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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오직 믿음으로오직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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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동안 주일을 지키면서 어느 주일이 더 중하고 어느 주일은 덜 중한 그러한 일은 없겠지만, 그러나 우리 개신교회에 있어서 개혁교회의 뜻을 끊임없이 되새길 수 있는 종교개혁주일이 갖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로마 교황청의 타락으로 중세기 교회는 암흑시대를 걸었으나,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혁교회가 생김으로써 교회는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속 속에 있는 교회는 한 번으로 끝나지 말고 계속해서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합니다. 만약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가 개혁을 외면한다면 한국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서 밖에 버리워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마 5:13).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고국 유대나라에 돌아온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책을 백성에게 읽어 줌으로써 종교개혁을 실천했습니다.
1. 종교개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느헤미야 8:1의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라는 말처럼,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았습니다. 느헤미야 8:8-9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고 말씀하였습니다.
에스라의 종교개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세기 종교개혁은 로마 교황청의 잘못을 개혁하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개혁입니다. 신부인 마틴 루터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죄의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스타우티츠에게 찾아가서 수없이 많은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했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구원의 확신이 서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의 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로 인해서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루터는 말씀과의 만남을 통하여 복음 안에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문 앞에 95개조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그 부패에 대한 반박문을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에 의한 구원의 진리를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오직 은혜로,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의 정신에 입각해서 우리도 자신을 개혁해야 합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리스도 예수, 생명의 말씀인 성경과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얻은 진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를 함으로써 진정한 개혁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종교개혁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 종교의 부패상은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맨 먼저 개혁자로 나선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부패했는지 그의 외침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그가 세례를 베푸는 요단강에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 3:7) 하고 그들에게 개혁을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된 신앙 행위를 일일이 지적하시고, 백성에게 그들의 행동을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구제(마 6:24),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마 6:68),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금식(마 6:1618), 안식일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마 12:812), 부모님에게 드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물질을 드림으로써 효도를 한다는 잘못된 효도(막 7:1113), 성전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아닌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 고 하시며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꾸짖으신 일(마 21:1213), 외식함으로 교인 하나를 애써 얻고 자신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일(마 23:15), 소경된 인도자(마 23:16),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의와 인을 버린 일(마 23:23) 등 모두 회칠한 무덤같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나 속은 썩어서 더럽다(마 23:27)고 꾸짖으셨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마 23:3334). 우리는 스스로 잘 믿는다는 그릇된 판단으로 당시 예수님에게 책망받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3.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기업화된 교리를 꿈꾸고, 교회의 난립,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 등 종교개혁자들이 처음에 부르짖은 그 개혁정신이 없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수준 이하의 교역자들을 많이 양산했기 때문에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21세기라는 세기적 전환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교회가 복음을 외면하고 꿩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숫자 늘리기에만 열중한다면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남북통일을 앞두고 북한 전도에 대한 계획을 세우며, 3백만이 넘는 실업자에 대해서도 실제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당한 자에 대해서 외면하고 교회 내에만 힘을 쓰는 일에 열중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멀쩡한 교회당을 헐고 더 큰 화려한 교회당을 다시 짓고, 교회가 커지면 교육관을 화려하게 짓고, 교회묘지 준비와 기도원을 짓는 일에만 열중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미 건축된 수많은 다른 기도원들을 함께 이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쓰는 교육관을 위해서 너무 많은 돈을 투자하는 것도 생각해 볼 일입니다. 우리가 헌금해서 우리가 짓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아예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누가 보더라도 지금 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결코 현실에 안주해서 미래를 내다봄에 눈이 어두워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교회는 그 국가와 민족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초기 한국의 기독교는 핍박 중에서도 민족의 교회로서 선구자적 역할을 다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교회는 부흥이 되었다는 자기 안일에 빠져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할 때 사회로부터는 외면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개혁의 큰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제2, 제3의 개혁자 루터나 칼빈, 후스와 쯔빙글리가 이 땅에서 나와야 하겠습니다.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목숨을 내걸고 개혁에 힘썼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세속화의 물결, 물질과 과학이 종교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교회는 과감한 개혁으로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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