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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성부와 성자와 성령

본문

금주는 교회절기로 삼위일체주일로 삼위일체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 나누겠습니다.
본장의 전개 형식이 대화를 통한 것이거니와 여기서는 예수와 빌립과의 대화를 보여준다. 빌립은 브니엘에서 야곱에게(창 32:24, 30), 삼손의 부모에게(삿 13:3-22) 혹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출 34:4-8)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야 말로 전지 전능(마 28:18; 요 1:48) 무소 부재하신(마 18:20)자, 곧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롬 9:14; 빌 2:6) 사실에 대해서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한편 16, 7절에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행 2:1-13)이 약속되어 있다.
1. 빌립의 여호와 하나님 증명 요구(8-10절)
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빌립이 가로되 : 본절에서 빌립은 앞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의 신적인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신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예수에게 여쭙는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
본절에서 '우리에게'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는 당시 모든 제자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앎의 전제란 예수의 선포된 말씀을 이해고 믿기 앞서 구약의 신적 현현(Theophany)을 기대한 듯 싶다.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
빌립의 질문가운데 '족하겠나이다'는 표현은 기대와 열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빌립이 주께서 앞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집', '처소', '예비', '영접' 등의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보기만 하면 족하다는 어리석음과 빗나간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빌립은 어리석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현현을 체험함으로써 예수와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를 바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자세로 자신이 직접 여호와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예수께 요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빌립의 요구는 신성을 지닌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우리에게')를 반영한 것이다.
한편 빌립은 현실주의 신자의 모형이니 육신으로 아버지를 보고 믿겠다는 일반인의 요구이다(영암 김응조).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
주께서는 미련한 질문을 던진 빌립을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다시 자세히 가르쳐 주신다.
본절에서 '너희'라는 말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전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나 구체적으로 '빌립'이란 이름과 '네'(헬, 쉬)란
대명사를 특별히 사용하신 것은 특히 빌립에게 주목하시는 끝까지 자상함을 잃지 않으시는 예수의 배려도 볼 수 있다.
한편 주께서는 빌립에게 '알지 못하느냐'고 도리어 물으심으로써 빌립의 영적인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우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의 동질적인 존재성에 대해서 지금가지 예수께서는 누차 강조하였다.
제자들은 벌써 3년 동안이나 예수와 함께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되신 예수 그리스도(빌 2:6)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전히 영적으로 부족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빌립과 제자들에게 7절에서 하신 말씀과 거의 동일한 말씀을 반복하심으로 그들에게 예비된 영적 진리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신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
여기 이른바 '안에 있고'란 말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상 연합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그 두분의 도덕적 연합의 의미한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다.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삼위 일체의 교리로서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의 사역에 있어서 통일성을 기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목적을 이루어 나간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사역과 사명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며 이루시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명과 사역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반영한 것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만 수행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는 아니시며 도리어 자신의 신적 지위을 낮추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스스로 맡으신 분으로서 능동적으로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본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상호 보완적 존재가 아니라 완전한 동질성을 가지고 계심이 설명되어 진다.
즉 성부와 성자는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동질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근거가 된다.
2.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의 동역하심의 증거(11-15절)
1) 행하시는 사역을 보아서(11-12절) -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
10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 측면과 사역적 측면에서의 성부와 성자간의 동질성을 믿으라고 거듭 요구하신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
성부와 성자의 일치 동일성을 믿지 못하거든 '그 일'로 인하여 믿으라 하신다.
'그 일'이란 예수께서 일으키신 이적과 기사들을 가리킨다. 한편 '나를 믿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튜에테 모이'는 단순히 그 자신이 가치를 충분히 보증하는 '자신의 말씀' 증거에 강조를 두며 믿음을 요청하는 것이다.
12절에서도 예수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언급하시는 것으로 보아 본절에서도 이미 성부와의 동질성에 근거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
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깜짝 놀라게 된다.
성부와 성자의 동질성을 그들이 이해했다면 성자가 하는 일을 자신들도 한다는 것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들의 연합한다는 의미이므로 제자들이 놀랄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라는 말씀에서이다.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
'이보다 큰 것'이란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대로 주의 일보다 크다고 한 것은 복음의 전파가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던 시대보다 양적으로 확대될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파하실 때에는 적은 수의 사람들의 구원받았으나 오순절 이후에는 사도들을 통하여 넓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즉 주께서 크다고 표현하신 것은 질적인 면에서 향상된 위대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양적인 팽창을 지적하신 것이다.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
아버지께로 감 즉 예수의 승천이 더 큰 일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은 거의 틀림없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있었던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암시한다. 또한 이보다 큰 것은 반드시 질적인 의미에서 더 큰 영적 이적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Robertson). 즉 성령의 강림과 필수적으로 연결되는 복음전파 사역에 있어서(행 1:8) 제자들이 예수의 선교보다 더 확대되고 큰 능력으로 이렇게 될 것을 가리킨다.
2) 기도 응답을 보아서(13-14절) -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
기도의 응답에 대한 근거는 주께서 자신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이든지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이다.
또한 구하는 것이 응답 받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하여 구하는 기도가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부르는 단순한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께 구할 수 있는 근거, 즉 보혈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시행하리니 :
아버지께서 기도 응답하심이 아들로 말미암아서 실행됨을 가리킨다(Barrett).
예수의 이름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믿고 구하라. 이것이 신자에게 부여된 특권이다(영암 김응조).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인들은 사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
본절은 윗절의 약속을 거듭 고조하는 말씀이다. 13절과 본절의 차이는 '내게'(헬, 메)가 추가된 것뿐이다.
