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고난] 그리스도의 죽음
본문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모든 활동이 끝나고 모든 관계도 단절이 되고 몸 은 부패하여 버립니다. 삶의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 니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한번쯤은 죽는다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부 정하려해도 이 엄연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 죽음의 문제 를 회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반응하는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단계 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돌보는데 크게 공헌한 사람 이 퀴블러 로스(Eilzabeth Kubler Ross)라는 심리학자입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단계를 대체로 다섯단계로 나누어 보았 는데 그 첫단계가 바로 부인(Denial)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애써 회피하거나,무관심한 자세를 보이거나,아예 내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결코 우리는 죽음을 피할수 없습니다. 정직 하게 말하자면 죽음의 문제는 우리의 가장 긍극적인 관심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는 죽음의 문제를 회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신앙적인 대응,기독교적인 응답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살펴 보아야 할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도 가장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옉수님은 사랑하시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가 나사로 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그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묻힌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온 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 다거듭 말하는 마리아의 슬픔에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본문 35절에서 기록하 고 있습니다. 죽음은 그 자체가 슬픔이며 통곡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슬피울며 통곡하는 이 상황이 죽음을 접하는 인간의 실존상황입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사랑하 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남편을 잃은 아내,아내를 잃은 남편,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들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나흘된 나사로의 무덤앞에선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이 희 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즉 죽어서 완전히 단절된 나사로와 다시 만날수 있게 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 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 려 함이니이다. 기도하신 후에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44절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 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으며,슬픔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죽음과 무덤앞에서의 좌절과 절망이 희망으로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만나보고픈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있으며 죽음에 대한 우리 기독교의 대답이 있는 것입니다. 새로 운 희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25절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리아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믿습니다. 믿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다시 만난다는 소망을 반드시 가지고 있 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우리는 영원히 산다는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 어야만 합니다. 물론 부활한 나사로로 마리아도 마르다도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이야기는 죽은 자의 부활의 실례를 역사에서 보여줌으로써 ;부활의 주님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보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 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3절에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무덤에 묻히 신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 니다. 우리는 오늘 사순절 네째주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반 드시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에 꺼냈던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열쇠는 바로 예수의 죽음,오늘 설교의 제목 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잘 깨닫고 이해 하는데 있습니다.
먼저 죽음에는 두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첫번째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으로 흙에서 온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 는 죽음입니다. 자연적인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왔다가 다시 하 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 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의 두번째 것인 신학적인 죽음,비 자연적인 죽 음,즉 죄 값으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자연적인 죽음을 생각하기에 앞 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 입니다. 거기에는 죽음의 공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를 육체에서 자유하게 해주기 때문입 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고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낡은 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영혼의 해방자입니다. 죽음은 쇠사슬을 풀어 줍니다. 죽음은 영혼을 육의 감옥에서 풀어서 그의 영원한 집으로 되돌아 가게 해 주 는 영혼의 해방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비극이 아 니라 축복의 기회요,자유의 축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독배도 서슴없이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입장이 플라톤 이래의 희랍철학의 영혼 불멸론이 라는 죽음에 대한 그들의 입장입니다.
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원론에 입각해 있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공관복음서가 일 치하게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겟세마네에서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는 심히 놀라 며 슬퍼하기 시작했고(막14:33) 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노라고(막 14:34)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두려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에게는 죽음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해방도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5:7절에서는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써 자기를 구원하실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직면하여 우시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예수 그리스도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부 르짖으며 절규하면서 운명하셨습니다(막15:37)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그의 죽음 은 무서운 공포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원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비자연적인 죽음으로 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며 더나아가 하나 님의 대한 항거 인데 이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값이며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의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비 자연적인 죽음,신학적인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저주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26절에서 죽음을 마지막으로 멸망할 원수라고 했습니다. 이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에의 대적이며 그의 원수이기에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의 버림받음 입니다. 그러므로 예 수 그리스도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는 여호와 하나님의 버림받음속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를 가지고 저주 받고 심판받고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 라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으며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 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성서의 증언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6 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하는 그 사망은 죄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께 버림받음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인데 그 죽음을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터인데 우리가 받지 아니하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그 죽음과 형벌을 받 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며 우리를 위하 여 버림바 당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 고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에 게 내려질 저주와 심판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내려졌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죄인이 아니며 우리에게 있어서의 심판의 날은 죽음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요 부활의 날이요,영생의 날인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3 사순절 네째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정리하여야 할것입니다. 우 리 모두는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이 죽음은 물론 자연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자연적인 죽음 즉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만 있다면 자연적인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구 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인 죽임을 당할때 죄로 말미암은 제2 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큰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고통의 날이요 멸망의 날이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분리되는 날이요 심판의 날이며 저주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슬퍼하면서 괴로와하고 답답해하 는 우리의 삶속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그 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계1:18) 그가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의 극복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 도의 부활로써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지 셨다는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 저 넘어에 있는 영생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로 나의 죄가 모두 사함 받았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이 사순절 기를 보내야 할것입니다. 