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현대의 본질과 성령문제
본문
과도기의 성격을 뛰고있는 현대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읍니다. 성경에보면 어떤 윤리적인 실천이나 어떤 문제 해결에 대한 원리를 말씀할때에는 먼저 반드시 신앙적이고 영적이고 교리적인 말슴을 가르치고 있읍니다. 즉 부부문제 친자문제 노사문제 등에 있어서 해결의 길은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하는것입니다. 개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세상의 원리대로는 문제해결을 할수가 없읍니다. 세상은 분열과 하나되지 못하고 이기적이며 자아중심적이기 때문에 피차 서로 복종하며 섬길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을때에만 문제해결을 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성령에 의한 해결을 떠나서는 문제의 해결은 없읍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전반부에 성령의 교리에대한 원리를 먼저 가르치고 후반부에 가서 그 성령에 의하여 실천할수있는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계의 생각은 기독교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만을 성경에서 뽑아가지고 이걸 전하고 가르처서 적용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오해되고 왜곡되고 있는걸 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핵 전쟁을 배제할수 있으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잇다고 믿ㅇ,며 이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역설하고 기독교의 영적인 교리와 신앙의 교리를 무시하거나 부정해 버리고 있읍니다. 그래서 가령 전쟁을 어떻게 피하고 군축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해서 역설하는 정치 설교,사회문제의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은 이걸 잘 한다고 하면서 기뻐하며 모여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기독교의 멧세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신앙적 영적인 교리의 입장에서볼때 이건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행했던 일과는 대립이 되고 또 실천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말은 믿음이 바로서고성령의 지배를 받는 진리의 교리위에 서지못하고는 그 교훈과 윤리의 실천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들어 산낭 보훈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것은 성령에 의하여 살아가는 제자들과 신자에게 하신 것이지 성령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던지 오른 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말씀은 성령을받은 신자 성도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정치나 사회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읍니다. 기독교의 윤리는 믿으며 동의를하고 있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 또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인격 이런것은 우리 죄의 대속하고 깊은 관계가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 몽의 부활 성령의 인격 등의 교리들은 전혀 믿질 않읍니다. 단지 윤리와 교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윤리만을 취하고 신앙적인 교리를 버리면 이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에베소에도 처음 3장은 온전히 신앙과 영적인 교리만을 가르치고 있고 이 교리의 토대가 다져진 후에 윤리에 대한 실천 문제가 다루워 지고 있읍니다. 이건 물 말할까요? 교리를 떠난 윤리는 있을수 없다는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에베소서를 국가를 위하거나 세상사람들을 위하여 써서 보내질 않았읍니다. 로마 황제나 로마 정부에게 써 보낸것도 아니라 그리스도인 들에게 써 보낸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써서 보낸것입니다.
또 예수의 산상 설교를 (마5:-7:) 사회 헌장과 같이 생각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군비를 확장하는 대신에 왼 뺨을 돌려대고 훌륭한 도덕적 모범을 보인다면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장담들을 합니다. 그러나 산상설교를 읽어보면 주님 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생활을 어떤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했는고 하면 주님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사람뿐입니다. “ 마음이 가난한지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다,마음이 께끗한 자는 복이있다”고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이런 복된자가 아니면 그런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상대가 성령을 소유한 자가 아니면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할수 없다고 하는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고는 여호와 하나님ㅇ나라의 생활을 할수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아니면 한나님나라의 생활을 할수 없다는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생활의 말을 하는것은 무익하며 잘 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현대 문제의 본질적인 잘못이 무엇이냐 ?
