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하나님의 힘
본문
예수님은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올라 가셨다. 회당은 바벧론 포로기 이후에 일어난 예배행위를 가지는 장소이다. 과거 이스 라엘의 성전예배는 제사가 예배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바벧론 포로 이후에는 성 전예배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회당예배였다. 오늘 본문은 회당예배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회당 예배의 절정은 율법을 낭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앞에 말씀 드린대로 누가복음 4장에는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 가셔서 선지자의 글을 읽어 주신 말씀이 담겨져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1)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2)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3)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4)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참 예배란 무엇인가 ? 예배는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 며 감격하는 것이다. 예루살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듣게 되자 통곡하였다. 왜냐하면 율법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 나님께 예배하는 그들이 결코 자신이 죄인임을 께닫는데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라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이 날은 주의 성일이 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 느 8:10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이신 성도 여러분 ! 예배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만나는 인격적인 교제이다. 족장들의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실 장소를 지정하여 주셨기에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세겜,벧엘,브엘세바등) 그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머나 먼 여행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성막을 만 들도록 명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막에서 백성들을 만나셨다. 다윗의 시대에 성전을 짓고자 하였으나 그 아들 솔로몬의 시대에 성전을 완성하여 200 여년간 유일한 예배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제단, 성막, 성전을 거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형태는 변함없 이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의 형식을 유지하였다. 이 제사는 우리를 위하여 희 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며 그림자였다. 바벧론 포로 이후에는 성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바벧론으로 끌려갔다. 다니엘이 기도한 것 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머리를 두고 기도를 하기도 하였으나 예배는 차츰 회당 중심으로 바뀌었다. 바벧론에서 되돌아 온 이 후에 성전을 재건하기는 하였으나 이미 여러해동안 익숙해진 회당예배는 없어지 지 않았다. 이 회당예배는 지금 우리들과 같은 예배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오늘 본문의 예배는 '수문 앞 광장'에서 드려진 예배를 보여 준다. 수문 앞 광장은 성전의 동편문과 성벽의 수문 사이에 있었다. 이 수문 앞 광 장에서 들려 진 예배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었던가 ?
1. 말씀 중심의 예배였다. 이 일이 행하여 진 날은 7 월 1 일이었다. 7 월은 지금 우리의 9-10 월에 해당된다. 7 월 1 일은 나팔절인데 모든 노 동을 중지하고 성회로 모이는 날이었다. 이 날은 신년의 첫째 날로써 번제와 소 제, 속죄제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이같은 희생의 제사대신에 모세의 율법책을 학사 에스라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예배가 희생제사 중심이 아니라 말씀중심의 예배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 다. 기독교가 그 권위를 상실하였을 때에 교회는 점점 웅장한 장식품과 의식 중심 의 예배형태를 가졌다. 성전은 온통 미술품으로 장식하였고 예배의 순서는 점점 더 복잡하여 지고 장엄하였다. 이러한 의식 중심의 예배는 교회를 점점 더 어둡게 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다 못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그 당시 개혁자들의 외침은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Sola Scriptura)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년이 된 지금 우리들의 예배형태는 어떠한가 ? 예배는 어언간에 의식 중심으로 바뀌어지고, 강단에서 말씀이 전파되는 시간 은 불과 20 여분에 불과하다. 수문 앞 광장에서 학사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을 읽 었다. 얼마나 읽었는가 ?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었다. 에스라는 남자나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서 읽었다. 그런데 말씀 을 듣는 백성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던가 ? 1) 모든 백성들은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다. (3) 2)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들은 일어섰다. (5) 3) 모든 백성들이 아멘 아멘 응답하였다. (6) 4)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6) 목회자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성실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까 ?' 를 생각 하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회중들은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본문 속에서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하박국 선지 자가 기록한대로 '그가 내게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 하실런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런지 보리라. ' 하는 자세로 예배에 임하여야 한다.
2. 회개의 예배였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것은 바벧론에서 돌아온지 13 년 만에 처음 있었던 일이다.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였다. 학 사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고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었다.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 (8절) 1) 히브리어 성경을 그들의 언어(아람어)로 알게 해 주는 일이었다. 2) 그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러자 그들 백성들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 (9) 수문 앞 광장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울음소리는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무지, 그리고 조상들의 죄와 그 값으로 받았던 지난 날의 고난을 생각하며 울어 버린 회개의 울음이다. 요시아 왕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다가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였다. 서기관 사반에 의하여 왕의 앞에서 율법책을 알게 되자 왕은 크게 회개하면서 자기의 옷 을 찢었다.(대하 34:19) 사람이 거울을 보면 자기의 얼굴을 살펴 보게 된다. 거울을 통하여 자기의 얼굴 모습을 보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우둔함을 깨닫게 하며(시 119:130) 범죄치 않게 한다.(119:11) 또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한다.(119:133)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았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 순간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사야 는 말하였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 술이 부정한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음이로다. " (사 6:5)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 시 51:17) 여호와 하나님은 통회하는 심령을 멸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주님이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려고 오셨다. ( 마 9:13) 하나 님의 면전에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사람의 의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마치 더러운 의복과 같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사단의 고소 를 받고 천사 앞에 섰던 것 처럼 우리들의 의란 참으로 보잘 것 없다. 오순절 초대교회가 힘이 있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에 못박은 죄인임을 고백하였을 때였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 하고 외쳤으며 "너희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 하는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물로 씻음같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에게 회개가 없는 것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만큼 우리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의 예배를 드리자 !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였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자. 여호와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을 더욱 앞세우며 살아 온 것을 고백하자.
