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좋은 포도주 이야기
본문
16세기에 있었던 위대한 사건을 '종교개혁'이라고 단언함에 있어 누구도 이의를 재기하지 않을 줄로 안다. 실제로 루터나 칼빈, 그리고 존 낙스나 멜랑히톤 같은 당대의 유명한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왕권과 교권의 갈등을 '성서제일주의'로 해결해 나갔으며, 그 결과로 신앙의 자유와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는데 대해 동의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성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하였던 바, 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알고 구원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바로 그 유일한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는 말씀들 가운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 한마디에 종교개혁자들은 그의 생을 '개혁'의 의지로 불태울 수 있었으니, 결국 우리는 종교개혁의 동기는 '성서제일주의로의 삶'이었으며 그 근원이 되는 것은 곧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혁(改革)'이라 함은 '제도나 기구 따위의 낡거나 불합리한 점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개혁의 語義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예수는 위대한 종교개혁가였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그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 대언 하실 때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하셨고, 그 자신 그것을 몸소 행하심으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고, 죄악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의 말씀을 증거하셨으며,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신 사건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는 예수께서 계셨던 당시의 랍비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정치, 사회적 지도자들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으며 또한 '개혁적인 의지의 실천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 이해로 인해 시작된 것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때,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의원동력은 바로 예수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독일의 베를린대학, 뮌헨대학 등에서 역사와 철학을 수학했던 리챠드 프리덴탈(Richard Friedenthal)에 의하면, 95개 조항에 도전한 루터조차도 "자신이 생각했던대로의 진정한 종교개혁은 없었다"라고 하였던 바(R 프리덴탈, 마틴루터의 生涯, 下, 1979, p. 420), 오늘날 우리가 종교개혁으로 이루어 냈다고 하는 개신교 역사의 시작은 사실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 일축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가는 일개인의 자기발견과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역사참여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나약한 자의 삶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자신의 확신하고 있는 바 성경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적 기초 위에서 참된 자아실현을 해 나가는데 진정한 종교개혁의 의미가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이 모여 들었고, 그 결과로 개혁의지의 세력은 힘있는 공동체의 싸움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힘있는 개혁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내 개인의 인격적인 문제이든 가정적인 결함이 되었든, 아니면 우리 동네 더 나아가 보다 넓은 사회적인 변혁이 되었든, 우리에게는 지금의 내 모습 이대로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겸손한 자기인식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본인은 "개혁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자기 변화에 있다"고 말하는 바이다. 주변의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자기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그 변화는 '불변의 변화'요 '미개혁된 개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겸손한 고백과 "내 힘의 근원은 오직 여호와"라는 진실한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만물에 관하여, 그리고 만인에 관하여 열린 마음과 열린 시각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말씀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은 바로 예수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지금 예수께서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말씀을 듣고 '상황'을 인식하셨다. 그것은 부족한 포도주의 양을 추가로 공급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 상황은 '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예수 앞에 포도나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설령 그것들이 준비되어 있다하여도 급히 포도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단지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을 뿐이었다(6절).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3절)"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잠시 후에, 이 난처한 상황은 '기가 막히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사건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냥 항아리에 가득할 정도로 하인들이 갖다 부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인들은 단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했던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었을 뿐이었다(7-8절). 그런데 그 물을 마신 연회장은 포도주를 맛보고는 신랑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9-10절)"하고 칭찬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직접 목격한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곧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던 하인들과(9절) 제자들이었다(11절). 오늘 본문이 쓰여진 것은 바로 그 사건을 기억하면서 예수를 그렸던 제자들 가운데 '요한'에 의한 것이니, 우리는 오늘 이 본문 속에서 거짓이 아니요 그러면서도 거짓말과 같은 '변화의 역사'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포도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포도주는 어떠한 성질의 물질인가 말이다.
1)포도주는 '변화된 물질'이다. 물이 두 개의 산소와 한 개의 수소 분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 포도주는 이 물에 더해 최소한 '알콜'이라고 하는 또 다른 물질의 혼합물이요, 일반 상식적으로도 물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도주 100g에는 88g의 물과 9. 6g의 에틸 알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단백질, 탄수화물, 섬유, 칼슘, 인, 나트륨, 비타민 등 최소 22가지의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이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는 신비한 체험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개혁적인 삶을 경주할 수 있으리라!
