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
본문
오늘 대림절 넷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절이란 이때에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로서 세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첫 번째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초림을 기다리는 것이었었고, 둘째는 말씀과 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심령 속에와 그 삶 가운데 오시는 것이며, 셋째는 세상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재림의 의미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기간이 세례를 받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마련되어서 사순절과 같이 참회하며 금식하면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물을 팔기 위해 11월부터 성탄장식을 하고 크리스마스 캐롤과 음악을 계속 불러대므로 대강절의 참 뜻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처음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세상은 너무도 힘든 세상이었고, 영적으로도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이사야 7장에는 남 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 때 (735~720 B. C)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왕이 서로 동맹을 맺고, 남 왕국 유다를 침략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서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불안한 가운데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들 아하스 왕에게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유다를 향하신 뜻을 알게 하십니다. 그네용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멸하려 한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기에 다윗 집에 결단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사7:7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7:10~11에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 든지 높은데서 든지 구하라”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구원하실 분명한 계획을 가지셨기 때문에, 믿지 못할까봐서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보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위하여 징조를 구하는 것은 불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라는 명령을 “무엇으로 증명하시겠습니까” 물었을 때 네 손의 지팡이를 던져 보아라, 또 네 손을 겨드랑이에 넣어 보아라“하시면서 징조를 보이셨습니다. 사사시대에 기드온도 부르셔서 미디안으로부터 나라를 구원하게 하실 때에 군사 300명으로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을 물리치게 하셨는데 기드온도 세 번씩이나 징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 번 다 응하셨습니다.
그러나 12절에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 얼핏보면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 같고,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하스 왕이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다”고 한 것은 그의 믿음 없는 상태를 드러낸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 일은 힘써서 간구하는 일 즉 기도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기 때문에 굳이 기도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듣기 좋게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다’는 말로 거부한 것입니다.
흔히 기도할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하라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기에 바쁘실 터인데 나까지 기도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릴 것 있겠는가 이런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요.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의 말일까요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기도할지라도 다 들으시며 또한 모든 문제를 기도하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십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여호와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아람왕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이 협공하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구원의 징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도우시려고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대신 병사를 모으고, 전쟁양식을 비축하는 일을 하는 것은 백성을 괴롭히는 일일 뿐 아니라 이런 일을 가볍게 여기고 불신앙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집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가 완벽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즉각 응답하시려는데 기도 않겠다고 하니, 도우심을 청하지 않겠다고 하니, 여호와 하나님 마음이 오히려 괴로우신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이 없는 아하스왕과 유다 백성들이 구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초자연적이고, 사람의 생각과 지식을 초월하기에 믿음이 있어야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출애굽 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그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강의 갈라짐과 강물의 역류가 그랬고,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할 때 태양을 정지시킨 일이 그랬고, 히스기야에게 징조로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징조도 그랬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에게 보여주실 유일한 표적이라고 하신 “요나의 표적”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표적이 그러합니다.
이 세상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징조 역시 초자연적이며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는 방법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습니다.
마태복음1:18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 가면 “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천사의 지시와 22~23절에서는 마리아를 통해 이 일이 이루어짐이 주께서 선지자로(이사야)하신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번역한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볼 수 없었던 이 징조가 여호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매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취된 사실을 마태가 증거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임마누엘 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삶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1. 평강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하늘에서 천사들이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눅2:14)라고 했습니다.
또한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두려움과 절망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26).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평강의 삶을 사셨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평안할 수 없는 세상 여건이었으나 주님께서 주신 평강을 믿는 자에게는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으로 얻는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므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으므로 예수님를 딛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상태에서는 염려와 걱정,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없지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품안에서는 모든 일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하스 왕처럼 자신의 힘이나 능력만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평강의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인간과 인간관계에 회복으로 누리는 평강입니다.
