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인간을 향해 다가오시는 하나님
본문
오늘의 말씀은 아브라함 이야기 전체 중에서 절정을 이루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인정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오늘 세계 3대 종교,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들의 공통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아름다운 신앙이야기이지만 사실 끔찍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고향을 떠나 수십년 객지를 유랑했던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얻은 아들, 바로 그 아들을 제물로 잡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잡아 바치기로 되어 있었던 모리아산정 바로 그 지점에 지금 예루살렘 사진에서 보는 황금빛 이슬람 사원이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서 이삭이 마지막 순간에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었고 아브라함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순종하라는 선생님의 권면에는 동의를 했지만 어린 마음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들을 잡아 자기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강요하는 비정한 여호와 하나님이 이해가 안되었고 둘째는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자기의 믿음을 인정받기 위해 아들을 잡아 바치겠다는 이기적인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목사님이었고 저도 외동 아들이었는데 우리 아버지도 만약 아들을 바치라 명령을 받으면 나를 저렇게 바칠 것이 아닌가 싶어 가끔 아버지를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있는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불굴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믿을 수 없을 때 믿는 믿음이고 진정한 순종은 순종할 수 없을 때 하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믿음과 순종을 보였고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모든 인간의 조건을 초월했을 때 진정한 경외가 됩니다. 셋째는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소위 "여호와 이레"란 유명한 신앙적 개념입니다. "여호와 이레"란 말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는 선도자"란 뜻입니다.
이 모든 교훈이 다 중요하고 의미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에서 오늘 주일의 주제인 종교개혁과 감사의 본래적 의미를 찾아보려 합니다. 오늘 이야기 표면에는 방금 말씀드린대로 순종, 믿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경외,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미리 준비하심과 같은 신앙적인 의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 이면에는 아브라함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고대사회의 삶을 전적으로 규정하는 종교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는 모든 종교가 인간제사(人間祭祀, Human sacrifice)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잡아 바치는, 특히 어린아이를 잡아바치는 인간제사가 최고의 제사로 인정되던 상황입니다. 레위기 18장 21절에 보면 이런 관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이 말씀의 직접적인 배경은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친 가나안 원주민들의 풍습입니다. 가나안 원주민, 특히 암몬 족속들은 민족신인 몰록에게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런 인간제사는 특별히 국가적 재난이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드렸습니다. 이를테면 비가 오지 않거나 홍수, 전쟁등 나라에 큰 재난이 일어날 경우에 이것이 神의 노여움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神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풍습은 우리 한국사람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심청전 이야기는 중국 상인들이 험한 바다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인간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 에밀레종의 이야기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선덕대왕의 불심(佛心)과 관련된 것인데 이는 인간제물이 신앙심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한 방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삭제사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암시를 하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시 횡행하던 인간제사를 거부하고 폐지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장 보편적이던 인간제사(人間祭祀)를 폐지하고 이를 동물제사(動物祭祀)로 대치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 조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는 인도적인 종교'라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신학은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을 설명할 때 종종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서 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식은 항상 부모를 위해 있지 않지만 부모는 항상 자식을 위해 있는 자세와 같습니다.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신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다른 종교의 신은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끊임없이 닥아오게 강요하는 신이라면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여 닥아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신앙은 속박과 강요의 신앙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신앙입니다.
종교개혁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닥아가고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닥아가도록,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아무 장애없이, 아무 조건없이 만날 수 있게 복음의 이해를 바꾸고 교회의 제도를 바꾼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순수한 만남을 방해하는 교회제도를 철거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데 많은 인위적인 제도와 조건들을 만들었습니다. 면죄부, 마리아를 통해서 드리는 기도 등이 그 예입니다. 이 제도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순수한 만남이 방해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이 모든 인위적인 제도와 조건들을 없애나갔습니다.