험한 십자가,우리위해 지신 십자가,속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바라보고 굳게 믿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영생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나사로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도 가장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옉수님은 사랑하시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가 나사로 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그에게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미 나사로는 죽어서 무덤에 묻힌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은 온 통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 다거듭 말하는 마리아의 슬픔에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고 본문 35절에서 기록하 고 있습니다. 죽음은 그 자체가 슬픔이며 통곡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슬피울며 통곡하는 이 상황이 죽음을 접하는 인간의 실존상황입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사랑하 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남편을 잃은 아내,아내를 잃은 남편,사랑하는 친구를 잃은 사람들,이들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나흘된 나사로의 무덤앞에선 예수님은 슬픔에 잠긴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이 희 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즉 죽어서 완전히 단절된 나사로와 다시 만날수 있게 해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그리고는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 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 려 함이니이다. 기도하신 후에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44절에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 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으며,슬픔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죽음과 무덤앞에서의 좌절과 절망이 희망으로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다시 만나보고픈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있으며 죽음에 대한 우리 기독교의 대답이 있는 것입니다. 새로 운 희망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는 25절에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리아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믿습니다. 믿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부활을 통해 우리는 다시 만난다는 소망을 반드시 가지고 있 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만난 우리는 영원히 산다는 영생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 어야만 합니다. 물론 부활한 나사로로 마리아도 마르다도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이야기는 죽은 자의 부활의 실례를 역사에서 보여줌으로써 ;부활의 주님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보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 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3절에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무덤에 묻히 신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 니다. 우리는 오늘 사순절 네째주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 반 드시 우리가 넘어야 할 벽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에 꺼냈던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는 열쇠는 바로 예수의 죽음,오늘 설교의 제목 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잘 깨닫고 이해 하는데 있습니다.
먼저 죽음에는 두가지의 죽음이 있습니다. 첫번째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으로 흙에서 온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 는 죽음입니다. 자연적인 죽음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왔다가 다시 하 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 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의 두번째 것인 신학적인 죽음,비 자연적인 죽 음,즉 죄 값으로서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자연적인 죽음을 생각하기에 앞 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비교해 보려고 합니다. 플라톤이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 입니다. 거기에는 죽음의 공포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를 육체에서 자유하게 해주기 때문입 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영혼의 감옥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영혼을 구속하고 우리의 영혼을 영원히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낡은 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영혼의 해방자입니다. 죽음은 쇠사슬을 풀어 줍니다. 죽음은 영혼을 육의 감옥에서 풀어서 그의 영원한 집으로 되돌아 가게 해 주 는 영혼의 해방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는 죽음은 비극이 아 니라 축복의 기회요,자유의 축제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독배도 서슴없이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입장이 플라톤 이래의 희랍철학의 영혼 불멸론이 라는 죽음에 대한 그들의 입장입니다.
2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원론에 입각해 있는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공관복음서가 일 치하게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겟세마네에서의 죽음을 앞에 놓고 예수는 심히 놀라 며 슬퍼하기 시작했고(막14:33) 내 영혼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노라고(막 14:34)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두려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에게는 죽음은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해방도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5:7절에서는 큰 부르짖음과 눈물로써 자기를 구원하실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직면하여 우시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14:36)예수 그리스도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부 르짖으며 절규하면서 운명하셨습니다(막15:37)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그의 죽음 은 무서운 공포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원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비자연적인 죽음으로 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죄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며 더나아가 하나 님의 대한 항거 인데 이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고 성서는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값이며 죄의 결과입니다. 창세기의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비 자연적인 죽음,신학적인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저주입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26절에서 죽음을 마지막으로 멸망할 원수라고 했습니다. 이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에의 대적이며 그의 원수이기에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의 버림받음 입니다. 그러므로 예 수 그리스도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는 여호와 하나님의 버림받음속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를 가지고 저주 받고 심판받고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 라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죄인이 되셨으며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 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성서의 증언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6 장 23절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다 라고 하는 그 사망은 죄로 말미암은 것인데 그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께 버림받음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인데 그 죽음을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터인데 우리가 받지 아니하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하여 그 죽음과 형벌을 받 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며 우리를 위하 여 버림바 당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시 고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당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에 게 내려질 저주와 심판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내려졌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우리는 죄인이 아니며 우리에게 있어서의 심판의 날은 죽음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요 부활의 날이요,영생의 날인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3 사순절 네째주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정리하여야 할것입니다. 우 리 모두는 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이 죽음은 물론 자연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자연적인 죽음 즉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만 있다면 자연적인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구 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적인 죽임을 당할때 죄로 말미암은 제2 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큰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고통의 날이요 멸망의 날이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분리되는 날이요 심판의 날이며 저주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나사로의 죽음앞에서 슬퍼하면서 괴로와하고 답답해하 는 우리의 삶속에 오셔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이제 그 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계1:18) 그가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의 극복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 도의 부활로써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지 셨다는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우리는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 저 넘어에 있는 영생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고 그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로 나의 죄가 모두 사함 받았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이 사순절 기를 보내야 할것입니다. 험한 십자가,우리위해 지신 십자가,속죄의 십자가를 의지하고 바라보고 굳게 믿어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영생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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