2)포도주는 '색채가 있는 물질'이다. 반면에 물은 무색이다. 투명하여 그 속까지 훤히 비췬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위에 물이 묻으면 바위 색이 되어 보이고 모래 위에 묻으면 모래 색이 되어 상황에 쉽게 적응이 되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물 자체로써는 쉽게 상황에 적응이 되거니와 주어진 상황들을 변화시키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는 붉은 빛 혹은 자주빛의 '유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포도주가 튀는 물건은 그 빛깔로 인해 얼룩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투명한 유리창이든 베이지색 커튼이든 어떠한 물건들에도 이 포도주 빛깔이 묻기만 하면 그 물건들은 포도주의 빛깔로 물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의 피로 물든 구속받은 성도들이다. 우리의 영향력이 만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백한 색채를 띠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3)포도주는 '맛이 있는 물질'이다. 물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나름대로 시원한 맛을 내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맛이 달기도 짜기도 시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의 물맛은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의 '입맛'이 그 물의 맛을 변하게 하는 것이지 물 자체로써는 결코 별도의 맛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 것이다. 한마디로 물은 無色, 無臭, 無味한 물질인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의 맛은 어떠한가 여기 본문의 9-10절을 보면 연회장은 변화된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너무도 맛이 있어서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포도주에는 특유의 '맛'이 있다는 것이다. 포도주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백포도주, 적포도주, 로제 등의 단맛, 쓴맛, 떫은맛, 감칠맛, 신맛 등 여러 가지 맛과 함께 다양한 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포도주와 같이 변화되는 역사를 체험하여 맛을 지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무미건조한 존재가 아닌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고 주변의 상황을 변화시켜 나가는 개혁의 사람들로 오늘의 현실에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포도주의 성질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보아 '말씀'을 예표한다(사55:1). 따라서 여기 변화된 포도주(좋은 포도주)의 역사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앞으로의 자신의 사역이 '묵은 경륜'과 '가치규범'에 대해 계속적으로, 그리고 대조적으로 도전하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심히 중요한 '표적'의 의미를 지니는 증거로써, 이 포도주는 새로운 기독교의 세대이며 묵은 세대를 대신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중에 내놓은 이 좋은 포도주가 질이 낮은 앞의 포도주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신'한다는 것이다(이상훈, 성서주석, 1993, pp109-110), . 이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게서 보내신 수많은 선지자들을 대신하여 단 한번의 희생으로 인해 만인을 구원하실 예수 자신의 피흘림의 예표이기도 한 것이다(필자 주). 우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참 구원과 영생의 복음으로 변화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말씀이 부재하였던 시대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핵심은 그 부재한 말씀의 권위를 회복한 사건의 역사이며,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오늘의 내 속에 바로 그 권위있는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내재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 당당함이 있어야 비로소 개혁의 기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작금 조국은 겨례를 향해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일반 개혁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개혁임은 선남선녀도 동의하는 바이리라. 이에 누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는가 당신은 오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는가 당신은 개혁의 주체로 오늘에 현존하는가
그러면 성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요한이 그의 복음서 제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하였던 바, 성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알고 구원함을 받아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바로 그 유일한 영생의 길을 제시해 주는 말씀들 가운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말씀 한마디에 종교개혁자들은 그의 생을 '개혁'의 의지로 불태울 수 있었으니, 결국 우리는 종교개혁의 동기는 '성서제일주의로의 삶'이었으며 그 근원이 되는 것은 곧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혁(改革)'이라 함은 '제도나 기구 따위의 낡거나 불합리한 점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개혁의 語義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예수는 위대한 종교개혁가였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그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 대언 하실 때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하셨고, 그 자신 그것을 몸소 행하심으로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성서를 통해 예수께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고, 죄악으로 인하여 괴로워하는 자들에게 평안의 말씀을 증거하셨으며, 병든 자들을 치유해 주신 사건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는 예수께서 계셨던 당시의 랍비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정치, 사회적 지도자들에 대한 엄청난 도전이었으며 또한 '개혁적인 의지의 실천적인 삶'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 이해로 인해 시작된 것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때, 우리가 말하는 종교개혁의원동력은 바로 예수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독일의 베를린대학, 뮌헨대학 등에서 역사와 철학을 수학했던 리챠드 프리덴탈(Richard Friedenthal)에 의하면, 95개 조항에 도전한 루터조차도 "자신이 생각했던대로의 진정한 종교개혁은 없었다"라고 하였던 바(R 프리덴탈, 마틴루터의 生涯, 下, 1979, p. 420), 오늘날 우리가 종교개혁으로 이루어 냈다고 하는 개신교 역사의 시작은 사실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고 일축하는 것이 오늘날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들이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가는 일개인의 자기발견과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역사참여에 있었다는 것이다. 즉,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나약한 자의 삶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며 자신의 확신하고 있는 바 성경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적 기초 위에서 참된 자아실현을 해 나가는데 진정한 종교개혁의 의미가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같은 생각을 지닌 자들이 모여 들었고, 그 결과로 개혁의지의 세력은 힘있는 공동체의 싸움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힘있는 개혁의 의지가 필요하다. 그것이 내 개인의 인격적인 문제이든 가정적인 결함이 되었든, 아니면 우리 동네 더 나아가 보다 넓은 사회적인 변혁이 되었든, 우리에게는 지금의 내 모습 이대로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겸손한 자기인식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본인은 "개혁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자기 변화에 있다"고 말하는 바이다. 주변의 상황이 아무리 변해도 자기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그 변화는 '불변의 변화'요 '미개혁된 개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겸손한 고백과 "내 힘의 근원은 오직 여호와"라는 진실한 고백이 있을 때 우리는 만물에 관하여, 그리고 만인에 관하여 열린 마음과 열린 시각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말씀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나'를 변화시키실 수 있는 분은 바로 예수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지금 예수께서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말씀을 듣고 '상황'을 인식하셨다. 그것은 부족한 포도주의 양을 추가로 공급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 상황은 '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예수 앞에 포도나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설령 그것들이 준비되어 있다하여도 급히 포도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단지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을 뿐이었다(6절). 그래서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3절)"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절)"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잠시 후에, 이 난처한 상황은 '기가 막히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사건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냥 항아리에 가득할 정도로 하인들이 갖다 부은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인들은 단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했던대로 항아리에 물을 채웠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었을 뿐이었다(7-8절). 그런데 그 물을 마신 연회장은 포도주를 맛보고는 신랑을 불러 말하기를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9-10절)"하고 칭찬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이를 직접 목격한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곧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었던 하인들과(9절) 제자들이었다(11절). 오늘 본문이 쓰여진 것은 바로 그 사건을 기억하면서 예수를 그렸던 제자들 가운데 '요한'에 의한 것이니, 우리는 오늘 이 본문 속에서 거짓이 아니요 그러면서도 거짓말과 같은 '변화의 역사'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포도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포도주는 어떠한 성질의 물질인가 말이다.