아담의 범죄우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열남 되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형으로서 자존심 상하고 시기심도 나고, 분한 감점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정치도 서로 헐뜯고, 치고 받고 하여 상처가 많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간의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다른 사람, 다른 기업을 무참히 무너뜨려야만 하는 사회입니다. 죄로 인한 타락한 세상 모습입니다. 여기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동물세계와 다릅니다. 동물세계는 약육강식이지만, 사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물어 죽이는 사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약한 자를 도우며 함께 더불어 도우면서 사는 사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시므로 인간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김의 삶을 본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삶은 이 사회를 평강의 삶으로 회복하는 유일의 방법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 사회, 가정, 교회 속에서 평강을 회복하는 인간관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회복으로 뉘는 평강입니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상의 모든 일을 맡기신 것은 인간만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연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창1:28에 “다스리라” “정복하라”는 말씀은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잘 살수 있도록 살펴주고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괴롭히고 자기의 삶을 위해 백성을 위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멸망과, 나라의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평안하게 살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벼려해 주는 왕이 잘 다스리는 것과 같이, 자연도 인간이 잘 보호해 주고, 가꾸어 주어야 인간도 잘 살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연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많이 파괴했습니다. 우리의 편리한 대로만 이용하다보니 많이 오염되고, 이 오염이 도가 넘어서 생태계가 이상이 오고, 기상 이변이 오고, 질병도 많고, 인간의 생존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 한 마리, 들의 꽃 한 송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말씀하시며 동시에 우리에게도 그 사역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의 기상 이변으로 정말 지구에 생존위기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복극과 남극의 얼음산이 녹아 내리면 바다의 수면이 90Cm나 높아지고, 하늘에는 오존층이 파괴되어 식물들도, 사람들도 태양 광선을 직접 쪼이므로 피부암, 녹색식물의 파괴현상으로 밀림이 사라지면 산소 희박사태가 올 것입니다.
우리의 편리함만 생각지 말고 인류는 자연을 바르게 다스리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 검소한 생활, 자연에 적응하는 생활을 사셨던 것처럼, 절제와 근검 절약생활이 필요합니다. 자동차 적게 타기, 난방온도 1도 낮추기, 겨울에 내의 한 벌 더 입으면 집에서 춥지 않게 살수 있습니다. 우리 총회에서 2년 전에 ‘생명 살리기 10년’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상 아직도 피부로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습관을 많이 바꾸지 않으면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므로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태도부터 친 환경적 삶으로 바꾸는 일에 힘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아름답게 보존하여 평강의 삶을 누리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평강 주시는 은혜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게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7장에는 남 왕국 유다의 아하스 왕 때 (735~720 B. C) 북 왕국 이스라엘과 아람 왕이 서로 동맹을 맺고, 남 왕국 유다를 침략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서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불안한 가운데 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들 아하스 왕에게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유다를 향하신 뜻을 알게 하십니다. 그네용은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멸하려 한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기에 다윗 집에 결단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사7:7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7:10~11에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 든지 높은데서 든지 구하라”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구원하실 분명한 계획을 가지셨기 때문에, 믿지 못할까봐서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보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위하여 징조를 구하는 것은 불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라는 명령을 “무엇으로 증명하시겠습니까” 물었을 때 네 손의 지팡이를 던져 보아라, 또 네 손을 겨드랑이에 넣어 보아라“하시면서 징조를 보이셨습니다. 사사시대에 기드온도 부르셔서 미디안으로부터 나라를 구원하게 하실 때에 군사 300명으로 메뚜기 떼처럼 많은 미디안을 물리치게 하셨는데 기드온도 세 번씩이나 징조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 번 다 응하셨습니다.
그러나 12절에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 얼핏보면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 같고,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하스 왕이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다”고 한 것은 그의 믿음 없는 상태를 드러낸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 일은 힘써서 간구하는 일 즉 기도에 힘쓰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기 때문에 굳이 기도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듣기 좋게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다’는 말로 거부한 것입니다.
흔히 기도할 제목들을 가지고 기도하라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기에 바쁘실 터인데 나까지 기도하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번거롭게 해 드릴 것 있겠는가 이런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요.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요 정말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의 말일까요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기도할지라도 다 들으시며 또한 모든 문제를 기도하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십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여호와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아람왕과 북왕국 이스라엘 왕이 협공하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구원의 징조를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도우시려고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대신 병사를 모으고, 전쟁양식을 비축하는 일을 하는 것은 백성을 괴롭히는 일일 뿐 아니라 이런 일을 가볍게 여기고 불신앙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집을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구원하시기 위한 준비가 완벽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즉각 응답하시려는데 기도 않겠다고 하니, 도우심을 청하지 않겠다고 하니, 여호와 하나님 마음이 오히려 괴로우신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이 없는 아하스왕과 유다 백성들이 구하지 아니한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초자연적이고, 사람의 생각과 지식을 초월하기에 믿음이 있어야 구원의 은혜를 입게 됩니다.
