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하나님의 신
본문
본문은 사울을 피하는 다윗과 그를 쫒는 사울과의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을 교훈하는 내용입니다. 앞의 두 단락(1-7, 8-17)은 사람을 통해 사울의 손으로부터 다윗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준 부분입니다. 그에 이은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직접 역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와 같은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다윗이 복병들의 암살 기도를 간신히 벗어나(11-17)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도피합니다(18절).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하는 확고한 마음을 알고 라마로 도피하여 사무엘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 쪽으로 피한 것을 뜻합니다. 언제나 가장 좋은 해결책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기 지혜와 자기의 힘으로 해결을 하려고 덤비지 말고 가장 좋은 해결책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사람들에게는 져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무엘에게 간 이유는 ① 앞으로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해 준 사람이 사무엘이고 ② 지금 그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보호해 줄 사람은 사무엘밖에 없디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울의 살해음모로부터 신변 안전을 도모하며 앞으로 처신에 관한 선지자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사무엘에게 갔던 것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도피처로 쉽게 택한 것은 그전에도 지속적으로 사무엘과 다윗간에 교제가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사무엘이 나욧으로...... “나욧”은 지역의 명칭이 아니라 “거처” “처소”를 의미합니다. 추측컨대 “나욧”은 사무엘이 그의 제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세운 “선지학교”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 모인 그의 제자들은 “선지자 무리”(20절)라고 불리웠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모여야 할까요? 어디로 도피해야 할까요?
2.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사무엘에게 피한 것을 알게 된 사울은 세 차레에 걸쳐 자객을 보내어 다윗을 살해하려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실패하고 맙니다(19-21). 다윗을 잡으려 보낸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다윗을 잡으려는 목적은 공중에 떠버리고 예언만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보호벽이 권력이나 무기의 힘보다 강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기 위한 초자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이 선지자 무리들이 생긴 이유입니다. 사무엘의 시기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의 발전에 있어서 전환점을 이루는 때였습니다. 사무엘의 소명 직후에 제사장들의 타락으로 더럽혀진 성소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언약의 궤는 빼앗겼고, 그 결과 이스라엘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에게 종교적 생활을 영위할 새로운 집을 건설하라는 임무가 떠맡겨졌습니다. 그는 이를 위하여 그의 말에 눈을 뜬 사람들을 모아서 그의 지도하에 이들의 믿음을 굳게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닌믜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이끌어 나갔습니다. 사무엘의 시기에 전지자 학교를 세웠던 것이 성직자와 성소의 타락에 의한 것이었듯이, 엘리야와 엘리사 시기에도 여호와 신앙의 퇴조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모임을 만들므로써 우상에 무릎을 꿇지 않전 여호와 숭배자에게 신앙의 장소와 수단을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선지자를 일으킴으로써 전지 전능한 힘으로 우상 숭배에 대항하게끔 하였습니다. “수령으로 선 것을” “지배하다”의 뜻으로 사무엘이 선지자의 무리를 지도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
3. 사울왕의 첫 좌절이 있었습니다. 실패한 사울은 자신이 직접 다윗을 살해하기 위해 라마에 이르지만 그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2-24) 사울왕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사울왕은 사무엘 앞에서 종일 예언만 하다가 물러났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왕으로서 직접 당한 최초의 좌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완악한 자는 사람이 손써볼 수 없이 신속하고 철저한 몰락을 당한다는 예고이며 경고입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환난 날에 유일한 구원자로 인식한 다윗의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가 당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머물고 있는 라마로 피신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서 피신퍼를 찾고자 한 것입니다. 성도의 피할 곳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임을 항상 기억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게 됩니다.
1. 성도는 사단의 통치 아래 놓여 있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기 위해 찾아 다니는 사단의 공격을 피하여 숨을 곳이 없으며,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따라서 성도들의 우일한 피난처는 여호와 하나님 품밖에 없는 것입니다(시 46:1)“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避難處)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 아멘.
3.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처럼 자기에게 피한 자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시 91:9-10)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 아멘. 한편 사울은 다윗을 해하기 위해 라마까지 쫒아갔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의 옷을 벗은 채 사무엘 앞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24절). 여기서 그가 옷을 벗었다는 것은 그의 왕위가 폐위될 것을 상징합니다. 즉 그는 비록 무의식 가운데라고는 하지만 옷을 벗음으로써 자신의 때가 다 되었음을 증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결국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수치를 드러내는 가운데 비참한 종국을 맞이할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잠 13:5 ; 14:19 ; 눅 16:22-24) 사울이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어 있었다는 표현은 사울에게만 있었던 특별한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피해 도망갈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행동은 황홀경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의 사로잡는 힘은 사자들에게 보다 사울의 경우에 더욱 강력했는데, 그 이유는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보다 완악하게 저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보다 더 강하다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사울에게 임한 압도하는 영향력은 분명히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대적하여 다툴 수 없음과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굴복하고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지속적으로 사로 잡히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패하는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을 잡으려는 사울의 직접적인 행동도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끝까지 지켜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뜻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던 사울이 전지자 무리와 더불어 예언에 동참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척 낯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평상시의 속담으로 이러한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말이 한낟 속담이 될 줄로 믿습니다.