베른에 가면 뮌스터(M nster)란 대성당이 있는데 성당안으로 들어가면 앞쪽 왼편 위에 스테인 글라스로 된 그림이 있습니다. 쮜리히(Z rich)에서 개혁을 하던 쯔빙글리(Zwingli)가 한번은 베른을 방문하여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그림은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생명수가 방앗간 파이프같은 통로를 통해 흐르는데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맨 꼭데기에서 파이프에 생명수를 부어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파이프 중간에 교황과 신부가 수도꼭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쯔빙글리(Zwingli)가 이 그림을 본따서 목판에다가 새로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중간에 교황과 신부가 조절하는 수고꼭지를 없애고 사람들이 생명수를 바로 받아먹도록 파이프를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직접 연결한 것이었습니다. 이 목판그림은 당시 글을 읽을 줄 모르던 대다수 베른 민중들에게 종교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림으로 설명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개혁의 보편적인 정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가 방해받는 벽을 없애는 것이 개혁입니다. 제가 1986년 아직도 동서독이 갈라져 있을 때 동베르린을 방문했습니다. 서베르린에서 동베르린으로 건너갈 때 무려 8개의 문을 통과해서 넘어갔습니다. 동베르린에 가서 바라보는 서베르린은 딴 세상만큼이나 먼 세상이었습니다. 이 장벽이 동베르린과 서베르린이 서로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게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작년 5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겪었던 심정입니다. 이 순수함을 막는 벽을 없애는 것이 통일입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도 정부나 사회가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개협입니까 정부와 국민이 자유롭고 순수하게 만나게 하는 것이 개혁입니다. 경제개혁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순수하게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몇가지 제도를 개혁한다고 개혁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와 국민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순수하게 만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개혁도 이와 같습니다.
"종교개혁이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순수하게 만나는 것,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자유롭게 닥아가게 하고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게 닥아가도록 하는 것. "입니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자유롭게 다가오시도록,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게 다가가도록 그 길을 열기 위해 중세교회와 사회에 도전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자유의 길을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이란 길을 통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믿음이란 길을 통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에는 값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신앙에 값을 매겼습니다. 노골적으로 매길 수 없으니까 선행이란 이름으로 매겼습입니다.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면죄부 발행이 그 한 예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신앙에 값을 메기는 일을 목숨걸고 반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은총의 여호와 하나님이고 그 은총은 값없이 주어진다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오늘의 개혁교회가 헌금이나 다른 것으로 신앙에 값을 매기거나 강요한다면 그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니라 개혁되어야 할 교회입니다.
인간을 향해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것이 바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께 최고의 감사를 표현해야 할 이유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간 사람들이 천신만고 끝에 추수한 곡식을 앞에 두었을 때 추수한 곡식보다도 생존할 수 있게 해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드린 감사였습니다. 우리 고대의 추수감사인 추석은 농사케 해 주시고 추수케 해 주신 하늘을 하늘로 인식하고 하늘을 향해 그 은총에 대해 보은하는 감사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감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길이었고 그 자신 우리에게 다가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 이것은 감사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그러므로 바젤(Basel)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칼 바르트(Karl Barth)는 개혁교회의 윤리는 감은(感恩)의 윤리라고 했습니다. 즉 은총에 감사하는 윤리란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헌금드리는데 있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헌금은 제물(祭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물과 헌금은 확연히 구별됩니다. 제물은 속죄를 전제로 하는 조건적이지만 헌금은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 감사의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제사를 동물제사로 바꾼 것, 여호와 하나님이 오히려 자기가 받을 제물을 스스로 준비하신 것, 그것이 제사를 인간화하는 것이었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자유롭게 만나게 되게 한 종교개혁은 신앙의 인간화였습니다. 인간화(Humanization)란 의미는 단순히 인간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화는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인간화(Inhumanization)란 말은 인간에게 거짖과 속박과 종속과 굴복을 강요하는 것, 인간답지 못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이 배경으로 비인간화한 신앙, 즉 거짖과 속박과 종속과 강요의 신앙을 은총과 믿음의 신앙으로 개혁한 것입니다. 이 개혁운동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란 정치구조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고 자유와 평등을 현대 사회윤리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감사는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하고 이런 이치를 밝혀 준 종교개혁으로 인해 감사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사회에 남긴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을 인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신앙의 유산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상황에 있으며 우리 인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우리 인간상황은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종교개혁이 또 한번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요청되는 개혁은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이후 유럽에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많은 사상들이 생겨났습니다.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낳으면서 인간의 자유의 행진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인간의 자유행진은 오늘 인류의 삶을 눈부실 정도로 진보시키고 발전시켰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무진장 바꿔놓았습니다. 요전에 텔레콤에 온 한국분이 말하기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상황을 보면 자기는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이 처럼 과학과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영성은 반대로 엄청나게 황폐해 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이성의 노예가 되고 과학의 맹신자가 되고 경제와 돈이란 우상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던 이성과 합리는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속박시키고 있습니다. 중세교회가 인간의 이성을 억눌려 버렸듯이 오늘의 이성은 인간의 영성을 억눌러 버리고 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들중에는 이 시각에서 오늘 유럽이 당면한 문제점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계몽주의의 공로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초월적 존재, 즉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부정이 우리 시대 역사에서 가장 큰 과오'라고 지적합니다.
