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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깨어 있으라

본문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우리 주님의 평화(schalom)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번째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1999년의 대림절 마지막 설교입니다. 오늘의 설교본문은 마가복음 13장 33절-37절의 말씀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봉독합니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런지 혹 저물 때엘런지, 밤중엘런지, 닭 울 때엘런지, 새벽엘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 아멘. 오늘 우리의 본문은 ”깨어 있으라”라는 말을 네번(33,34,35,37)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주님을 기다리는 계절, 대림절의 마지막 설교제목을 ’깨어있으라’로 정했습니다.
”깨어 있으라”의 사전적 의미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으라”는 의미입니다만, 이 말의 원래 의미는 파수꾼이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지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영적 각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설명을 하면, ”경건한 사람의 생활은 졸거나 비몽사몽간에 있거나 도취하지 않고 마음이 언제나 깨어 있고 각성된 긴장 속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이 대림절 마지막 주일의 본문으로 택해진 것은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은 여러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우리의 본문(막 13:33-37)에서는 주인과 집을 관리하는 종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집을 관리하는 모든 책임을 부여하면서 ”깨어 있으라”고 당부한 것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우리 모두는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집주인이 밤중에 오실런지, 새벽에 오실런지 어느때에 오실런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홀연히 와서 자는 모습을 보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유사한 비유를 누가복음(2:35-40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주인과 종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상황은 주인이 어떤 만찬연회에서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종들의 상황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다”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 왔을 때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어주어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참으로 복이 있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너희들도(제자들, 우리 모두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라고 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4장 37절-42절에는 ’노아의 때’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런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대로 노아는 홍수를 대비하여 깨어서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못한 자들은 세상의 향락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장가 들고 시집 가는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에 도취되어 살면서 방주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날이 왔습니다. 홍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깨어서 방주를 준비한 노아는 구원함을 받았지만 그와 반대로 세상의 향락에 취해 깨어 있지 못하고 방주를 준비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홍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홍수의 때’와 비슷한 내용을 가진 것을 ’롯의 때’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28-32절의 말씀,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로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롯의 처가 어떠했습니까 롯의 처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피해 나오던 길에 집에 두고 온 것에 너무 집착을 해서 그것이 아깝게 생각되어 뒤로 돌아본 것이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롯은 죄악이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깨어서 준비를 했고 여호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유황불의 심판을 피해 구원함을 받게 되었지만, 그의 처는 지난날에 소유했던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결국 뒤를 돌아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되는 참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의 것에 집착하거나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 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노아도 롯도 그 날을 대비하여 깨어 준비함으로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지금 우리가 주님이 오시는 날을 대망하는 ’대림절’의 절기를 살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이 대림절은 성탄절 전 4주간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림절을 지켜야 할 기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을 하셨는데, 그 때 내가 다시 올 터이니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부터 시작해서 주님의 재림시까지 ’대림절’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신학에서는 ’중간시기’ 혹은 ’중간시대’ (Zwischen den Zeiten)라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중간시대’를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며 그 날을 대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종말론적 여호와 하나님 백성 공동체’라고 합니다. 즉 이 땅의 교회가 바로 ’종말론적 여호와 하나님 백성 공동체’이다. 시대를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종말론적 여호와 하나님백성 공동체로서 교회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파수꾼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양심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이 시대를 깨우는 새벽의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독일을 여행하고 오신 분들은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독일을 다녀 오신 분이 있습니까 혹시 독일 교회의 높이 솟은 종탑을 유심히 보셨습니까 그 종탑 위에 노란 빛을 발하고 있는 ’수탉’ 모양의 조각을 보셨습니까 그 종탑 위의 수탉의 의미를 아시는지요. 이것은 마태복음 26:38-46절의 말씀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고 감람산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아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다시 ”내가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장담을 했습니다. (마 26:30-35)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동산에 가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시고, 특히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지를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번째 나아가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깨어 있지 못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깨어 있지를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한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가 왜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까 우리가 잘 나가다가 어찌하여 실족하게 됩니까 그것은 깨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실수와 잘못은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그 때는 ’평상시’가 아니었습니다. ’비상시’였습니다. ’비상시’는 평상시와는 달리 깨어 있어야 했는데, 베드로는 그 때를 인식하지 못하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독일교회의 종탑 위에 ’수탉’은 ’깨어 있으라’는 경고의 상징입니다. 새벽을 깨우라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어두움의 역사를 깨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선교사들은 이 시대를 깨우는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이 어둠의 역사의 새벽을 깨우는 수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이 시대의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습니다. 파수꾼은 밤에 어두움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또한 예언자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자들입니다.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파수꾼으로서 예언자로서 이 시대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역사는 너무나 어둡습니다. 우리들은 어두움에서 사는 어두움의 자식들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권면하기를 ”여러분들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마시는 사람들도 밤에 마시고 취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낮에 속한 사람이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람으로 가슴에 무장을 하고 구원의 희망으로 투구를 씁시다”(살전 5:5-8)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어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더 이상 어두움과 밤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빛과 낮에 속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우리들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 1:8-9) 결정적으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우리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선교사 여러분, 우리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 거룩한 계절, 대림절에 빈 마음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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