1. 다윗이 복병들의 암살 기도를 간신히 벗어나(11-17) 사무엘이 있는 라마로 도피합니다(18절).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하는 확고한 마음을 알고 라마로 도피하여 사무엘에게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 쪽으로 피한 것을 뜻합니다. 언제나 가장 좋은 해결책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기 지혜와 자기의 힘으로 해결을 하려고 덤비지 말고 가장 좋은 해결책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사람들에게는 져주는 생활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무엘에게 간 이유는 ① 앞으로 왕위에 오를 것을 예언해 준 사람이 사무엘이고 ② 지금 그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보호해 줄 사람은 사무엘밖에 없디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울의 살해음모로부터 신변 안전을 도모하며 앞으로 처신에 관한 선지자의 자문을 구하기 위해 사무엘에게 갔던 것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를 도피처로 쉽게 택한 것은 그전에도 지속적으로 사무엘과 다윗간에 교제가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여기 다윗이 사무엘이 나욧으로...... “나욧”은 지역의 명칭이 아니라 “거처” “처소”를 의미합니다. 추측컨대 “나욧”은 사무엘이 그의 제자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세운 “선지학교”였던 것 같습니다. 이곳에 모인 그의 제자들은 “선지자 무리”(20절)라고 불리웠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모여야 할까요? 어디로 도피해야 할까요?
2.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임했습니다. 사무엘에게 피한 것을 알게 된 사울은 세 차레에 걸쳐 자객을 보내어 다윗을 살해하려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실패하고 맙니다(19-21). 다윗을 잡으려 보낸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다윗을 잡으려는 목적은 공중에 떠버리고 예언만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적인 보호벽이 권력이나 무기의 힘보다 강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기 위한 초자연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점은 이 선지자 무리들이 생긴 이유입니다. 사무엘의 시기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의 발전에 있어서 전환점을 이루는 때였습니다. 사무엘의 소명 직후에 제사장들의 타락으로 더럽혀진 성소에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언약의 궤는 빼앗겼고, 그 결과 이스라엘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이상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에게 종교적 생활을 영위할 새로운 집을 건설하라는 임무가 떠맡겨졌습니다. 그는 이를 위하여 그의 말에 눈을 뜬 사람들을 모아서 그의 지도하에 이들의 믿음을 굳게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닌믜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이끌어 나갔습니다. 사무엘의 시기에 전지자 학교를 세웠던 것이 성직자와 성소의 타락에 의한 것이었듯이, 엘리야와 엘리사 시기에도 여호와 신앙의 퇴조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모임을 만들므로써 우상에 무릎을 꿇지 않전 여호와 숭배자에게 신앙의 장소와 수단을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가 성행하고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선지자를 일으킴으로써 전지 전능한 힘으로 우상 숭배에 대항하게끔 하였습니다. “수령으로 선 것을” “지배하다”의 뜻으로 사무엘이 선지자의 무리를 지도하고 있었음을 말합니다. )
3. 사울왕의 첫 좌절이 있었습니다. 실패한 사울은 자신이 직접 다윗을 살해하기 위해 라마에 이르지만 그 역시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22-24) 사울왕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사울왕은 사무엘 앞에서 종일 예언만 하다가 물러났습니다. 이것은 사울이 왕으로서 직접 당한 최초의 좌절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완악한 자는 사람이 손써볼 수 없이 신속하고 철저한 몰락을 당한다는 예고이며 경고입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환난 날에 유일한 구원자로 인식한 다윗의 신앙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그가 당시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사무엘이 머물고 있는 라마로 피신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에서 피신퍼를 찾고자 한 것입니다. 성도의 피할 곳은 여호와 하나님의 품임을 항상 기억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교훈받게 됩니다.
1. 성도는 사단의 통치 아래 놓여 있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울부짖는 사자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해하기 위해 찾아 다니는 사단의 공격을 피하여 숨을 곳이 없으며,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따라서 성도들의 우일한 피난처는 여호와 하나님 품밖에 없는 것입니다(시 46:1)“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避難處)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 아멘.
3.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처럼 자기에게 피한 자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시 91:9-10)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 아멘. 한편 사울은 다윗을 해하기 위해 라마까지 쫒아갔지만 결국 실패하고 그의 옷을 벗은 채 사무엘 앞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24절). 여기서 그가 옷을 벗었다는 것은 그의 왕위가 폐위될 것을 상징합니다. 즉 그는 비록 무의식 가운데라고는 하지만 옷을 벗음으로써 자신의 때가 다 되었음을 증표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이 결국에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수치를 드러내는 가운데 비참한 종국을 맞이할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잠 13:5 ; 14:19 ; 눅 16:22-24) 사울이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어 있었다는 표현은 사울에게만 있었던 특별한 행동을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피해 도망갈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행동은 황홀경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의 사로잡는 힘은 사자들에게 보다 사울의 경우에 더욱 강력했는데, 그 이유는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보다 완악하게 저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보다 더 강하다는 것과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사울에게 임한 압도하는 영향력은 분명히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대적하여 다툴 수 없음과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굴복하고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지속적으로 사로 잡히지 못함으로써 결국 실패하는 삶을 살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을 잡으려는 사울의 직접적인 행동도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을 끝까지 지켜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는 뜻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던 사울이 전지자 무리와 더불어 예언에 동참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척 낯설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평상시의 속담으로 이러한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들의 말이 한낟 속담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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