1. 인간의 죄와 타락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일이다. 타고난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교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너무 겉모양만 보고 내적이요 영적인 것을무시하는데서 오는 낙관주의(잘 될것으로 보는것)가 원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지못한 사람의 판단입니다. 에베소서2:에보면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여기에 보면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요,악령에 사로잡혀 사단을 쫓는자며,여호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자식가운데있는자로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것을 마음대로 자행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이게 성경의 인간관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자기 이익만차리는것) 자기 중심적인 피조물이라는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읍니다. 창세기 3:의 인간의 타락 기사를보면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단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마귀에게 굴복을 했읍니다. 그후 인간의 생활은 원한과 분쟁의 생애가 됏고그것은 아담과하와 가인과 아벨에게서 찾아 볼수 잇읍니다. 야고보는 (약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라고 햇읍니다. 어떤 침략적인 나라가 자기 나라보다 약한 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걸고 침략을 하는것을 왜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나라속에 전쟁의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런 사실을 오늘날에 와서는 다 잊어버리고 있읍닌다. 우리는 왜 밤이면 문을 닫아 잠금니까? 왜 경찰을 세우고 세금을 지출합니까? 인간에게는 약탈하는 성질이 잇으며 자기 중심적인 본질이 있으며 부정과 불법의 성질이 있느고로 우리들은 자신을 지킬 필요를 느끼기 때문 입니다. 이 세상에 지혜도 가르치기를 인간은 모두 거짖말 장이며 인간 자신이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비관적인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증언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폭팔을한 원인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사물을 확실히 알지못한것)못한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런잘못에 빠지게 한것은 복음의 이해가 부족한것때문에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것은 인간은 극히 사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자요 노리고 있는것이 잇다면 어떤것도 그것을 제어할수 없느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빛의 사자같이 보일때도있고 때로는 정의 의 투사요 평화의 사도같이 보일지 모르나 그의 성질과 그의 마음바탕에는 어떠한 악이 깔려있는지 미처 알지를못하고깨닫지 못할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거짖말 장이요 자기의 목적과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악한 일도 서슴치 않는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율법과 이를 실행할 능력이 필요합ㅈ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인간은 악의 소굴이라는것입니다. 이런 악을 타고난 사람이 기독교의 도덕의 원리를 실천할수 잇다고 믿는일이 오늘날 "?질적 문제라는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싱앙과 성령에 의한 삶을 정립을 하지 못한체 기독교의 윤리를 들먹거리며 별의별 운동을 다 해봣자 아무런 해결을 볼수가 없는것입니다.
2. 성령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너희는 파차 복종하라 남편과 아내, 붐노와 자녀, 주인과 종은 바른 방법과 바런 정신으로 피차 섬기라. 하기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한 후에 복종하고 섬길것을 요구하고 잇읍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이 과정을 밞지 않고는 그런 행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인이라고 2자처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믿지 않읍니다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를 부정 합니다.
기독교 정신과 사상 형제애와 박애정신 같은것에 대해서는 열심히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르며 성령의 지배를 믿지 않으며 받지도 않읍니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제 삼위격인 성령의 교리를 신봉하지 않읍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성령을 떠나서는 사람은 일개 동물이요 전혀 희망이란 없는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무엇을 합니까?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을 알게해 줍니다.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세상은 죄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께닫게 할 필요가 있읍니다. 성령은 그 일을 하시기 위하여 보냄을 받앗읍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2000년에 걸처서 전파되어 왔지만 세상은 아직 죄를 믿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ㅡ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 믿지 않으며 심판도믿지 않읍니다. 그러면 무얼 믿읍니까? 세상은 세상자채를믿으며 사람을 믿으며 인간의 힘과 인간의 선을 믿읍니다. 이건 기독교와는 정 반대 입니다. 성령은 그 이외에는 무엇을 합니까? 축복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죄를 자각시키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우리에게 보이신 후 성령은 우리속에 새 생명 거듭난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은 또 우리의 거룩한 생활 성화를 증진 시키기위하여 보냄을 받앗읍니다. 서로 평화 할수 있고 평화를 만들어 갈수 있는 사람은 성령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 뿐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사람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충만함을 받을때 문제속에 있는 악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억제하고 주의은헤와 진리가운데서 성장하며 친밀과 일치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일은 성령의 지배하에 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잇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성령은 우리들의 성화의 생활을 촉진시키고 우리들을 지배하시며 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시키고자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하기위하여 보냄을 받은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영적 부흥과 신앙적 각성을 주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도덕윤리의 원리가 그 나라와 사회생활에 최대의 영향을 초래한 시대는 항상 신앙의 각성과 부흥이 일어난 후의 시대 였읍니다. 그 원인은 성령의 지배와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수많이 생겨나서 사회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복음적 멧세지를 설파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도들이 많이 생겨나면 그 사회는 큰 영향을받고 문제 해결의 길을 찿게 됩니다. 성령은 수많은 사람을 함께 회개시키는 부흥의 힘을 주시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읍니다. 이리하여 사회 상태가 변화되며 사람들이 새로운 사고를 하게되고 생활 전체에 성경의 원리를 적용해 보려고 하게됩니다. 정치설교나 사회문제를 설교하는 설교자가 많아지면 교인들이 줄어들고 따라서 사회생활은 악롸 일로에 떨어지게 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문제해결의 참된길은 오직 한길 뿐입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을 받는일이요,사람들에게 선한 생활을 하라고 호소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군축 전쟁반대, 주일성수 아무리 호소를해도 효과가 없읍니다. 우리가 아무리 결심을해도 소용이 없읍니다. 왜요? 인간은 그것을 행할 느력이 없기 땜눈입니다. 그걸 가능하게 할려면 새로운 성격이 필요하며 변화받을 필요가 있읍니다. 오직 성령만이 할수가 있읍니다. 