출애굽 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그랬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단강의 갈라짐과 강물의 역류가 그랬고,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전쟁할 때 태양을 정지시킨 일이 그랬고, 히스기야에게 징조로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징조도 그랬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이 세대에게 보여주실 유일한 표적이라고 하신 “요나의 표적”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표적이 그러합니다.
이 세상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징조 역시 초자연적이며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는 방법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외쳤습니다.
마태복음1:18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 가면 “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천사의 지시와 22~23절에서는 마리아를 통해 이 일이 이루어짐이 주께서 선지자로(이사야)하신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번역한즉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볼 수 없었던 이 징조가 여호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매 처녀 마리아에게서 성취된 사실을 마태가 증거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임마누엘 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삶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1. 평강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하늘에서 천사들이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눅2:14)라고 했습니다.
또한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두려움과 절망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26). 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통해 평강의 삶을 사셨고,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평안할 수 없는 세상 여건이었으나 주님께서 주신 평강을 믿는 자에게는 실제로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으로 얻는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므로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으므로 예수님를 딛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긴 상태에서는 염려와 걱정,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 없지만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품안에서는 모든 일의 도우심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아하스 왕처럼 자신의 힘이나 능력만 의지하지 말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평강의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인간과 인간관계에 회복으로 누리는 평강입니다.
아담의 범죄우 인간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열남 되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형으로서 자존심 상하고 시기심도 나고, 분한 감점을 억제하지 못하고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의 정치도 서로 헐뜯고, 치고 받고 하여 상처가 많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간의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다른 사람, 다른 기업을 무참히 무너뜨려야만 하는 사회입니다. 죄로 인한 타락한 세상 모습입니다. 여기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동물세계와 다릅니다. 동물세계는 약육강식이지만, 사람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물어 죽이는 사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약한 자를 도우며 함께 더불어 도우면서 사는 사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시므로 인간관계의 회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7:12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김의 삶을 본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삶은 이 사회를 평강의 삶으로 회복하는 유일의 방법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우리 사회, 가정, 교회 속에서 평강을 회복하는 인간관계가 되시기 바랍니다.
4.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회복으로 뉘는 평강입니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상의 모든 일을 맡기신 것은 인간만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연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창1:28에 “다스리라” “정복하라”는 말씀은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잘 살수 있도록 살펴주고 관리하라는 뜻입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괴롭히고 자기의 삶을 위해 백성을 위해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멸망과, 나라의 멸망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백성이 평안하게 살고, 행복한 삶을 살도록 벼려해 주는 왕이 잘 다스리는 것과 같이, 자연도 인간이 잘 보호해 주고, 가꾸어 주어야 인간도 잘 살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동안 인간은 자연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많이 파괴했습니다. 우리의 편리한 대로만 이용하다보니 많이 오염되고, 이 오염이 도가 넘어서 생태계가 이상이 오고, 기상 이변이 오고, 질병도 많고, 인간의 생존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 한 마리, 들의 꽃 한 송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말씀하시며 동시에 우리에게도 그 사역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요즘 세상의 기상 이변으로 정말 지구에 생존위기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복극과 남극의 얼음산이 녹아 내리면 바다의 수면이 90Cm나 높아지고, 하늘에는 오존층이 파괴되어 식물들도, 사람들도 태양 광선을 직접 쪼이므로 피부암, 녹색식물의 파괴현상으로 밀림이 사라지면 산소 희박사태가 올 것입니다.
우리의 편리함만 생각지 말고 인류는 자연을 바르게 다스리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 검소한 생활, 자연에 적응하는 생활을 사셨던 것처럼, 절제와 근검 절약생활이 필요합니다. 자동차 적게 타기, 난방온도 1도 낮추기, 겨울에 내의 한 벌 더 입으면 집에서 춥지 않게 살수 있습니다. 우리 총회에서 2년 전에 ‘생명 살리기 10년’ 계획을 세웠는데 사실상 아직도 피부로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습관을 많이 바꾸지 않으면 자연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므로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의 태도부터 친 환경적 삶으로 바꾸는 일에 힘써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아름답게 보존하여 평강의 삶을 누리게 되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평강 주시는 은혜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게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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