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앞으로 나아가야 살 수 있어요 /출애굽기14;1-31(210404,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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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아가야 살 수 있어요 /출애굽기14;1-31(210404, 부활주일)
PW : 믿음 BIW : 앞으로 나아가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죽음처럼 보이는 처지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오랜만에 교회에 나온 사오정
사오정이 아주 오랜만에 교회에 나옵니다.
게다가 부인까지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전에는 열심히 나왔었는데 요근래 뜸하니 잘 나오지 않다가 다시 나왔는데 부부가 함께 왔으니 교인들이 무척이나 반가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오정이 처음부터 줄 곳 자기 아내 이름을 부를 때 “my darling~, honey, sweet~”하면서 주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부인들의 질시와 찬사를 자아냅니다.
급기야 박 권사는 자기 남편을 꼬집으면서 “당신도 사오정에게 좀 배워요”라고 핀잔까지 주는 것입니다.
보다 못한 친구가 사오정을 불러서, “야, 사오정, 너 갑자기 왜 그래?”하면서 따집니다.
그러자 사오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아세요.
“사실은 말이야... 요즘 들어서 아내 이름이 기억이 잘 않나. 가물가물해...”하는 것입니다.
나이를 하나둘 더 먹어 가면 갈수록 가족들 이름도 가물가물해집니다.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큰 교회에서는 점점 교인들 이름을 가물가물 잊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기 집 전화번호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아서 허덕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에서 전화번호를 찾아야 하는 시기가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신앙인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가족들 얼굴이 생각나고, 전화번호가 생각나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집이 어딘지 잊어버리고 길거리에 앉아서 여기가 내 집인가 하지 않는 것만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지인들의 이름과 얼굴이 생각나면 아직은 치매까지는 걸리지 않았구나. 하는 마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P4.
사람이란 존재는 어떤 것 하나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버려야 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에서, 마음에서 버리지 못하고 계속 붙들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미련을 가지고 살아간다.
사람이 살면서 지나간 시간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난 시간을 되뇌이면서 생각하며 산다.
그러면서 한없이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면서 산다.
특히 어떤 사건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거나 막대한 이해득실의 계산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면서 산다.
더더구나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다면 더 후회하거나 아쉬워하면서 가슴을 달래야 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이라는 나라는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애굽제국이 중동지역에서 최강대국으로 건재할 수 있었던 요인들 중에 하나는 200여만 명의 거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노예로 삼아서 풍부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버린 애굽 제국은 최강대국에서 최약소국으로 전락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한 나라에서 한꺼번에 200여만 명이 사라진다면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어느 한 순간에 대전보다 더 큰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디론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200여만 명이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대전시 인구가 150만 명이 약간 안 되어서 대전시와 세종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과 같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나라가 제대로 세워지겠는가?
상상할 수 없는 공황 상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난 뒤에 애굽 제국의 바로는 몹시 당황스러워하고 “내가 왜 그들에게 떠나라고 했던가?” 하면서 후회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보낸 바로와 대소 신료들은 후회하면서 어떻게 할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의 바로와 대소 신료들을 다루고 있을까?
아울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 것일까?
D4.
① 떠난 노동력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마음을 넣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애굽에 10번에 걸쳐서 재앙을 내리면서 애굽의 잡다한 신들을 심판하고 징계하면서 고통을 당했으면 이젠 지긋지긋해서라도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릴 것 같은데,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장자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속히 애굽을 떠나라고,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냈으면 이젠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을 만도 한데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어쩌면 애굽의 바로와 대소 신료들이 가진 이런 모습들은 인간들이 가진 진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우리들이 바로와 대소 신료들의 입장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고 쉽게 떠나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노예로 부렸기 때문에 수많은 난공사들을 이루어낼 수 있지 않았던가?
학자들마다 인류 7대 불가사의한 것에 대하여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필론이라는 사람이 말한 세계 7대 불가사의(Seven Wonders of the World, 世界七大不可思議)은 바빌론의 공중정원, 기자의 대피라미드,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로도스 섬의 청동거상,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 이렇게 7가지를 말한다.
일곱 가지 중에 하나가 애굽에 있는 대피라미드이다.
지금 이집트에 있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노예로 삼아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버리면 애굽에서 그만한 노동력을 동원할 길이 없는 것이다.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는 10재앙을 당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남으로 인하여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장자가 죽어서 온 애굽 제국이 울음바다, 통곡의 바다가 되었음에도 바로는 다시 노동력을 찾아와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났다는 사실이 바로에게 전달된다.
그러자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만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니다.
바로의 신하들, 곧 대소 신료들의 마음과 생각도 변했다고 기록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면서 곧 바로 추격군을 편성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서 다시 애굽으로 끌어오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600대의 병거 부대가 동원된다.
그런가 하면 전 애굽에 있는 다른 모든 병거 부대와 지휘관과 병사들을 총동원시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끌고 오기 위해서 바로는 애굽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려서 추격하는 것이다.