한편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씀을 13절과 비교할 때 본절은 예수 자신이 더욱 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서 예수께서는 명백히 기도 응답의 시행자이심을 강조적으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13절과 14절을 종합하면 기도의 대상은 '내게'이며, 기도의 중보자는 '내 이름을', 기도 응답의 시행자는 '내가 시행하리라'이다.
3) 계명 지킴을 보아서(15절) -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본절은 주의 제자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증거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본절에서 주를 사랑하는 자는 그분이 가르치신 계명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
사랑이란 어떤 구체적인 정형이 있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방을 아끼고 상대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 관계성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며(3:16)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 5:8). 따라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서 당연히 주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이는 의무라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2. 성령의 역사의 증거(16-21절)
1) 함께하시는 보혜사의 영(16절) -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 본절의 '구하겠다'는 말의 헬라어 '에로테오'는 '상대방을 향하여 동등 처지를 취하고 구하는 태도'와 과히 틀림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
본절의 '또 다른'(헬, 카이 알론)이란 표현은 보혜사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중보자 되시는 예수 대신에 중보자 되실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혜사'는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로서 '곁에'라는 뜻을 가진 '파라'와 '부른다'라는 의미의 '클레토스'가 합쳐진 단어인데 '도움을 받기 위해 곁으로 부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다. 이 낱말은 영어 성경에서 '상담 자', '위안 자', '돕는 자'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예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영원토록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
성령께서는 항상 믿는 자들의 인격과 삶 속에 거하시면서 각자의 필요와 고충을 이해하시며 적절한 은혜로 채워 주신다.
2)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영(17절) -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저는 진리의 영이라 :
본절의 '토 프튜마 테스 알레데이아스'의 경우 헬라어에서는 소유격이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그 해석이 문제가 된다. 즉 이를 주격의 의미로 보면 '진리의 영'이 '진리가 되신 영'으로 해석되어 '성령이 진리'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소유격은 요한에게 있어 거의 그렇듯이 복적격적인 의미를 지님이 거의 확실하다(Brown).
즉 성령은 진리를 전달하는 영이요 혹은 진리를 증거하고 밝히시는 영이다(Morris, Bernard, Barrett).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
'빛'이란 예수를 깨닫지 못하던 어두움인 세상이 예수가 보내신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근본적으로 세상이 영적 통찰력이 없고, 영적 지식도 없으며, 영적 분별력도 없고, 성령을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
예수에 무지한 이들이 아닌 예수를 아는 제자들은 그와 동격이신 성령도 당연히 안다.
본절과 16절에서 '너희와 함께' 있게 한다는 의미의 표현이 세 번 사용되었는데 각각의 문장에서 전치사의 위치를 달리하는데
이것은 동일한 단어의 사용은 피한 요한 특유의 강조적 용법인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3) 함께하시는 영(18절) -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
'고아와 같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파투스'는 요 13;33에서 제자들이 '소자들아'(헬, 테크니아)라고 불리운 것을 상기시킨다. 유대에게 랍비들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같이 여겨졌으므로 제자들은 스승이 죽었을 때 고아라고 불리웠다.
아무튼 유대 사회에서 과부와 함께 더불어 가장 불쌍한 부류의 사람들로 보호자를 상실한 고아가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버려두지 아니하신다고 확실한 보장을 하셨다.
너희에게로 오리라 :
'오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코마이'는 역시 3절과 같이 분명한 미래를 의미하는 현재형으로 성령의 오심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재림을 모두 표현하는 이중 암시적 용법으로 쓰였다.
이처럼 성령과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부모를 다시 찾는 것과 같이 큰 힘이 된다.
4) 다가오시는 영(19-20절) -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
'조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키 미크론'이란 표현은 일차적으로 임박한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의미하지만 20절의 표현과 관련시켜 이해할 때 그리스도 승천 이후로부터 재림 이전가지, 즉 종말론적 중간시기로 볼 수도 있다(Brown). 이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영안을 통하여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나 불신자들은 영적 어두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망각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
영적 안목이 없어서 예수나 성령을 보지 못하는 세상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예수를 본다. 이 표현 역시 1차적으로는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신약시대에 계속될 그리스도와 성령의 구속사역을 가리키나 궁극적으로는 주의 재림시 영광가운데서 예수를 보게 될 것을 가리킨다.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에는 : '그날'(헬, 에케이네 테 헤메라)이란 종말론적 완성의 날로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야 임재를 나타내는 주의 날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본서에서 마지막 날이라는 표현과 거의 의미차이 없이 쓰였을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
본절에서는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새로운 교회 시대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시작될 종말의 날을 가리킨다.
이 날이 이르면 성부와 성자간의 본질적 일체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간의 믿음을 통한 영적 인격적 연합에 대한 신비를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한편 성부와 성자간의 연합과 성자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는 전장의 목자와 양의 비유,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묘사하는 밀접성을 참조하라.
5) 계명을 지킴으로 함께하시는 삼위일체의 영(21절) -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본절에서 주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주를 사랑하는 자이며 주를 사랑하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다고 말씀하신다.
'나의 계명'이란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새계명'을 가리키는데(13:34), 신자들이 서로 사랑할 계명이다.
결 론 :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이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영원토록 보존하신다.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사는 자, 그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다.
주님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사랑할 것을 명하신다. 성령님은 이처럼 내 곁으로 오신다. 삼위일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작정하시고, 약속하시고, 성취하신다.
다시금 성령님을 바라본다. 나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의 말씀을 모두 생각나게 하실 성령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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