3. 축제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다 듣고 회개하며 울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느헤 미야와 학사 에스라를 통하여 말씀 하셨다. "오늘은 너희 여호와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 "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말씀으로 인하여 회개하는 자리에도 있어 야 하지만 너무 슬퍼하는 것 만으로도 안된다. 회개한 후에는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기쁨의 예배가 있어야 한다. 행 3:19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 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기록하였다. 뉴욕 이스트 할렘가의 목사였던 레티 럿셀 여사는 '복음은 율법을 통한 노예 화 작업이 아니다. 축하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 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99 마 리의 우리 안에 있는 양보다도 잃어 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것을 크게 기뻐하 지 않았던가 ? 집을 나갔던 아들 탕자가 다시 돌아 왔을 때에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잃었던 아들이 다시 돌아 온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고 모일 때 마다 떡 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즉 사도들의 교훈과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구원의 감격과 돌보심의 감사가 어우러진 축제가 되어야 한다. 신랑과 신부가 만나듯이 설레이는 마음이 이 예배 속에 있어야 한 다. 성찬을 통하여 신령한 떡과 잔을 나누면서 하나 된 기쁨이 있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는 축제의 동산이 되어야 한다. 기쁨으로 모여 축제의 예배를 드리고 봉사도 서로 사랑으로 어우러진 기쁨의 봉사가 되며,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은 혜를 기뻐하며 이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한 축제의 전도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 교회 성도 여러분 ! 주일이 기다려 지는가 ? 은혜의 말씀이 듣고 싶어서 나아 왔는가 ? 여러 성도를 위하여 봉사하는 기쁨이 있는가 ?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에 복종하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자 ! 말씀아래 심령이 녹아지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자 ! 그리고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참 기쁨의 예배를 드리자 !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이곳에 모이신 성도 여러분 ! 예배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 만나는 인격적인 교제이다. 족장들의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실 장소를 지정하여 주셨기에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세겜,벧엘,브엘세바등) 그후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향하여 머나 먼 여행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이 성막을 만 들도록 명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성막에서 백성들을 만나셨다. 다윗의 시대에 성전을 짓고자 하였으나 그 아들 솔로몬의 시대에 성전을 완성하여 200 여년간 유일한 예배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렇게 제단, 성막, 성전을 거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형태는 변함없 이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의 형식을 유지하였다. 이 제사는 우리를 위하여 희 생의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모형이며 그림자였다. 바벧론 포로 이후에는 성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바벧론으로 끌려갔다. 다니엘이 기도한 것 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머리를 두고 기도를 하기도 하였으나 예배는 차츰 회당 중심으로 바뀌었다. 바벧론에서 되돌아 온 이 후에 성전을 재건하기는 하였으나 이미 여러해동안 익숙해진 회당예배는 없어지 지 않았다. 이 회당예배는 지금 우리들과 같은 예배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오늘 본문의 예배는 '수문 앞 광장'에서 드려진 예배를 보여 준다. 수문 앞 광장은 성전의 동편문과 성벽의 수문 사이에 있었다. 이 수문 앞 광 장에서 들려 진 예배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었던가 ?
