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예수 부활이 주는 축복과 사명(막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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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이 주는 축복과 사명(막16:1-8)
할렐루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2021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 사랑의 종교일 뿐 아니라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보여주는 첫 번째 기둥입니다.
사도 바울이 적절하게 표현한 대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대신 지고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여기에서 주님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억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죄에서 구원을 받는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부활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죄의 결과인 사망이 굴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오늘 2021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이러한 부활의 축복을 기억하고 부활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은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급하게 장례되었지만 일반 사람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장례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무서워서도 그렇고 너무나 슬프고 낙심이 되어서도 갈 수 없는 장례식이었습니다.
멀리서 예수님의 무덤만을 확인하였던 여인들은 안식일이 끝나자 예수님께 바를 향품을 사다가 준비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무덤을 찾아 갑니다.
갈릴리로부터 여기까지 따라왔던 사랑하던 주님에게 마지막 향품이라도 발라 드리고자 하는 정성으로 무덤을 찾아가는 그들에게 몇 가지 걱정이 있었습니다.
무덤을 큰 돌로 막았는데 그 돌을 어떻게 옮길 수 있겠느냐?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돌을 옮기는 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군인들이 과연 문을 열고 들어가도록 허락할 것인가?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군인들에게 사정이나 해 보자는 막연한 심정으로 무덤에 도착한 여인들에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먼저는, 무덤 문을 가로 막고 있던 그 육중한 돌이 옮겨져 무덤 문이 열려져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무덤에 들어가 보니 한 청년이 즉 천사가 있었고 그 천사는 예수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서 빈 무덤을 보여주었습니다.
세 번째는,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자들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하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자기들이 예상했던 일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몹시 놀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에 대해 우선 놀랐을 것입니다.
천사를 만나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은 일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런 상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그저 무서워 빨리 도망하고 싶은 마음밖에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누가 그곳에 있었더라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이 모습이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떠돌던 부활에 대한 거짓 소문을 잠재우는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거짓된 소문의 대표적인 것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해갔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십자가에서 기절했다가 무덤에서 다시 깨어났다는 설, 무덤을 잘못 찾았다는 설, 여자들이 환상을 보았다는 설 등 여러 가지입니다만,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무덤을 제일 먼저 찾은 사람들은 여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빌라도의 인봉으로 굳게 닫힌 무덤을 어느 누가 쉽게 열 수 있었겠습니까?
다른 무덤을 찾아갔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고 환상을 보았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입니다.
이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부활신앙이 다시금 확실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는, 큰 돌이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가면서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 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연약한 여자들의 힘으로 이 돌을 옮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돌은 이미 옮겨져 있었고 여자들이 걱정했던 일은 이미 해결이 되어져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인간이 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큰 좌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큰일들이 우리 앞을 얼마나 많이 가로 막고 있습니까?
그 중에서 가장 큰 돌은 죽음의 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의 큰 돌을 누가 맘대로 움직일 수 있고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죽지 않을 수 있겠으며 자신의 죽음을 연장할 수 있겠으며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나라에 점쟁이들이 많아서 나라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많은 점쟁이들이 거짓말로 사람들을 혼돈케 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왕이 결심을 합니다.
'점쟁이를 다 없애 버리고 이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
왕이 이 일을 진행하면서 제일 먼저 가장 널리 알려진 유명한 점쟁이를 불렀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그 점쟁이를 테스트합니다.
"자네는 자네가 몇 살까지 사는지를 아는가?"
이것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점쟁이는 능청스럽게 이야기합니다.
"예, 압니다. 폐하." "언제까지, 몇 살까지 사는가?"
"예, 폐하보다 삼일 일찍 죽습니다." "뭐라고! 그럼 나는 언제 죽나?"
"예, 폐하는 저보다 삼일 더 사십니다."
왕은 점쟁이가 거짓말하는 것을 알았지만, 혹시 점쟁이의 말이 맞으면 큰일이다 싶어 걱정이 되었습니다.
왕도 삼일 뒤에 죽기 때문입니다.
왕은 그날 점쟁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혹시 그러다가 삼일 후에 자기가 죽지 않을까? 두려워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 자가 오래 살도록 잘 보호해 주거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워합니다.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자기 마음대로 옮기거나 움직이거나 주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 앞에 인간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죽음의 권세를 부활하신 주님이 이기셨다고 단언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예수 부활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는 다 잠자는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되는 줄 믿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주님을 따라 우리도 부활하여 영생의 삶을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인간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무덤을 가로 막고 있던 죽음의 큰 돌을 옮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빈 무덤입니다.
여자들이 무덤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무덤 안에 한 청년이, 이 청년을 천사로 보는데요, 이 천사가 여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절)
그를 두었던 무덤에는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의 시체를 두었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천사는 여자들을 향하여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 무덤은 좌절과 슬픔과 낙심의 현장을 말합니다.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하며 낙심하며 좌절하였습니까?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을 보고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면서 슬피 울었습니다.
무덤을 바라보았던 여자들의 낙심과 슬픔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무덤은 누구의 무덤이든 좌절과 낙심과 슬픔의 현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그 현장을 바꾸어버렸습니다.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주님은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냄새 나는 무덤의 현장을 부활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으신 줄 믿습니다.
좌절과 슬픔과 낙심의 현장을 희망과 기쁨과 소망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머리와 눈을 다치고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시력은 회복되었으나 이번에는 기억력이 저하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억력을 회복하는 치료를 장기간 하여 기억력이 많이 좋아졌으나 다시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는 담당 의사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과거에 집착하는 기억력을 찾으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력을 찾겠습니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모진 핍박과 십자가의 고난과, 그를 가두었던 무덤, 음부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아침입니다.
이 부활주일에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낙심과 좌절과 실패와 슬픔의 자리를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고 부활하심으로 기쁨과 감격과 승리와 소망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실패와 좌절과 아픔을 기억하지 마시고 오늘의 부활과 미래의 승리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갈릴리로 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천사는 여자들을 향하여 다시 말합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예수님은 이미 여러 차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말씀하시면서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4:28)
이 말씀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먼저 가셨고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갈릴리는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이었고 고기 잡던 제자들을 선택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은 배와 그물과 심지어 아버지와 가족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의기양양하게 입성하면서 주님과 함께 이루어질 자기들의 욕망을 기대하며 흥분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그들은 평생의 꿈이 허물어짐을 알았고 심한 좌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고 주님이 먼저 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욕망이 아닌 새로운 사명을 맡겨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8-20)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치라”(요21:15)
2021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행여 처음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처럼 자신들의 욕망과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함께 절망하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중단하지는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제자들을 갈릴리로 모으시고 사명을 새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진정한 삶이 생명을 구하고 생명을 살리는 삶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무덤에 머물며 예수님의 죽으심을 안타까워하고 실망하지 말고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의 목적을 깨닫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21.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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