1)포도주는 '변화된 물질'이다. 물이 두 개의 산소와 한 개의 수소 분자로 되어 있다고 한다면, 포도주는 이 물에 더해 최소한 '알콜'이라고 하는 또 다른 물질의 혼합물이요, 일반 상식적으로도 물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포도주 100g에는 88g의 물과 9. 6g의 에틸 알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단백질, 탄수화물, 섬유, 칼슘, 인, 나트륨, 비타민 등 최소 22가지의 성분들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이 변화의 역사를 체험하는 신비한 체험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개혁적인 삶을 경주할 수 있으리라!
2)포도주는 '색채가 있는 물질'이다. 반면에 물은 무색이다. 투명하여 그 속까지 훤히 비췬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위에 물이 묻으면 바위 색이 되어 보이고 모래 위에 묻으면 모래 색이 되어 상황에 쉽게 적응이 되는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물 자체로써는 쉽게 상황에 적응이 되거니와 주어진 상황들을 변화시키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는 붉은 빛 혹은 자주빛의 '유색'을 띠고 있다. 그래서 포도주가 튀는 물건은 그 빛깔로 인해 얼룩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투명한 유리창이든 베이지색 커튼이든 어떠한 물건들에도 이 포도주 빛깔이 묻기만 하면 그 물건들은 포도주의 빛깔로 물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의 피로 물든 구속받은 성도들이다. 우리의 영향력이 만물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백한 색채를 띠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3)포도주는 '맛이 있는 물질'이다. 물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주고 나름대로 시원한 맛을 내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물맛이 달기도 짜기도 시기도 하다. 그러나 그 때의 물맛은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의 '입맛'이 그 물의 맛을 변하게 하는 것이지 물 자체로써는 결코 별도의 맛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 것이다. 한마디로 물은 無色, 無臭, 無味한 물질인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의 맛은 어떠한가 여기 본문의 9-10절을 보면 연회장은 변화된 포도주의 맛을 보고는 너무도 맛이 있어서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있다. 여기서 보듯이 포도주에는 특유의 '맛'이 있다는 것이다. 포도주의 종류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백포도주, 적포도주, 로제 등의 단맛, 쓴맛, 떫은맛, 감칠맛, 신맛 등 여러 가지 맛과 함께 다양한 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포도주와 같이 변화되는 역사를 체험하여 맛을 지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무미건조한 존재가 아닌 빛으로 소금으로, 그리고 주변의 상황을 변화시켜 나가는 개혁의 사람들로 오늘의 현실에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포도주의 성질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보아 '말씀'을 예표한다(사55:1). 따라서 여기 변화된 포도주(좋은 포도주)의 역사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앞으로의 자신의 사역이 '묵은 경륜'과 '가치규범'에 대해 계속적으로, 그리고 대조적으로 도전하리라는 것을 시사하는 심히 중요한 '표적'의 의미를 지니는 증거로써, 이 포도주는 새로운 기독교의 세대이며 묵은 세대를 대신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나중에 내놓은 이 좋은 포도주가 질이 낮은 앞의 포도주를 '계승'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신'한다는 것이다(이상훈, 성서주석, 1993, pp109-110), . 이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을 회개케 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게서 보내신 수많은 선지자들을 대신하여 단 한번의 희생으로 인해 만인을 구원하실 예수 자신의 피흘림의 예표이기도 한 것이다(필자 주). 우리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참 구원과 영생의 복음으로 변화된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시대에는 말씀이 부재하였던 시대였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핵심은 그 부재한 말씀의 권위를 회복한 사건의 역사이며,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오늘의 내 속에 바로 그 권위있는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내재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 당당함이 있어야 비로소 개혁의 기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작금 조국은 겨례를 향해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일반 개혁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개혁임은 선남선녀도 동의하는 바이리라. 이에 누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겠는가 당신은 오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는가 당신은 개혁의 주체로 오늘에 현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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