그 당시 애굽제국이 거느리던 병거 부대는 중동지역에서 최고의 병력이다.
백전백승하는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최고의 병사들이다.
당시 바로가 아멘호텝2세이었기 때문에 아멘호텝2세는 군마들을 조련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왕이고, 각종 운동과 사냥을 즐겼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서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아멘호텝2세가 거느리고 있는 병거 부대를 막아낼 나라도, 민족도 없었던 시절이다.
이런 막강한 병거 부대를 앞세워서 아멘호텝2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애굽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 출병하는 것이다.
애굽의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병거 부대가 추격해 오는데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연 어떻게 할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군사들에 의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이런 위기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려하고 있는 것일까?
② 보여주시는 하나님
9-10절에서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 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멘호텝2세가 거느리고 있던 병거 부대가 무시무시한 군사들이라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다.
무시무시한 애굽의 병거 부대가 자신들을 추격해 온다는 것을 본다는 것 자체가 너무너무 두렵고 무섭고 몸서리쳐지는 일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을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사들을 보게 하신다.
무시무시한 병거 부대가 구름떼처럼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두렵고 무섭고 몸서리쳐진다.
울부짖고 탄식하고 우왕좌왕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무시무시한 병거 부대가 몰려오는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연히 모세를 향하여 원망, 불평하면서 부르짖는다.
11-12절에서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원망하고 불평하고 울부짖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이 똑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이라면 가만히 앉아서 ‘어떻게 되나 보자.’ 하면서 구경만 하고 있겠는가?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 자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의적인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얼마나 이해타산적인지,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욕망이다.
인간이란 자체가 본래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있는 백성들을 괜히 모세와 아론이 부채질해서 애굽을 떠나서 이제 어마 무시무시한 애굽 군사들의 창칼에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을 향하여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애굽 병거 부대만 보지 않았어도 이렇게 흥분하거나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아우성을 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추격하는 병거 부대를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흥분하고 두려워하고 몸서리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요즘 어떤 모습들을 보고 있는가?
여전히 극성부리고 있는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교회를 위협하고 교회문을 걸어 잠그고 폐쇄시키려는 악한 세력들의 모습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이들이 막강한 병거 부대들이다. 어마 무시무시한 공권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막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폐쇠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오늘 드려지는 부활절 감사예배를 전국에서 공권력으로 감시하겠다고 발표하지 않았는가.
그런가 하면 삶의 터전이 무너져버린 서민들의 울부짖는 모습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개척교회들이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무언가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것이 정말로 하나도 없다.
대항할 힘도, 용기도 없다.
그들의 악행을 저지하고 반대하는 피켓 하나 들고 나가서 소리 한 번 지를 용기마저 없다.
애굽의 병거 부대가 자신들을 맹추격하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로 물러설 수 없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야만 하는 형편이다.
뒤로 물러서면 애굽의 병거 부대의 창칼에 맞아 죽을 수 있고,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처지를 만들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도록 역사해 가신다.
③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
몸서리치면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하면서 백성들을 독려한다.
위기 상황 앞에서는 그 위기를 타파하면서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지도자의 리더쉽이 중요하다.
사실 200여만 명의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이라 해도 지금까지 애굽에서 종살이만 하던 사람들이다.
군사훈련 한 번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다.
죽으라고 노동만 하던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어마 무시무시한 병거 부대가 구름떼처럼 몰려온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 우왕좌왕,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소리소리 지르고 발악하는 것이 당연한 이들이다.
이런 백성들을 지휘 통솔할 지도자가 믿음으로 굳게 서서 당당하게 백성들을 이끌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지도자 한 사람이 200여만 명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담대한 믿음을 주시면서 백성들을 지휘 통솔할 수 있는 리더쉽의 능력을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으리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백성들에게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신다.
사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進退兩難)같은 처지이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에는 어마 무시무시한 애굽의 병거 부대가 구름떼처럼 추격해 오는 상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 나아가면 홍해에 빠져 죽는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뒤따르는 애굽 군사들의 창칼에 맞아 죽는 것이다.
홍해 바다에 빠져 죽지 않으려면 앞으로 나아가면 안 되는 것이고, 그러면 애굽 군사들의 손에 죽는 것이다.
애굽 군사들의 창칼에 죽지 않으려면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면 홍해에 빠져 죽어야 하는 처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어야 하는 처참한 처지이다.
우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앞으로 나아가서 홍해에 빠져 죽을 것인가? 아니면 애굽 군사들의 창칼에 맞아 죽어야 할 것인가?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죽을 때 죽더라도 애굽 군사들의 창칼에 맞아 죽지 말고 홍해에 빠져 죽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치라고 말씀하신다.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친들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치면 없던 배가 쑥 하고 나타나기라도 해서 그 배를 타고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해 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래도 저래도 위험부담이 가증된다.
그래도 하나님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죽음의 홍해 바다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성령 하나님께서 담대한 용기와 믿음과 은혜를 베풀어주셔야만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만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때 사는 것이다.
