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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네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

본문

네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


스바냐 3:14-20


운동선수들이 결승점을 통과하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이 똑같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골인한 후 제일 먼저 전광판을 바라보고 자신이 1위로 골인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기뻐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손을 치켜드는 것은 승리에 대한 기쁨의 표현입니다.


어떤 선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흔드는 것을 볼 수 있고, 옆에 있는 선수와 손바닥을 마주치기도 하고, 두 손을 높이 들어 관중들을 향해 흔들기도 합니다.


선수마다 승리에 대한 세레머니는 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손을 높이 든다는 것입니다.


꼴찌를 하고서 손을 높이 드는 선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시온아 네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바꿔 얘기하면 지금 시온의 백성들은 손을 늘어트리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감격이나 즐거운 일이 없습니다.


신이 나서 환호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손을 번쩍 쳐들 이유가 없었던 유다 민족을 향하여 스바냐 선지자는 ‘이제는 네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노래할지어다. 기쁘게 부를지어다.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4절)


늘어트린 손을 위로 치켜들고 이제는 승리자처럼, 메달을 딴 선수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환호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당한 형편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된 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기나긴 포로생활을 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을 생각하면 무엇이 기쁘고 즐거워서 손을 높이 들고 환호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손을 늘어트리고 절망 가운데 살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선지자는 ‘시온아 네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지자가 백성들을 향하여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확신했기에 그는 담대하게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고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7절 말씀은 우리가 복음 송으로 자주 부르는 노래가 되었습니다만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된 마당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의심할 수 있었지만 선지자는 그 사랑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손을 늘어트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기운을 내라고, 기죽지 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혹시 어렵게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다고 할 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지극히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부모님들의 사랑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생생하게 알고 체험하고 느끼는 가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들을 사랑하시는가를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주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인지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탄절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아름답게 표현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이 말씀을 생각하면 저는 제 큰 아이를 낳을 때가 생각납니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제가 서울 신학교에 가 있는 동안 집사람이 큰 아이를 낳았습니다.


전화를 받고 금요일 수업이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큰 애가 누워서 잠을 자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니까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모릅니다.


정말 그때까지 이렇게 예쁜 어린아이를 본 일이 없었고 그 이후 35년이 다 돼 갑니다만 지금까지도 그렇게 잘 생긴 아이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혹시 아이들이 결혼해서 손자나 손녀를 보게 되면 그때는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애는 태어났을 때 보다는 커 가면서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두리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자랑하고 싶었고 이 애만 데리고 다니면 저는 정말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렇게 잘 생긴 아이의 아빠가 바로 나다 하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십니다.


보면 볼수록 예뻐 보이고 자랑하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에게는 여러분들이 최고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을 잠잠히 사랑하시고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좋아서 너무 사랑스러워서 기뻐하며 노래 부르시는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보실 때 이렇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다 같이 찬양을 부르겠습니다.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 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


그런데 여러분, 다 짐작을 하겠지만 정말 제 아이들이 그렇게 잘 생긴 것입니까?


그렇게 잘 생겼기 때문에 그렇게 예뻐 보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제 아이이기 때문에, 제가 사랑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그렇게 예뻐 보였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었고 아이들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지금 옆에 있는 두리가 그것을 잘 증명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아이들이 무엇을 잘 했기에 그렇게 예뻐 보인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잘 해서 예쁜 것이 아니고 그저 내 자식이기에 예쁜 것이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스러워하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잘 못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존재가치로 인하여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자녀 삼았기에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온전하신 하나님 앞에 잘 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심방하면서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해보면, 집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없는 집은 정말 깨끗합니다.


그런데 아주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은 정말 복잡합니다.


그런데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집은 집이 좀 더 요란스럽습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벽에다 붙여 놓은 집도 있고요,


유치원에서 그린 미술작품을 액자로 만들어서 붙여 놓은 집도 있습니다.


제가 그 미술작품을 보면 미술에 조예가 없는 제가 보기에도 잘 그린 그림이 아닙니다.


그냥 장난쳐 논 그림 같기도 합니다.


피카소가 장난을 쳤으면 그것으로도 엄청난 가치가 있겠지만 아이들이 장난 쳐 논 그림이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냥 마음을 넓혀서 이해를 해도 액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 놓을만한 그림은 못됩니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은 그게 아닙니다.


그림을 그렸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기특합니다.


그래서 가보와 같이 몇 만 원짜리 액자에다 고이고이 간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어떤 수준이겠습니까?


제가 볼 때 유치원학생이 아니면 초등학교 학생이 그린 그림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하나님이시라 하늘의 상급과 땅의 상급이라는 액자로 포장해서 우리에게 도로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우리가 절대 무엇을 잘 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크게 잘못해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일을 못한다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존재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성탄의 고백이라는 고훈 목사님의 시가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보다/나를 더욱 사랑하신이여


내가 당신을 의지한 것보다/나를 더욱 의지하신이여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한 것보다/나를 더욱 필요로 하신이여


내가 당신을 떠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보다 /나 떠나서 당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신이여


내가 당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나를 더욱 소중히 여기시는 이여


내가 당신을 위해 살기보다 /당신이 나를 위해 살기가 더 쉬운 이여


내가 당신을 위해 죽기보다는 /당신이 나를 위해 죽기가 더 쉬운 이여


당신의 이름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입니다.


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 남자 아이를 사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살사(스페인 춤)를 추면서 함께 지내다 보니까 가까워진 것 같습니다.


그때 예리를 앞에 두고 제가 야단을 쳤습니다.


‘지금 누구를 사랑할 때냐? 공부해야 할 때가 아니냐?


그리고 왜 하필이면 같은 반에 있는 아이를 사랑하느냐?


사랑은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이제 사귄다는 생각은 벗어버리고 열심히 공부나 해라.’


그랬더니 아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것입니다.


그 때 아이는 울면서 저의 말을 서운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아빠는 너무 이해심이 없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 그 순간 아빠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 아이를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를 사랑했기에 책망을 하고 야단을 친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난과 고통을 주시는가?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고난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미워하기 때문에 주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믿는 사람도 세상에 살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성격은 같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고통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연단 받는 것이며


그 연단의 기간이 끝나면 지위도 회복되고 새로운 축복까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정도로 힘들게 살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고난과 고통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아직도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아직도 여러분들이 잘 되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형벌은 사실은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고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말씀도 주시지 않고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어떻게 살든지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아무렇게 살아도 고난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불행한 것이며 가장 큰 형벌입니다.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연단시켜 더 복되고 더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시기 원하시고 계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고통 속에 함께 하십니다.


15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 고통을 주시면서 그 고통 속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의 고통 속에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잠잠히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고 더 나은 미래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행복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이렇게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며 그 분과 함께 사는데 있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분께 나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겨드릴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7편의 기자는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여러분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쉬게 하실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진정 행복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기도 합니다.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거기에 우리를 책임지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무엇을 주저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여호사밧 왕 시대에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왔는데 유다는 그들을 이길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나에게 속한 것이라”(대하20: 15)


이 싸움은 그들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믿음으로 말씀을 붙들었을 때 하나님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어려움을 하나님의 어려움으로 만들어야 하고 나의 싸움을 하나님의 싸움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험한 인생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 해결하려 들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려움을 통해 내 신앙을 점검해보고 내 연약함을 깨달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 됩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길 때 내 어려움이 하나님의 어려움이 되고


내 싸움이 하나님의 싸움이 되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네 손을 늘어트리지 말라.


네 손을 번쩍 치켜들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여러분들을 이렇게 사랑하시는 주님께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맡기심으로 승리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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