불란서의 정치철학자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21세기는 영적인 세기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Le Vingt-et-unieme siecle sera spirituel ou il ne sera pas!).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21세기는 영적인 세기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파멸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오늘 유럽, 나아가서 전 세계에 큰 정신적 경종이 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에디 코탈 알테스(Edy Korthals Altes)는 네델란드 외교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35년간 외교관생활을 하고 은퇴했는데 최근에 "유럽을 위한 마음과 영혼"(Mind and Soul for Europe)이란 책을 냈습니다. 외교관으로 평생 세계 현실의 한 복판에서 생태계 파괴, 증폭되는 사회적 갈등, 점점 폭력화되는 도시, 가치관의 파괴 등 오늘 세계가 당면한 많은 문제를 보면서 이 문제는 바로 인간의 영성의 부재때문이라고 보고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영성회복(Spiritual Renewal)을 외치고 있습니다. 성직자가 아닌 외교관이 이런 절규를 했다는 사실에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딜렘마가 얼마나 영적으로 절박한 것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은총을 경험했듯이 이제는 우리 인류가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다가가는 영적 개혁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광신적인 종말론자들이나 폐쇠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종교로 돌아가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겸허한 비판이자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유턴(U-Turn), 즉 회개(Metanoia)의 몸짓입니다.
체코 대통령 바츠라브 하벨(Vaclav Havel)은 박해받고 있던 당시에 쓴 자서전에서 "현재 세계의 위기는 현대문명의 영적 상태와 상관이 있다"고 진단하고 인간이 진실로 인간적이 되는 길에 대해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초월해 있는 권위(extramundane authority), 즉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을 절대적 존재를 향하게 할 때에만이 진정으로 인간적 차원이 될 수 있다.
현대 인간들은 인간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반면에 하벨은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유럽지성인들의 탄식은 21세기를 맞으면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황하는 인류에게 의미심장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자기 몫을 가지고 아버지곁을 떠났던 탕자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시간과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 그 자신보다 아버지에게 더 큰 감사예물이 어디있겠습니까
오늘 이야기는 아름다운 신앙이야기이지만 사실 끔찍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고향을 떠나 수십년 객지를 유랑했던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얻은 아들, 바로 그 아들을 제물로 잡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삭을 잡아 바치기로 되어 있었던 모리아산정 바로 그 지점에 지금 예루살렘 사진에서 보는 황금빛 이슬람 사원이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서 이삭이 마지막 순간에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었고 아브라함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순종하라는 선생님의 권면에는 동의를 했지만 어린 마음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들을 잡아 자기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강요하는 비정한 여호와 하나님이 이해가 안되었고 둘째는 아무리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자기의 믿음을 인정받기 위해 아들을 잡아 바치겠다는 이기적인 아버지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목사님이었고 저도 외동 아들이었는데 우리 아버지도 만약 아들을 바치라 명령을 받으면 나를 저렇게 바칠 것이 아닌가 싶어 가끔 아버지를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설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있는 교훈을 줍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불굴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믿을 수 없을 때 믿는 믿음이고 진정한 순종은 순종할 수 없을 때 하는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믿음과 순종을 보였고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둘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모든 인간의 조건을 초월했을 때 진정한 경외가 됩니다. 셋째는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소위 "여호와 이레"란 유명한 신앙적 개념입니다. "여호와 이레"란 말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는 선도자"란 뜻입니다.
이 모든 교훈이 다 중요하고 의미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이야기에서 오늘 주일의 주제인 종교개혁과 감사의 본래적 의미를 찾아보려 합니다. 오늘 이야기 표면에는 방금 말씀드린대로 순종, 믿음,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경외,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미리 준비하심과 같은 신앙적인 의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이 이야기 이면에는 아브라함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고대사회의 삶을 전적으로 규정하는 종교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는 모든 종교가 인간제사(人間祭祀, Human sacrifice)를 행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잡아 바치는, 특히 어린아이를 잡아바치는 인간제사가 최고의 제사로 인정되던 상황입니다. 레위기 18장 21절에 보면 이런 관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케 말아서 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이 말씀의 직접적인 배경은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친 가나안 원주민들의 풍습입니다. 가나안 원주민, 특히 암몬 족속들은 민족신인 몰록에게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런 인간제사는 특별히 국가적 재난이나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드렸습니다. 이를테면 비가 오지 않거나 홍수, 전쟁등 나라에 큰 재난이 일어날 경우에 이것이 神의 노여움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 神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풍습은 우리 한국사람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심청전 이야기는 중국 상인들이 험한 바다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인간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또 에밀레종의 이야기는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선덕대왕의 불심(佛心)과 관련된 것인데 이는 인간제물이 신앙심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는 한 방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삭제사 이야기는 이런 상황에서 무슨 암시를 하고 있습니까 이 이야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시 횡행하던 인간제사를 거부하고 폐지하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가장 보편적이던 인간제사(人間祭祀)를 폐지하고 이를 동물제사(動物祭祀)로 대치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 조치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는 인도적인 종교'라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신학은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을 설명할 때 종종 인격적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서 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식은 항상 부모를 위해 있지 않지만 부모는 항상 자식을 위해 있는 자세와 같습니다.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이 다른 종교의 신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있다면 다른 종교의 신은 인간을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끊임없이 닥아오게 강요하는 신이라면 성서의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끊임없이 인간을 향하여 닥아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신앙은 속박과 강요의 신앙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신앙입니다.
