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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대림절의 믿음

본문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성탄절을 준비하는 절기라는 뜻이지만 실상은 대림절은 3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탄절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의미, 둘째는 오늘 여기 내게 임하시기를 기원하는 의미, 셋째는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의미입니다. 이 세가지 모두가 주님이 임재하여 나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안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 예수님의 임재의 기쁨과 영광이 임했는지를 보면서 오늘 대림절 첫 주에 여러분 모두가 임마누엘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은 깨어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게 전하여 졌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두 종류의 사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동방의 박사들-이들은 학식으로나 지위로나 상류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밤을 지새우며 하늘을 연구하고 바라보는 동안 주님의 탄생의 소식이 전하여 졌습니다,
② 들판의 목자들-이들은 학식도 지위도 없는 하류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양을 지키며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깨어 밤을 밝히는 사람들이 이들 목자들에게 하늘의 천군 천사의 기쁜 소식이 전하여 졌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복음2:10-11
주님의 임재는 빈부와 지위고하, 유식 무식을 넘어 깨어 경성하는 사람들에 나타났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깨어있다는 것은 잠들거나 졸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밤잠 자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졸지 말라는 단순한 말씀도 아닙니다. 영혼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삶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명이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깨어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깨어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봉사가 깨어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사명감으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사명에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일에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깨어 경성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밤을 지새워 하늘을 지키던 동방박사들, 양떼를 지키며 밤을 지키던 목자들, 그 깨어있던 사람들에게 주님의 임재의 축복이 나타난 것입니다.
2.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때에 성전에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안나라 하는 나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을 모두 주님이 오실 것을 믿음으로 알고 사모하는 믿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므온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누가복음 2:25
시므온은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매일 매일 성전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씀은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기다리던 끝에 할례를 행하려 성전에 들어오는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시므온이 기뻐서 아기 예수를 안고 찬송하는 모습을 누가복음2:25-33의 말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한 사람 나이 많은 부인인 '안나'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결혼하여 7년만에 남편을 잃은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지금은 나이 많아 거의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매일 매일 성전을 떠나지 않고 평생을 금식하며 기도하며 보내는 믿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안나'가 아기 예수를 보고 이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이 두 사람만 아기 예수를 메시야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성전에 온 그 수많은 아기들 가운데 어떻게 이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사모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심령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들만이 예수님을 알아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파하러 사방에 다니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함께 동행하였습니다. 길을 가던 어느 날 예수님은 갑자기 사람들을 돌아 보시면서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다소 황당한 질문이었습니다. 특히 제자들이 보기에는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기가막혀 하면서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주님 이렇게 사람들이 주님의 주위에 모여 밀고 댕기고 하면서 가고 있는데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라니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지 않았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아니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옷을 만지는 것도 종류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만져도 아무렇지도 않고, 어떤 사람은 만질 때 주님도 알고, 그 스스로도 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능력이 나가는 것을 알고, 본인은 능력받은 것을 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서 능력이 나갔느니라'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항의하던 사람들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때에 한 여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 제가 만졌습니다. 저는 12년을 불치의 병을 앓던 부정한 여자입니다. 이곳 저곳 용하다는 의원들을 만나보았으나 재산만 낭비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것이라는 간절한 믿음으로 아무도 몰래 만진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의 능력이 제게 임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제 몸의 병의 근원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만졌지만 주님도 무심하셨고, 만지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느낌이 없었는데 이 여인에게만 이런 역사가 나타났을까요 주님도 알고, 이 여인도 능력을 체험케 되었을까요 단 한가지의 차이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만졌느냐 아니냐 입니다. 믿음으로 만진 것이냐, 호기심으로 만진 것이냐의 차이인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알고 믿음으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사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축복과 임재는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임하였습니다. 신앙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큰 기대와 설레임과 간절함으로 주님께 다가가는 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대림절이 참으로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사모하면서 성탄절을 준비하기 바랍니다. 내 심령속에 임하기를 사모하는 믿음으로 대림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3. 외양간에 임하셨습니다.
그때에 여관이 많이 있었지만 그곳에는 들어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입니까 사람들이 가득 차서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집도 많고 방도 많이 있었지만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임하실 곳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깊은 멧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보기에 누추하고 더럽기까지 해 보이는 외양간이라 해도 예수님을 위해 비어진 자리가 있는 곳에 주님이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지 삼십 여년이 지나간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실 장소를 마련하셨을 때 장면을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대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인을 따라가서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유월절을 잡수실 객실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때에 그 주인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다고 마가는 증언하고 있습니다(마가14:13-15).
그 첫 번 성탄절에 주님께서 그 수많은 집들에 가서 문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방이 있습니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저렇게 방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네 그 방들은 다른 손님들로 가득 차서요…...
오늘 주님이 우리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나를 위한 방이 있느냐 주님, 방이 없습니다. 이 사람도 만나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교제도 해야 합니다. 다른 계획들로 제 시간의 방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 심령의 방이 가득 차 있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성도의 삶 속에는 항상 주님을 위해 예비 된 방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많고 복잡해도 주님을 위한 방은 비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뻐도 예배의 방은 비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기도의 방은 비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위한 헌신의 방은 비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주님과 나누는 말씀의 방은 비워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다락방들이 다른 것들로 가득 메워져 있을 때 그 곳에 주님이 임하실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그 베들레헴 거리 그 수많은 집들 속에 주님은 임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이 없는 곳, 아무나 환영하는 곳, 아무 거짓된 치장도 없는 곳, 그 외양간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여기 방이 있습니다. 비록 문도 제대로 달려 있지 못하고, 아름다운 치장도 못했고, 조금 냄새나지만 여기 주님을 위한 방이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3:20
성도 여러분, 이 대림절 동안에 우리의 심령에 주님을 위한 말구유를 준비합시다. 기도의 말구유, 사모의 말구유, 주님을 모실 말구유를 새롭게 단장합시다. 그곳에 주님이 임재하실 것입니다. 이 한 천년을 마감하는 대림절이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는 절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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