1. 말씀 중심의 예배였다. 이 일이 행하여 진 날은 7 월 1 일이었다. 7 월은 지금 우리의 9-10 월에 해당된다. 7 월 1 일은 나팔절인데 모든 노 동을 중지하고 성회로 모이는 날이었다. 이 날은 신년의 첫째 날로써 번제와 소 제, 속죄제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백성들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이같은 희생의 제사대신에 모세의 율법책을 학사 에스라에게 요청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예배가 희생제사 중심이 아니라 말씀중심의 예배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 다. 기독교가 그 권위를 상실하였을 때에 교회는 점점 웅장한 장식품과 의식 중심 의 예배형태를 가졌다. 성전은 온통 미술품으로 장식하였고 예배의 순서는 점점 더 복잡하여 지고 장엄하였다. 이러한 의식 중심의 예배는 교회를 점점 더 어둡게 하였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보다 못하여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그 당시 개혁자들의 외침은 말씀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Sola Scriptura)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년이 된 지금 우리들의 예배형태는 어떠한가 ? 예배는 어언간에 의식 중심으로 바뀌어지고, 강단에서 말씀이 전파되는 시간 은 불과 20 여분에 불과하다. 수문 앞 광장에서 학사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을 읽 었다. 얼마나 읽었는가 ? "새벽부터 오정까지" 읽었다. 에스라는 남자나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서 읽었다. 그런데 말씀 을 듣는 백성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던가 ? 1) 모든 백성들은 그 율법 책에 귀를 기울였다. (3) 2)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들은 일어섰다. (5) 3) 모든 백성들이 아멘 아멘 응답하였다. (6) 4)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6) 목회자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성실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까 ?' 를 생각 하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회중들은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본문 속에서 설교자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하박국 선지 자가 기록한대로 '그가 내게 대하여 무엇이라 말씀 하실런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런지 보리라. ' 하는 자세로 예배에 임하여야 한다.
2. 회개의 예배였다. 에스라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것은 바벧론에서 돌아온지 13 년 만에 처음 있었던 일이다.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너무나 무지하였다. 학 사 에스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고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었다.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은 무엇인가 ? (8절) 1) 히브리어 성경을 그들의 언어(아람어)로 알게 해 주는 일이었다. 2) 그들의 사고 수준에 맞추어 깨닫게 해 준 것이다. 그러자 그들 백성들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 (9) 수문 앞 광장에서 벌어진 이 엄청난 울음소리는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무지, 그리고 조상들의 죄와 그 값으로 받았던 지난 날의 고난을 생각하며 울어 버린 회개의 울음이다. 요시아 왕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다가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였다. 서기관 사반에 의하여 왕의 앞에서 율법책을 알게 되자 왕은 크게 회개하면서 자기의 옷 을 찢었다.(대하 34:19) 사람이 거울을 보면 자기의 얼굴을 살펴 보게 된다. 거울을 통하여 자기의 얼굴 모습을 보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우둔함을 깨닫게 하며(시 119:130) 범죄치 않게 한다.(119:11) 또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한다.(119:133)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았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 순간 자기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사야 는 말하였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 술이 부정한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음이로다. " (사 6:5) 여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다. ( 시 51:17) 여호와 하나님은 통회하는 심령을 멸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주님이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려고 오셨다. ( 마 9:13) 하나 님의 면전에서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사람의 의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마치 더러운 의복과 같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사단의 고소 를 받고 천사 앞에 섰던 것 처럼 우리들의 의란 참으로 보잘 것 없다. 오순절 초대교회가 힘이 있었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에 못박은 죄인임을 고백하였을 때였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들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 하고 외쳤으며 "너희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 하는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물로 씻음같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힘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에게 회개가 없는 것은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만큼 우리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회개의 예배를 드리자 !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였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자. 여호와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생각을 더욱 앞세우며 살아 온 것을 고백하자.
3. 축제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다 듣고 회개하며 울고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느헤 미야와 학사 에스라를 통하여 말씀 하셨다. "오늘은 너희 여호와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 "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말씀으로 인하여 회개하는 자리에도 있어 야 하지만 너무 슬퍼하는 것 만으로도 안된다. 회개한 후에는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기쁨의 예배가 있어야 한다. 행 3:19에는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 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라고 기록하였다. 뉴욕 이스트 할렘가의 목사였던 레티 럿셀 여사는 '복음은 율법을 통한 노예 화 작업이 아니다. 축하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 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99 마 리의 우리 안에 있는 양보다도 잃어 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은 것을 크게 기뻐하 지 않았던가 ? 집을 나갔던 아들 탕자가 다시 돌아 왔을 때에 아버지는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잃었던 아들이 다시 돌아 온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고 모일 때 마다 떡 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며 여호와 하나님을 찬미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즉 사도들의 교훈과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구원의 감격과 돌보심의 감사가 어우러진 축제가 되어야 한다. 신랑과 신부가 만나듯이 설레이는 마음이 이 예배 속에 있어야 한 다. 성찬을 통하여 신령한 떡과 잔을 나누면서 하나 된 기쁨이 있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는 축제의 동산이 되어야 한다. 기쁨으로 모여 축제의 예배를 드리고 봉사도 서로 사랑으로 어우러진 기쁨의 봉사가 되며,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과 은 혜를 기뻐하며 이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기 위한 축제의 전도가 되어야 한다.
여러분 ! 교회 성도 여러분 ! 주일이 기다려 지는가 ? 은혜의 말씀이 듣고 싶어서 나아 왔는가 ? 여러 성도를 위하여 봉사하는 기쁨이 있는가 ? 말씀을 사모하며 그 말씀에 복종하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자 ! 말씀아래 심령이 녹아지며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자 ! 그리고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참 기쁨의 예배를 드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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