종교개혁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닥아가고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닥아가도록,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아무 장애없이, 아무 조건없이 만날 수 있게 복음의 이해를 바꾸고 교회의 제도를 바꾼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아니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순수한 만남을 방해하는 교회제도를 철거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데 많은 인위적인 제도와 조건들을 만들었습니다. 면죄부, 마리아를 통해서 드리는 기도 등이 그 예입니다. 이 제도들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순수한 만남이 방해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성경을 기준으로 하여 이 모든 인위적인 제도와 조건들을 없애나갔습니다.
베른에 가면 뮌스터(M nster)란 대성당이 있는데 성당안으로 들어가면 앞쪽 왼편 위에 스테인 글라스로 된 그림이 있습니다. 쮜리히(Z rich)에서 개혁을 하던 쯔빙글리(Zwingli)가 한번은 베른을 방문하여 이 그림을 보았습니다. 이 그림은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생명수가 방앗간 파이프같은 통로를 통해 흐르는데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이 맨 꼭데기에서 파이프에 생명수를 부어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파이프 중간에 교황과 신부가 수도꼭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쯔빙글리(Zwingli)가 이 그림을 본따서 목판에다가 새로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새로운 그림은 중간에 교황과 신부가 조절하는 수고꼭지를 없애고 사람들이 생명수를 바로 받아먹도록 파이프를 여호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직접 연결한 것이었습니다. 이 목판그림은 당시 글을 읽을 줄 모르던 대다수 베른 민중들에게 종교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림으로 설명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개혁의 보편적인 정의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가 방해받는 벽을 없애는 것이 개혁입니다. 제가 1986년 아직도 동서독이 갈라져 있을 때 동베르린을 방문했습니다. 서베르린에서 동베르린으로 건너갈 때 무려 8개의 문을 통과해서 넘어갔습니다. 동베르린에 가서 바라보는 서베르린은 딴 세상만큼이나 먼 세상이었습니다. 이 장벽이 동베르린과 서베르린이 서로 순수하게 바라볼 수 없게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작년 5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겪었던 심정입니다. 이 순수함을 막는 벽을 없애는 것이 통일입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도 정부나 사회가 개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무엇이 진정한 개협입니까 정부와 국민이 자유롭고 순수하게 만나게 하는 것이 개혁입니다. 경제개혁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순수하게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몇가지 제도를 개혁한다고 개혁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와 국민이, 생산자와 소비자가 순수하게 만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진정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개혁도 이와 같습니다.
"종교개혁이란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순수하게 만나는 것, 즉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자유롭게 닥아가게 하고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게 닥아가도록 하는 것. "입니다.
수많은 개혁자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자유롭게 다가오시도록,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게 다가가도록 그 길을 열기 위해 중세교회와 사회에 도전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자유의 길을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총이란 길을 통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믿음이란 길을 통해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신앙에는 값이 없습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신앙에 값을 매겼습니다. 노골적으로 매길 수 없으니까 선행이란 이름으로 매겼습입니다.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한 면죄부 발행이 그 한 예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신앙에 값을 메기는 일을 목숨걸고 반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은총의 여호와 하나님이고 그 은총은 값없이 주어진다고 선언했습니다. 만약 오늘의 개혁교회가 헌금이나 다른 것으로 신앙에 값을 매기거나 강요한다면 그 교회는 개혁교회가 아니라 개혁되어야 할 교회입니다.
인간을 향해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것이 바로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께 최고의 감사를 표현해야 할 이유입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간 사람들이 천신만고 끝에 추수한 곡식을 앞에 두었을 때 추수한 곡식보다도 생존할 수 있게 해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드린 감사였습니다. 우리 고대의 추수감사인 추석은 농사케 해 주시고 추수케 해 주신 하늘을 하늘로 인식하고 하늘을 향해 그 은총에 대해 보은하는 감사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감사는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감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길이었고 그 자신 우리에게 다가오신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 이것은 감사의 필요충분조건입니다.
