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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종교개혁과 자기갱신

본문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오늘은 483주년을 맞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에 의해서 중세교회가 개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는 개혁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세교회가 너무 세속화 되고, 타락하다 보니까 개혁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종교라 할지라도 세속화되면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농부들은 씨뿌리기 전에 논밭을 갈아엎지 않습니까. 그래야 묵은 땅이 속으로 속의 땅이 밖으로, 서로 섞이게 되어 흙이 힘이 있고, 농작물들이 강해지고 잘됩니다. 그렇지 않고 굳어버린 논과 밭을 그냥 두고 씨를 뿌려 보십시오. 땅 힘이 다 빠진 산성화된 땅에서 제대로 곡식들이 자라겠습니까
사람 사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도록 내버려두면 타성에 젖어서 굳어버리거나 썩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언제나 변화와 갱신과 새로워지려는 노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사회가 언제나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런 구태의연한 생활에 일침을 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예수님이 대단히 분노하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했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잠16:32)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서 아주 엄하게 분노하고 계십니다. 이 분노는 어떤 분노입니까 사리사욕을 위해서나, 개인의 감정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 더럽혀지는데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분노, 의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그리고 먼저 성전을 둘러 보셨습니다. 보니까 성전 안에 장사꾼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짐승떼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치 칠성시장이나 서문시장과 같이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제사장들이 자릿세(뇌물)을 받고 장사꾼들에게 성전까지 내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내쫓고 장사꾼들을 꾸짖어 내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그러면 예수님의 분노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당시 종교인들"입니다. 당시 종교인들은 제사장들이고 바리새인들이고 서기관들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
예수님은 이들에게서 형식주의, 위선, 부패, 유대교의 타락을 보았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종교적 특권을 남용했습니다. 그리고 돈주머니 불리기에 급급했습니다. 예배의 정신은 이미 상실한 채 예배의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성전은 장사꾼들에게 넘겨주었고 돈벌이에 눈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을 향해서 분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너무 강해서 성전을 나오시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죽게 하셨습니다. 그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 나무입니다. 나라를 상징하는 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것은 장차 이 나라가 망하고 말 것이라는 예고인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그 당시의 모습을 보고 역겨움을 느꼈습니다. 자기도 제사장 집안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앞길이 보장되어 있었고 그들처럼 안정된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면 세례요한도 그들처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요한으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광야로 나가서 야인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타락은 그 시대를 타락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 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 성이 멸망했고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종교는 그 시대에 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종교인들은 그 시대를 살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회가 건강해집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분노는 오늘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꾸준한 자기갱신"을 요구하십니다. 사람이나 종교나 꾸준한 자기갱신이 있어야 하고 자기수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고쳐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력이 길게 됩니다. 갱신이라는 말은 고친다는 뜻입니다. 고치면서 산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살피면 바로 살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고쳐서 살았습니다. 요나의 외침을 듣자마자 니느웨는 자기를 고치고 수정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는 살아났습니다. 용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는 망했습니다. 그들은 고치지 않았습니다. 자기갱신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경고를 듣고도 고치지 않은 예루살렘도 성전과 함께 무너졌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을 끊임없이 보냈지만 고치지 않은 유다와 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고쳐야 삽니다. 고치려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사명감이 없어진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이 급속도로 세속화 되어가고 음란하고 혼란한 세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정치인에게는 정치인으로서의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건강해 집니다. 대통령이 정말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사심이 없는 분이라면, 정말 그런 분이 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한 사람이 평생을 대통령을 해도 국민들은 불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 중에 과연 그런 분이 누가 있었습니까
교사에게도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소명감이 있어야 평생을 교사로 봉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정말 교육에 엄숙한 사명감이 있고 제자들을 사랑하는 교사로서 천직의식이 있다면 우리 나라의 교육은 지금처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성직입니다. 이 직임 만큼 두렵고 떨리는 사명도 없습니다. 특별히 영혼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로 하지 않으면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소명감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소명감을 가지고 임해야 교회가 건강하고 성도가 건강한 것입니다.
소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기를 자꾸 변화하게 만들고 성장하게 만듭니다. 자영업자, 기술자, 경제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루터는 "만인 제사장론"을 주창하면서 "무슨 직업이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신성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성직 수행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이 소명이 있으면 이 세상이 건강해지고 밝아집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소명감이 없는 시대입니다. 자꾸 세상이 세속화되고 타락하는 것은 이런 소명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권위 있는 책 가운데 대영백과사전(브리태니카)라는 사전이 있습니다. 이 회사의 샐러리맨들에게는 10대 신조가 있습니다. 그 중 세 번째 신조가 "나는 이 직업을 통해서 국가에 공헌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감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정신입니까.
건축가들 집을 지어서 돈이 얼마가 생긴다 하는 생각이 앞서면 부실공사가 되고 맙니다. 그렇지만 내가 작품을 남긴다는 사명이 있으면 함부로 집을 짓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명감이 있어야 하고 그래야 그것을 위해 밤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소명감이 없기 때문에 날림공사가 이루어지고 건물이 부실하게 지어지는 것입니다. 부실공사는 우리나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어느 곳에나 부실은 있게 마련입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혹시 보셨습니까. 1912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해서 침몰합니다. 그래서 1,500명이 수장됩니다. 46,000톤급의 거대하고 화려한 배가 침몰하는데 그 원인을 보면 사용하지 말아야 할 망간과 유황성분이 함유된 철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약한 철판은 빙산과 부딪히면 금방 조각이 납니다. 그런데 돈을 챙기려고 부실한 재료를 썼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입니다.
모두 소명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살면 안됩니다. 내 이익 조금 보려다가 나도 손해보고 남들도 모두 불행해집니다. 소명감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소명감이 없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고 사고가 많은 것입니다.
어느 건축가가 한 직장에서 오래 일하다가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사장이 말하기를 "마지막으로 집 한 채만 더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이 건축가는 마지막까지 부려먹는다며 불평하였습니다. 그래서 집을 대충 지었습니다. 다 지어놓으니 사장이 말합니다. "자네는 나와 평생 같이 일하고 수고했으니 내가 자네에게 무슨 선물을 줄까 생각하다가 이 집을 선물로 주기로 했네. 이 집을 가지게. "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오늘 사람들이 세상을 대충 살고 허튼 데 열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위용이 당당했습니까. 제사장들이 얼마나 엄하고 권위적인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 그들이 물질에 눈이 어두워 뇌물을 받고 그 성전을 장사꾼들에게까지 불하했습니다. 기도해야 할 집이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도소리는 없고 흥정소리만 들립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께서 역겨워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분노하십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그때만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예수님이 의분을 내시며 성전청소를 하시던 성경 속의 그 시대만이 개혁이 필요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도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개혁은 제도나 프로그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개혁은 자기갱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부터 갱신하고 우리 신앙부터 갱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망을 받고 결국 망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변해야 삽니다. 끊임없는 자기갱신을 통하여 진정한 개혁이 이루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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