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하나님께 달려갑시다
본문
하나님께 달려갑시다 (왕하 4:17-25)
한 해를 보내는 시기에 많이 듣는 말 가운데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우리 삶에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는데, 중요한 것은 다사다난한 한 해를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식으로 많은 일과 어려움을 헤쳐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1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나이 말고는 느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나이가 늘고, 그만큼 주름도 늘고, 인생 시름도 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만 느는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이 말고 무엇이 늘어야 하겠습니까? 지식이 늘어야 할까요? 통장의 잔고가 늘어야 할까요? 아파트 평수가 늘어야 할까요? 자녀의 수가 늘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1년의 세월을 보내며 늘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히 5:12절에 보면,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이 말은 예수님을 믿은 지, 구원을 받은 지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났으니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마치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말씀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지나면, 이제 말씀을 배우는 자리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로, 즉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이 되었기를, 그만큼 믿음이 성장했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성도님은 올 한 해 믿음이 자라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해야 믿음이 자라는지에 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수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아들을 낳았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17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엘리사가 여인에게 말한 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수넴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를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제공하고, 언제든지 편히 머물 수 있는 방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런 배려에 감사한 엘리사가 왕이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는지 물었지만 수넴 여인은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라며 아무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은 엘리사가 사환 게하시에게 무언가 해 줄 것이 있는지 묻자,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라며 수넴 여인이 가지고 있던 문제, 사람의 힘으로든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아들이 없는 문제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왕하 4:16 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엘리사가 내년 이맘때쯤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수넴 여인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덕담 정도로만 받아 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의 말 대로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을 것입니다.
성도님도 지난 한 해 동안 수넴 여인만큼은 아닐지라도 기쁘고 좋은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기쁘고 좋은 일이 믿음이 성장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기쁘고 좋은 일과 믿음의 성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경험하는 기쁘고 좋은 모든 일이 믿음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넴 여인이 경험한 것과 같은 좋은 일만 믿음의 성장과 관련이 있습니다. 수넴 여인이 경험한 기쁘고 좋은 일이라는 게 어떤 일일까요?
수넴 여인이 경험한 기쁘고 좋은 일은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 수넴 여인이 기도했다는 말씀은 없지만, 수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한 행동을 통해, 그녀에게 하나님을 향한 꽤 괜찮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남편이 나이가 많아 아들을 갖게 할 가능성이 없다 할지라도, 수넴 여인은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비록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엘리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을 때, 속이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아들에 대한 간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수넴 여인이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넴 여인이 경험한 기쁘고 좋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도의 응답은 믿음의 성장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면 더 기도하게 되고, 믿음이 성장하면 기도의 응답도 더 많이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님은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습니까? 기도의 응답이라고 해서 꼭 수넴 여인처럼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또 기도의 응답이라고 해서 수넴 여인처럼 마치 온 세상을 다 가진 것과 같은 기쁘고 좋은 일만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기도를 얼마나 하셨습니까? 기도를 얼마나 하셨냐고 하면 보통 새벽기도회를 생각합니다. 물론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이 기도를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에 참여해야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얼마나 하셨습니까?”라는 말은 “하나님을 얼마나 찾으셨습니까?”라는 말과 같습니다. 기도는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해야만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집에서도 기도할 수 있고, 차 안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식당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집에서, 차 안에서, 일터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순간, 순간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찾으셨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셨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셨습니까?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보다는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 머리로, 내 경험으로, 내 감각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믿음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려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범사에, 모든 일에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아버지이심을, 최고의 지혜자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옆에 주인이 계시다면, 내 옆에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시다면, 내 옆에 최고의 지혜자가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분을 찾을 것입니다. 그 분께 물을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기도입니다. 믿음이 성장하려면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또 믿음이 성장하면 그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의 응답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넴 여인이 경험한 기쁘고 좋은 일입니다. 새해에는 더 믿음이 성장하도록 기도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심으로 찾고 부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도 성장하고, 더 많은 기도의 응답도 경험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수넴 여인에게 기도 응답이라는 기쁘고 좋은 일이 있었는데, 계속해서 기쁘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이 아들이 자라서 어느 날 추수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갔는데, 갑자기 아이가 “머리야, 머리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종에게 명하여 어머니에게 데려가게 했습니다. 수넴 여인은 아들의 머리가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약이 있었다면 약을 먹였을 것입니다. 아들을 자기 무릎에 앉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한 아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20 곧 어머니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죽은지라” 이 아들을 낳았을 때 온 세상을 가진 거처럼 기쁘고 좋았다면, 이 아들을 잃었을 때는 온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과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지난 한 해 동안 아들은 잃은 수넴 여인처럼 슬프고 고통스런 일을 겪었습니다. 기쁘고 좋은 일이 믿음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슬프고 고통스런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기쁘고 좋은 일이 많을까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을까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죄는 고통을 낳습니다. 죄는 슬픔을 낳고, 어둠을 낳습니다. 결국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죄는 결코 빛을 낳을 수 없고, 기쁨과 소망을 낳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죄로 가득 찬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는 기쁘고 좋은 일보다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더 많이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더 많기 때문에 이런 안 좋은 일을 믿음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믿음 안에서 안 좋은 일을 다루는 법을 안다면, 우리 믿음이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기쁘고 좋은 일이 믿음을 자라게 한다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은 믿음을 강하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연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럼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본문의 수넴 여인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아들의 속절없는 죽음 앞에 이 여인이 느꼈을 고통과 슬픔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이 여인이 울지 않습니다. 아들은 잃은 수넴 여인이 한 일이 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
수넴 여인을 죽은 아들을 엘리사를 위해 지은 방에 있는 침상에 두고 문을 닫았습니다. 문을 닫았다는 것은 아무도 아들의 죽음을 모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종과 나귀를 내어주라고 요청합니다. 갑자기 선지자에게 다녀오겠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은 의구심이 들었으나, “평안을 빌러 간다”는 아내의 말에 병든 아들의 평안을 빌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여 다녀오게 합니다. 수넴 여인은 자기 남편에게도 아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곧장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나아갔습니다. “24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고 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위하여 달려가기를 멈추지 말라 하고”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안방이 아닌 선지자의 방 침상에 두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아들의 죽음을 말하지 않고, 그저 종과 나귀를 내어주라고 하여 갈멜산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곧장 달려 갔습니다.
수넴 여인을 통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다루는 두 가지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게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지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운다고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사람을 가리켜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뭔가 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진정으로 도와줄 힘이 없습니다.
사람을 의지해서 혹 문제가 해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야기합니다.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더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생명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사람에게 알리거나,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수넴 여인에게 배우는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의 사람, 즉 하나님께 곧장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해 고후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자비는 영어로 compassion을 말합니다. compassion의 com은 ‘함께’를 뜻하는 말이고, passion은 열정을 뜻하지만, 다른 의미로 희로애락의 감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compassion은 함께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시는, 공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희로애락을 공감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다윗이 고백합니다. “시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여기서 뿔은 힘을 상징합니다. 이 중에 지금 성도님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우리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자비의 아버지께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반석, 요새,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새해에는 기쁘고 좋은 일과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 하나님을 더 많이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음이 더욱 성장하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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