그러므로 바젤(Basel)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칼 바르트(Karl Barth)는 개혁교회의 윤리는 감은(感恩)의 윤리라고 했습니다. 즉 은총에 감사하는 윤리란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감사헌금을 드리는데 헌금드리는데 있어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헌금은 제물(祭物)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물과 헌금은 확연히 구별됩니다. 제물은 속죄를 전제로 하는 조건적이지만 헌금은 은총에 대한 무조건적 감사의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제사를 동물제사로 바꾼 것, 여호와 하나님이 오히려 자기가 받을 제물을 스스로 준비하신 것, 그것이 제사를 인간화하는 것이었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자유롭게 만나게 되게 한 종교개혁은 신앙의 인간화였습니다. 인간화(Humanization)란 의미는 단순히 인간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화는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고 인간이 진정으로 인간답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인간화(Inhumanization)란 말은 인간에게 거짖과 속박과 종속과 굴복을 강요하는 것, 인간답지 못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인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이 배경으로 비인간화한 신앙, 즉 거짖과 속박과 종속과 강요의 신앙을 은총과 믿음의 신앙으로 개혁한 것입니다. 이 개혁운동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란 정치구조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고 자유와 평등을 현대 사회윤리로 자리잡게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감사는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시는,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하고 이런 이치를 밝혀 준 종교개혁으로 인해 감사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사회에 남긴 민주주의와 자유와 평등을 인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신앙의 유산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상황에 있으며 우리 인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우리 인간상황은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종교개혁이 또 한번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요청되는 개혁은 교회의 개혁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이후 유럽에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많은 사상들이 생겨났습니다. 16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 이성주의, 합리주의, 과학주의를 낳으면서 인간의 자유의 행진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인간의 자유행진은 오늘 인류의 삶을 눈부실 정도로 진보시키고 발전시켰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무진장 바꿔놓았습니다. 요전에 텔레콤에 온 한국분이 말하기를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상황을 보면 자기는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이 처럼 과학과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영성은 반대로 엄청나게 황폐해 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이성의 노예가 되고 과학의 맹신자가 되고 경제와 돈이란 우상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던 이성과 합리는 이제는 오히려 인간을 속박시키고 있습니다. 중세교회가 인간의 이성을 억눌려 버렸듯이 오늘의 이성은 인간의 영성을 억눌러 버리고 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들중에는 이 시각에서 오늘 유럽이 당면한 문제점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계몽주의의 공로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초월적 존재, 즉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부정이 우리 시대 역사에서 가장 큰 과오'라고 지적합니다.
불란서의 정치철학자 앙드레 말로(Andre Malraux)는 "21세기는 영적인 세기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Le Vingt-et-unieme siecle sera spirituel ou il ne sera pas!).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21세기는 영적인 세기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파멸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오늘 유럽, 나아가서 전 세계에 큰 정신적 경종이 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에디 코탈 알테스(Edy Korthals Altes)는 네델란드 외교관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35년간 외교관생활을 하고 은퇴했는데 최근에 "유럽을 위한 마음과 영혼"(Mind and Soul for Europe)이란 책을 냈습니다. 외교관으로 평생 세계 현실의 한 복판에서 생태계 파괴, 증폭되는 사회적 갈등, 점점 폭력화되는 도시, 가치관의 파괴 등 오늘 세계가 당면한 많은 문제를 보면서 이 문제는 바로 인간의 영성의 부재때문이라고 보고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영성회복(Spiritual Renewal)을 외치고 있습니다. 성직자가 아닌 외교관이 이런 절규를 했다는 사실에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딜렘마가 얼마나 영적으로 절박한 것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시는 은총을 경험했듯이 이제는 우리 인류가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다가가는 영적 개혁을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광신적인 종말론자들이나 폐쇠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종교로 돌아가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겸허한 비판이자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위한 유턴(U-Turn), 즉 회개(Metanoia)의 몸짓입니다.
체코 대통령 바츠라브 하벨(Vaclav Havel)은 박해받고 있던 당시에 쓴 자서전에서 "현재 세계의 위기는 현대문명의 영적 상태와 상관이 있다"고 진단하고 인간이 진실로 인간적이 되는 길에 대해 이렇게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초월해 있는 권위(extramundane authority), 즉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여 우리 자신을 절대적 존재를 향하게 할 때에만이 진정으로 인간적 차원이 될 수 있다.
현대 인간들은 인간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반면에 하벨은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유럽지성인들의 탄식은 21세기를 맞으면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황하는 인류에게 의미심장한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자기 몫을 가지고 아버지곁을 떠났던 탕자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 시간과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탕자 그 자신보다 아버지에게 더 큰 감사예물이 어디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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