오늘날의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타락을 부정하며 성령의 교리를 불신하고 인간이 윤리와 도덕만을 가지고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데에 있읍니다. 성령의 지배와 충만함을 받아 힘을 얻고 부흥과 각성을 일으키며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지 못하면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의 지배하에서 그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계의 생각은 기독교의 윤리와 도덕에 대한 그리스도의 교훈만을 성경에서 뽑아가지고 이걸 전하고 가르처서 적용을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오해되고 왜곡되고 있는걸 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핵 전쟁을 배제할수 있으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잇다고 믿ㅇ,며 이게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역설하고 기독교의 영적인 교리와 신앙의 교리를 무시하거나 부정해 버리고 있읍니다. 그래서 가령 전쟁을 어떻게 피하고 군축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해서 역설하는 정치 설교,사회문제의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은 이걸 잘 한다고 하면서 기뻐하며 모여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기독교의 멧세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 신앙적 영적인 교리의 입장에서볼때 이건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행했던 일과는 대립이 되고 또 실천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이말은 믿음이 바로서고성령의 지배를 받는 진리의 교리위에 서지못하고는 그 교훈과 윤리의 실천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들어 산낭 보훈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것은 성령에 의하여 살아가는 제자들과 신자에게 하신 것이지 성령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던지 오른 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말씀은 성령을받은 신자 성도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현대 교회는 정치나 사회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읍니다. 기독교의 윤리는 믿으며 동의를하고 있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 또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인격 이런것은 우리 죄의 대속하고 깊은 관계가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 몽의 부활 성령의 인격 등의 교리들은 전혀 믿질 않읍니다. 단지 윤리와 교훈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렇게 기독교의 윤리만을 취하고 신앙적인 교리를 버리면 이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에베소에도 처음 3장은 온전히 신앙과 영적인 교리만을 가르치고 있고 이 교리의 토대가 다져진 후에 윤리에 대한 실천 문제가 다루워 지고 있읍니다. 이건 물 말할까요? 교리를 떠난 윤리는 있을수 없다는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에베소서를 국가를 위하거나 세상사람들을 위하여 써서 보내질 않았읍니다. 로마 황제나 로마 정부에게 써 보낸것도 아니라 그리스도인 들에게 써 보낸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확신을 가지고 써서 보낸것입니다.
또 예수의 산상 설교를 (마5:-7:) 사회 헌장과 같이 생각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좋은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군비를 확장하는 대신에 왼 뺨을 돌려대고 훌륭한 도덕적 모범을 보인다면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장담들을 합니다. 그러나 산상설교를 읽어보면 주님 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같은 생활을 어떤 사람에게만 가능하다고 했는고 하면 주님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사람뿐입니다. “ 마음이 가난한지는 복이 있다, 애통하는자는 복이 있다,마음이 께끗한 자는 복이있다”고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이런 복된자가 아니면 그런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은 상대가 성령을 소유한 자가 아니면 이런 종류의 행동을 할수 없다고 하는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고는 여호와 하나님ㅇ나라의 생활을 할수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 아니면 한나님나라의 생활을 할수 없다는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생활의 말을 하는것은 무익하며 잘 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현대 문제의 본질적인 잘못이 무엇이냐 ?
1. 인간의 죄와 타락에 대한 교리를 부정하는 일이다. 타고난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교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너무 겉모양만 보고 내적이요 영적인 것을무시하는데서 오는 낙관주의(잘 될것으로 보는것)가 원인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지못한 사람의 판단입니다. 에베소서2:에보면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엡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4) 긍휼에 풍성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여기에 보면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요,악령에 사로잡혀 사단을 쫓는자며,여호와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자식가운데있는자로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것을 마음대로 자행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이게 성경의 인간관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이기적(자기 이익만차리는것) 자기 중심적인 피조물이라는것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읍니다. 창세기 3:의 인간의 타락 기사를보면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단의 말에 귀를 귀울이고 마귀에게 굴복을 했읍니다. 그후 인간의 생활은 원한과 분쟁의 생애가 됏고그것은 아담과하와 가인과 아벨에게서 찾아 볼수 잇읍니다. 야고보는 (약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라고 햇읍니다. 어떤 침략적인 나라가 자기 나라보다 약한 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걸고 침략을 하는것을 왜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나라속에 전쟁의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개인이나 국가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런 사실을 오늘날에 와서는 다 잊어버리고 있읍닌다. 우리는 왜 밤이면 문을 닫아 잠금니까? 왜 경찰을 세우고 세금을 지출합니까? 인간에게는 약탈하는 성질이 잇으며 자기 중심적인 본질이 있으며 부정과 불법의 성질이 있느고로 우리들은 자신을 지킬 필요를 느끼기 때문 입니다. 이 세상에 지혜도 가르치기를 인간은 모두 거짖말 장이며 인간 자신이 모두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게 비관적인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류역사의 증언입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폭팔을한 원인도 이 사실을 인식하지(사물을 확실히 알지못한것)못한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이런잘못에 빠지게 한것은 복음의 이해가 부족한것때문에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것은 인간은 극히 사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자요 노리고 있는것이 잇다면 어떤것도 그것을 제어할수 없느자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빛의 사자같이 보일때도있고 때로는 정의 의 투사요 평화의 사도같이 보일지 모르나 그의 성질과 그의 마음바탕에는 어떠한 악이 깔려있는지 미처 알지를못하고깨닫지 못할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거짖말 장이요 자기의 목적과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악한 일도 서슴치 않는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율법과 이를 실행할 능력이 필요합ㅈ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이는 인간은 악의 소굴이라는것입니다. 이런 악을 타고난 사람이 기독교의 도덕의 원리를 실천할수 잇다고 믿는일이 오늘날 "?질적 문제라는것입니다. 이런 인간이 싱앙과 성령에 의한 삶을 정립을 하지 못한체 기독교의 윤리를 들먹거리며 별의별 운동을 다 해봣자 아무런 해결을 볼수가 없는것입니다.
