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사도행전 1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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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사도행전 1장 1-14절)
기독교적인 색채를 지닌 작품을 쓰는 시인 중에 ‘용혜원’ 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혜원(惠園)”이라는 이름은 예명인데, “은혜의 정원”이라는 뜻입니다. 이름부터가 남다르죠. 이름으로 인해 여성 시인이 아닌가 오해 받기도 하는데, 남성 시인입니다. 그의 본명은 ‘용영덕’ 이고,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결대 신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지금 까지 70여 권에 이르는 시집을 냈고, 수천 편의 시를 썼습니다. 이 분의 수많은 시 중에 「늘 그리운 사람」 이라는 시를 읽어 드립니다.
“늘 그리움의 고개를 넘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 기다리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면 고독에 갇혀 홀로 절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마지막이어야 할 순간까지 우리의 사랑은 끝날 수 없고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 막연한 기다림이 어리석은 슬픔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리움이 심장에 꽂혀 온 가슴을 적셔 와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 그대를 사랑하는 내 마음 그대로 그대에게 전해질 것을 알기에 끈질기게 기다리며 그리움의 그늘을 벗겨내지 못합니다. / 내 마음은 그대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정착할 수 없습니다. / 밀려오는 그리움을 감당할 수 없어 수많은 시간을 아파하면서도 미친 듯이 그대를 찾아다녔습니다. / 내 사랑은 외길이라 나는 언제나 그대에게로 가는 길밖에 모릅니다. / 내 마음은 늘 그대로 인해 따뜻합니다. / 우리 만나면 그리움의 가지가지마다 우리의 사랑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겠습니다.”
이런 내용의 시입니다. 시에서 나오는 기다림, 그리움, 그리고 사랑의 대상은 아마도 예수님이실 겁니다. 용혜원 시인은 예수님을 많이, 그리고 깊이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쓴 시집 중에는 「1000편의 시로 쓴 예수그리스도의 생애」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무려 천편입니다. 지혜의 대명사인 솔로몬 왕은 잠언 삼천(3,000) 가지와 시 천 다섯(1,005)편을 지었다고(왕상 4:32) 했습니다. 시를 지은 숫자로만 보면 용혜원 시인에게 주어진 영감과 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시 중에 “내 사랑은 외길이라 나는 언제나 그대에게로 가는 길밖에 모릅니다.” 라는 구절이 참으로 신실한 믿음을 반증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시 중에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 있습니디. 나희덕 시인의 ‘푸른 밤’ 이라는 시 중에는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에움길-반듯하지 않고 굽어 있는 길)라는 구절이 있고, 안도현 시인의 ‘그대에게 가고 싶다’라는 시 중에서는 “사랑이란 또 다른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리고 혼자서는 가지 않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시적 표현들 속에서, 누군가에 대한 갈망, 그리움, 사랑에 대한 애잔함 등을 짙게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늘 갈망하고, 그리워하고,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림절 기다림의 시간과 성탄의 만남의 시간은 지나갔지만,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의 시간은 또 다시 계속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 앞에, 아름다운 시적표현을 담은 사랑의 고백을 많이 하시고, 평안 가운데, 소망 가운데 연말연시와 새해맞이를 준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하늘에 승천하시는 마지막 장면과, 마지막으로 남겨진 자들에게 말씀하신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실 때 듣는 모두에게 영안이 열려서, 이 장면이 시각화 되고, 영상화 되고, 입체화 되어서, 우리 마음에 감동으로, 은혜로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포함한 사도행전 1장의 전반부에서의 핵심 키워드는 “모였다” 것입니다. 4절에서 사도와 함께 모였습니다. 6절에서 그들이 모였습니다. 15절에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 기도한 숫자가 120명 이었다고 했습니다. 모였다는 것은 예배드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매일 같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일에 집중을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예배의 4요소라고 하면, 찬양, 기도 말씀, 봉헌을 이야기 합니다.
예배드렸다는 것을 확대해서 말씀드리면, 모일 때마다 찬양하고, 모일 때마다 기도하고, 모일 때마다 말씀 듣고, 모일 때마다 여러 가지 예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이고 함께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초대교회의 시작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교회의 본질은 모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루 세끼 밥 먹듯이 모이는 것이 습관화 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모이지 않으면 교회로서 공동체의 존재가치가 없어집니다.