④ 막아주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
19-20절에서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병거 부대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막아주신다.
그래서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신다.
애굽에 재앙을 내리면서 고센 땅을 구별하여 막아주셨듯이, 이번에는 불구름기둥으로 더 이상 애굽의 군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튼튼하게 막아주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막아버리니 아무리 아마 무시하고 전투력을 가진 강한 애굽의 병거부대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만들어주신다.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고 건져주시고 지켜주시면서 구원의 길로 이끌어가신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 주셨고, 앞으로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아무리 코로나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린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막아주시고 지켜주시고 건져주시고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을 더해 주셨고, 앞으로도 여전히 막아주시고 건져주시고 지켜주시고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을 더 해 주시리라 믿는다.
⑤ 심판의 동풍이 불게 하시는 하나님.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르친다.
그러자 홍해 바다 건너편 동쪽에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홍해 건너편에서 서서히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진기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양쪽으로 단단한 물 벽이 생겨나면서 바다에서 마른 길이 만들어진다.
갈라져서 생겨난 바닷길로 모세는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간다.
애굽의 군사들을 가로막고 있던 불구름기둥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서 홍해로 들어간다.
불구름기둥도 홍해로 들어가게 되자, 애굽의 병거들도 덩달아 홍해로 따라 들어간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애굽 군사들의 마음과 생각을 혼잡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애굽 군사들은 우왕좌왕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병거 바퀴를 벗겨버린다.
병거들은 달릴 수가 없게 된다.
순간 애굽 군사들은 아차 잘못 들어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애굽 군사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우리가 도망하자.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도다.”라고 아우성을 치면서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수 없게 된다.
홍해 바다 한가운데까지 따라왔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모세가 홍해 바다 위로 손을 내밀자 방금전까지만 해도 튼튼했던 물 벽이었는데, 물 벽이 허물어지면서 바다가 순식간에 합쳐지고 만다.
애굽 군사들은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홍해 바다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27-28절에서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다 홍해를 무사히 건넌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지는 이적을 베풀면서 동풍이라는 바람을 사용하신다.
홍해 바다 건너편 광야에서 서쪽을 향하여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하여 홍해가 동쪽에서 서쪽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갈라진 홍해 길을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구원함을 받는다.
“십계”라는 영화에는 홍해 건너편에서부터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반대편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묘사했지만, 성경에 기록한 것으로 보면 반대편 방향에서 백성들이 있는 방향으로 갈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만약에 홍해를 가르기 위하여 바람이 서쪽에서 동쪽방향으로 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을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보면서 홍해 바닷길로 룰루랄라 콧노래 부르면서 들어갔을텐데, 왜 하나님께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을 사용하지 않고 동쪽에서 서쪽을 향하여 부는 바람을 사용한 것일까?
바로 애굽 군사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에 10번에 걸쳐서 재앙을 내렸는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한 그 완악함, 거만함, 교만함을 징계하고 심판하시기 위하여 동풍이라는 바람을 사용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하는 동풍이라는 바람은 종종 심판과 징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애굽인들을 심판하고 징계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길이 된다.
심판과 구원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누군가에게는 심판과 징계라면 누군가에게는 은혜와 구원과 축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막강한 병거 부대를 홍해 바다에 몰살시킴으로써 중동지역에서 최강국이었던 애굽제국은 망하게 되고, 약소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홍해 바다에 몰살당한 600여 병거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가던 애굽의 군사들은 애굽 제국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지줏대였는데, 이제 그 지줏대가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로 사라짐으로 애굽 제국은 망하게 된다.
L4 & B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은 홍해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말씀처럼 들릴 수 있다.
어쩌면 홍해 바다에 빠져 죽는 길이 다시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은 곧 세례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0:1-2에서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27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세례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함을 받는 증표이다.
베드로전서3:21에서 베드로는 “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서 홍해로 들어가서 홍해를 건넘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증표로 세례를 받았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로 나아가는 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은 곧 다시 삶이다.
죽으려고 하니까 사는 것이다.
홍해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서 홍해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들은 애굽 군사들의 창칼에 맞아 죽는 것이다.
그런데 홍해에 빠져 죽으려고 홍해로 들어가니까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인 성경은 역설적으로 말씀하실 때가 아주 많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6:24-25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에게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라고 연설하면서 왜군과의 싸움에서 45전40승을 이루어낸 것처럼 하였다.
보통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장군이 23전23승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45전40승했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빠져 죽는 심정으로 홍해에 들어갔을 때, 살아서 구원받은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죽음의 십자가로 들어가면 다시 부활로 살아난다.
오늘은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3일 만에 죽음의 권세, 죄악의 권세, 사탄의 권세, 온갖 세상 권력의 권세를 당당하게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일이다.
부활은 죽어야 부활하는 것이다.
죽지 않고 부활하는 것은 없다.
반드시 죽어야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나아가면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된다.
그럼으로 믿음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죽음의 길을 걸으면서 부활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죽음의 길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길도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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