2. 성령에 관한 성경적 교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엡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너희는 파차 복종하라 남편과 아내, 붐노와 자녀, 주인과 종은 바른 방법과 바런 정신으로 피차 섬기라. 하기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한 후에 복종하고 섬길것을 요구하고 잇읍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이 과정을 밞지 않고는 그런 행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대인이라고 2자처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믿지 않읍니다 성령의 인격에 대한 교리를 부정 합니다.
기독교 정신과 사상 형제애와 박애정신 같은것에 대해서는 열심히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르며 성령의 지배를 믿지 않으며 받지도 않읍니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의 제 삼위격인 성령의 교리를 신봉하지 않읍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성령을 떠나서는 사람은 일개 동물이요 전혀 희망이란 없는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무엇을 합니까?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을 알게해 줍니다.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세상은 죄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를 께닫게 할 필요가 있읍니다. 성령은 그 일을 하시기 위하여 보냄을 받앗읍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2000년에 걸처서 전파되어 왔지만 세상은 아직 죄를 믿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ㅡ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 믿지 않으며 심판도믿지 않읍니다. 그러면 무얼 믿읍니까? 세상은 세상자채를믿으며 사람을 믿으며 인간의 힘과 인간의 선을 믿읍니다. 이건 기독교와는 정 반대 입니다. 성령은 그 이외에는 무엇을 합니까? 축복에 충만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각나게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죄를 자각시키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우리에게 보이신 후 성령은 우리속에 새 생명 거듭난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은 또 우리의 거룩한 생활 성화를 증진 시키기위하여 보냄을 받앗읍니다. 서로 평화 할수 있고 평화를 만들어 갈수 있는 사람은 성령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 뿐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사람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충만함을 받을때 문제속에 있는 악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억제하고 주의은헤와 진리가운데서 성장하며 친밀과 일치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일은 성령의 지배하에 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잇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성령은 우리들의 성화의 생활을 촉진시키고 우리들을 지배하시며 또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시키고자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하기위하여 보냄을 받은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영적 부흥과 신앙적 각성을 주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읍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도덕윤리의 원리가 그 나라와 사회생활에 최대의 영향을 초래한 시대는 항상 신앙의 각성과 부흥이 일어난 후의 시대 였읍니다. 그 원인은 성령의 지배와 충만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수많이 생겨나서 사회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가 복음적 멧세지를 설파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도들이 많이 생겨나면 그 사회는 큰 영향을받고 문제 해결의 길을 찿게 됩니다. 성령은 수많은 사람을 함께 회개시키는 부흥의 힘을 주시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읍니다. 이리하여 사회 상태가 변화되며 사람들이 새로운 사고를 하게되고 생활 전체에 성경의 원리를 적용해 보려고 하게됩니다. 정치설교나 사회문제를 설교하는 설교자가 많아지면 교인들이 줄어들고 따라서 사회생활은 악롸 일로에 떨어지게 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문제해결의 참된길은 오직 한길 뿐입니다. 이는 성령의 충만을 받는일이요,사람들에게 선한 생활을 하라고 호소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군축 전쟁반대, 주일성수 아무리 호소를해도 효과가 없읍니다. 우리가 아무리 결심을해도 소용이 없읍니다. 왜요? 인간은 그것을 행할 느력이 없기 땜눈입니다. 그걸 가능하게 할려면 새로운 성격이 필요하며 변화받을 필요가 있읍니다. 오직 성령만이 할수가 있읍니다. 오늘날의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타락을 부정하며 성령의 교리를 불신하고 인간이 윤리와 도덕만을 가지고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데에 있읍니다. 성령의 지배와 충만함을 받아 힘을 얻고 부흥과 각성을 일으키며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지 못하면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의 지배하에서 그의 힘을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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