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명령(마28:16-20)
본문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명령(마28:16-20)
오늘은 부활절 일곱 번째 주일로서 부활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일곱 번에 걸치는 부활주일을 지키면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이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을 따라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는 놀라운 축복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부활절 마지막 주일을 지내면서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마지막 말씀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갈릴리 한 산에 부르시고 그 산에서 하신 마지막 명령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소중하지 않는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는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정말 귀하신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마태복음의 결론적인 말씀이라는 점에서 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책을 쓰려고 하면 마지막에 가장 신경을 쓰게 마련이고,
어떠한 말로 결론을 맺으며 어떻게 자기의 주장을 마감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하게 됩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는데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마감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을 기록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두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기에 너무나 귀중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 놀라움은 얼마나 컸습니까?
자신들의 눈으로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당하시고 죽으시는 것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는데,
그렇게 죽으신 분이 사흘 만에 살아있는 생명체로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놀라움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그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고백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요,
17절에 ‘주님을 뵈옵고 경배하나’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말씀은 여기에서 최초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만 그만큼 부활하신 주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고 경배를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인정받게 되는 놀라운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으로 인정받으신 그 부활의 주님이 이제 제자들을 향하여 마지막 말씀을 하십니다.
그만큼 오늘 말씀은 귀중한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이라는 점에서 귀한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 이 말씀을 주님의 유언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유언은 죽음에 이르러 부탁하여 남기는 말이기에 죽지 않으신 주님이 유언을 했다는 말이 이치적으로 맞지 않지만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기에 보통 유언이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던 청개구리도 마지막 어머니의 유언은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심으로 이제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고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지막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기에 이 말씀은 너무나 소중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통 지상명령, 가장 위대한 명령, 반드시 따라야 할 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주님을 믿고 섬기는 우리들은 이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고 이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이 말씀을 따라 사는 일이 부족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이 말씀의 중요성을 깨닫고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말씀이 명령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은 모두가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가라는 것이고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세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라, 제자로 삼으라, 세례를 베풀라, 가르쳐지키게 하라, 모두가 명령입니다.
여러분, 명령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할 말씀을 말합니다.
내가 취사선택하여 따를 수도 있고 아니면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주님은 이 명령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하십니다.
주님은 본래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실 때 모든 권세를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주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되셨습니다.
군대 용어로 말하자면 최고의 통수권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최고 통수권자가 명령으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성도는 이제 이 명령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한가하게 유람선을 타고 이곳저곳 여행을 하는 여행객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유명한 음식을 찾아서 먹고 좋은 음료를 마시며 좋은 곳을 구경하는 여행객으로 부름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전함을 타고 작전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의 모습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총사령관이신 주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민족에게 가야 합니다.
고난이 길을 막고 죽음이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모든 민족에게 가서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순종하는 우리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윌리엄 보덴이라는 선교사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부모가 세계 여행을 시켜줄 정도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백만장자의 상속자였습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세계여행을 보냈습니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선교의 비전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선교사가 되기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성경책 뒷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리라(No Reserve)”
그는 예일 대학에 입학해 전교생 1,300명 중에 1,000명이 참여하는 성경공부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일호프미션’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여러 기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자신의 성경책에 또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물러서지 않으리라 (No Retreat)”
그러다 그는 이집트에서 선교하던 중 척수뇌막염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그의 나이 26세였으니 얼마나 아깝습니까?
그는 자신의 성경책 마지막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후회하지 않으리라 (No Regret)”
세상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인생으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별처럼 빛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부유하게 세상을 즐기며 살 수 있었지만 그 안일한 삶을 포기하고
주님의 십자가 군병이 되어 대장되시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이 말씀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목표로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작크 엘룰은 오늘날 가장 중대한 사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수단화되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20세기 최대의 취약점 중에 하나가 목적과 수단을 습관적으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이 되고 그래서 더 이상 목적이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수단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오늘날의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으로 인생의 목적을 삼고 있습니까?
수단이 되어야 할 돈벌이가 목적이 되다 보니까 어떻게 하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합니다.
건강을 위하여 참으로 많이 기도하고 애쓰고 있습니다만 건강하게 사는 것도 사실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마치 건강해서 오래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은데 사실은,
건강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을 생각해야 올바른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도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직장에 취직하는 것도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니까 퇴직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 부름 받은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말씀이요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늘 제자로 부름 받은 성도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부름 받은 성도들의 삶의 목적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름 받고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도 물론 감사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이것이 나의 목적이요 나의 삶의 목표라는 생각을 가져야 할 줄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건강을 주셨습니까?
물질이 부족하지 않도록 채워주셨습니까?
여러분들을 좋은 직장으로 인도하셨습니까?
바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영혼을 구하라는 주님의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목적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야 하나님께 칭찬받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 말씀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를 위하여 내가 세상 끝 날까지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저는 이 약속의 말씀이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계신 주님께서 복음을 증거 하는 성도들을 철저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약속의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이 얼마나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인가를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주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원하셨으면 그들을 세상 끝 날까지 지키신다고 약속하셨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완성하신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게 하는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하는데 주님이 정말 기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뻐하시는 일을 하니까 주님이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의사가 개인병원을 개업하였습니다.
늦은 밤 문을 닫으면 모든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금고 앞에 앉아 그 날 번 돈을 세면서 하루의 피곤을 씻곤 하였습니다.
매 순간의 관심은 돈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책상 위에 돈을 쌓아 놓고 열심히 세던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가면 무엇이라 보고드릴 것인가? 환자들을 고치고 돈만 세다 왔다고 보고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할 때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결국은 이 말씀이었습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12;3)
그 의사는 그 후부터는 환자들이 오면 가장 약할 때를 이용하여 사랑하여 주고 정성을 다 하여 치료하여 주고 전도하였습니다.
병과 죽음과 내세에 대하여 말하면서 치료하였습니다.
밤이 되면 돈도 세고 그 날 영혼 구원받은 명단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부터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은 생각하니 그렇게 일이 보람되고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에 만족을 느끼며 살고 병원도 잘 되고 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전도는 전도를 명한 주님의 마음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강문호 목사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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