다놨습니다.
신부님들만 다 그 영성을 소유하고 있었고 평신도들은 영성이 뭔지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영성을 루터처럼 수도원 깊은 곳에 가둬놓고 수도원에 오면 믿는 사람의 생명의 흐름을 기쁨을 맛볼 수 있지만 수도원을 벗어나면 영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성은 두 군에 있었습니다. 거룩한 권위체제 속에 교권체제 속에 가둬두었고, 아니면 수도원 속에 밀폐시켰습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경험한 깊은 영성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 속에 들어와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은 수도원에 밀폐되어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복음은 교권주의에 메이면 안 됩니다. 교권주의를 떠나서 일상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영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은,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은 생활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영성이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종교개혁의 특징입니다. 제가 영적으로 보람되고 행복감을 느끼고 가치가 있다고 해야 제가 열심히 일할 것 아닙니까 열심히 일하는 샘솟는 기쁨을 일상 속으로 끌어오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참 진실한 고백이라고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름받은 성직자, 당시 신부님들, 모든 사람들이 신부 되는 것, 성직자는 안수받은 목사나 신부만 되어야 하는데 루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 정치하는 사람, 사회사업, 문화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 믿는 사람이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사제입니다. 저는 종교적 사제이지만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경제적 사제, 음악하는 사람은 음악하는 사제, 미술을 하는 사람은 미술하는 사제, 여호와 하나님의 사제됨은 교회 건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생활 공간 모든 곳에서 열심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개방된 사제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이 마틴 루터가 말하는 만인사제직의 요청입니다. 그 속에 중요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여호와 하나님의 진실, 여호와 하나님의 가슴을 담는 영성만 가지고 있으면 생활 공간 하나하나가 다 사제처럼 살아가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가치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마틴 루터가 주장했습니다. 거기서 모든 사람이 생계를 얻습니다. 그래서 경제는 발전합니다. 정치는 민주화됩니다.
사회는 개방화되고 자율화됩니다. 이 사실이 종교개혁이 갖다 준 엄청난 변화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밀폐시키지 마십시오. 권위주의의 껍데기에 담지 마십시오. 수도원에 갖다 밀폐시키지 마십시오. 박제하지 마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고 지금도 살아 움직입니다. 행복을 찾으십시오. 진실된 복을 찾아보십시오.
최근에 우리나라도 경제가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 중에 행복감 조사를 했더니 거의 꼴찌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이 발전하고 부자가 되지만 행복감은 꼴찌에 가깝다. ’ 최근 영어 용어 중에 ‘오스트레일리안 파라독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주가 전 세계 OECD 국가 중에 2009년 통계를 봤더니 인간개발 지수가 세계4위입니다. 높습니다. 그런데 행복감 지수는 50등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왜 인간개발지수, 경제성장, 능력개발, 이것은 상위권인데 행복감은 꼴찌일까요 그래서 파라독스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안 파라독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많이 알면 영적으로 행복합니까 성경지식을 많이 쌓으면 그만큼 영성의 깊이가 깊습니까 오랫동안 믿고 많은 직책을 가지면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 앞에 행복하고 여러분 자신 앞에서 떳떳하고 보람됩니까 진실된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영의 깊이, 샘솟는 기쁨을 여러분이 많이 안다고 많이 가졌다고 여호와 하나님이 가까이 있다고 샘솟는 기쁨이 충만하십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혹시 신학적 파라독스는 아닌가요 잘났다고 행복한 거 아니잖습니까
오늘 루터가 말한 종교개혁이란, 외형으로 많이 가졌다고, 많이 쌓았다고 진실된 삶의 기쁨이나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샘솟는 기쁨을 맛보아야 합니다. 왜 속에서 흐르는 생명수를 여러분이 차단하십니까 왜 거대한 물길이 흐르는 것을 인위적으로 막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은, 여호와 하나님의 혼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은 세상 가장 깊은 곳에 가장 가까운 곳에 와서 넘실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사랑하는 교회는 왜 막습니까 사실 종교개혁을 하면서 마지막 루터의 말씀 중에 아주 의미 깊은 말입니다. 의인이 된다는 말은 우리말로 바꾸면 구원받는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믿으면 받습니다.
오늘 로마서의 말씀은 많이 바치면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잘나면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구원받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의 권리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는 의는 죄인도 용서해서 새사람 만든다는 의고, 왜 중세교회는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하신다고만 가르쳤습니까 왜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 사람을 떨게 만들었습니까 왜 불안케 만들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면 사시나무 떨듯이 교회에 나오면 떨게 만들어서 협박했잖습니까 루터의 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은 본래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을 회개시켜서 용서하고 죄에서 해방시키고 생겨나게 하고 새로운 삶으로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왜 이 믿음을 죽였습니까 루터의 말은 중세기 신학이 말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심판하시는 의라고 하는 말을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본래 사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인까지도 용서해서 새 세계를 만들고 새사람 만드는 용서하는 의, 새롭게 만들어주시는 의입니다. 판을 바꿉시다. 요즘 말로 패러다임 쉬프트, 많은 사람들에게 감각적인 말씀이 되었습니다. 성서를 직접 읽어보십시오. 찬송을 직접 불러보십시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들어가 봤더니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나는 말이 아니고 죄인을 용서해서 사람 만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근거는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심판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면 자기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역사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로 끝났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러분이 선포해야 합니다. 십자가, 죄값을 치르신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복음은 그게 아니고 죽은 예수가 죽음을 죽이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셔서 부활했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골고다에 박제된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갈릴리 해변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한테 아니 오늘 우리한테 “나는 죽었다가 살았다.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삶의 문화를 만들었다. 새로운 생명을 이끌어냈다. ” 그게 예수의 복음 아닙니까 여러분 복음을 부활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받아들이세요. 믿으면 의롭게 됩니다.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부활의 은총을 가장 깊은 곳에서 샘물 기르듯이 길러서 새롭게 사십시오. 종교 개혁이 아니라 신앙개혁입니다. 십자가에서 부활로 옮겨가는 새로운 생명의 터전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종교개혁이라 이름합니다. 새 영성을 받읍시다. 다시 납시다. 골고다를 넘어 부활의 은총으로 뜀박질하며 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진실로 행복하셔야 합니다. 진실로 영적으로 부요하셔야 합니다. 기쁨을 하늘을 향해서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기쁨으로 기도하고 열심히 일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우리도 아름다운 가치관, 보람된 삶을 살아갑시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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