또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 교회로 모이는데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모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왜 모이는 것이 이렇게 중요 합니까? 모임에 나가려는 행동은 번듯한 교회 건물이 있어서도 아니고, 목회자가 있어서도 아니고, 예배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들을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성도는 모이는 것을 즐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모이라고 말씀하시는 소리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변함없이 응답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가장 존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모이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성도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이고, 모이는데 전력을 다하는 교회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한 교회중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시고 양육하신 훈련 주제는 “모이는 것을 당연한 습관으로 삼는 것” 이었습니다. 그 모임의 습관과 훈련이 이 땅에 교회들이 세워진 원동력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서는 우리들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이 치유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임에 힘쓰는 것, 그것이 교회가 추구하여야 할 최고의 가치이고, 성도가 추구하여야 할 최고의 삶의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모든 성도가 모이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아가도록 가르치고 양육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모이기에 힘썼던 제자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성도들을 기억하며, 우리 00교회가, 나 자신 스스로도, 초대교회의 모임 정신아래, 모이는데 전력을 다하는 순종으로 나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 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면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 1:4,5)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대단한 오해를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오신 다는 것이, 정치적으로 로마의 속국에서 벗어나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통치자로) 오시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종교적인 메시아(구원자)가 아닌 정치적인 메시아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잘못된 희망을 품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 6절에서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한 글을 자세히 보시면, 제자들이 생각하는 “때(시기)”는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주권 회복-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자주 독립)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는데도 제자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얼른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 이면에는 자신들도 왕의 옆에서 무언가 한 자리 할 수 있을까? 라는 은근한 기대감과 보상심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7절, 8절로 답을 해 주셨습니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도 “때와 시기”를 언급 하셨는데, 예수님이 말씀 하신 “때와 시기”는 심판의 날,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머리속에 있는 잘못된 때에 대해서 바로 잡아 주시고, 너희들이 기다려야 할 때는 오직 “내가 심판자로 다시 오게 될 마지막 날”만을 기다리라고 깨우쳐 주십니다. 그리고 당부 하시기를 너희들은 “때”를 구할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구하고, 그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내 이름을 증언하는 증언자(증거자)의 삶을 살아가라고 당부 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마지막 권면의 말씀입니다.
7절과 8절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모였을 때 함께 구하여야 할 것은, 우리 자신들의 이해관계나, 목적달성을 위해 바라고 구하는 것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소망하고, 바라는 것들을 깡그리 무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여야할 가장 최고의 기도 제목은, “오직 성령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예수님의 이름을 자랑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증언 하는 일에 일생의 노력을 다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① 오직 성령을 구하고, ② 증언하는 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향하신 온전하신 뜻이자, 명령이자, 사명입니다. 이 두 가지에 집중하면,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일들은 물론이고, 바라고 원하지 않은 것까지 채워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고, 이 두 가지 권면을 이루어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절대로 잊지 말고 신앙생활에 그대로 적용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는 오직 성령을 구하고, 교회 밖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을 순환적으로 이루어 갈 수 있다면, 예배의 성공자, 믿음의 성공자,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승천 하실 때 천사가 나타나,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전해 줍니다. 이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고, 우리 모두는 이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 하신 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성령 세례를 받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오직 성령을 구하라. 그리고 증인이 되어라” 마지막 남기신 말씀들을 기억하며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감람원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한 행동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행 1:14). 이 모습이 이 시대의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잊지 말고 지켜가야 하는 절대적 순종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올 한 해 마지막 주일에, 예수님의 마지막 행적을 보고, 들은 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새로운 다짐과 마음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첫째, 모이기에 힘쓰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오직 성령을 구하고, 성령 받은 대로 증언자(증거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모든 성도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같은 마음, 같은 생각, 같은 말, 같은 행동을 하며, 합심하여 기도에 힘쓰는 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승천하시기 전 마지막에 가르쳐 주신 세 가지, ① 모이고, ② 오직 성령을 구하고, ③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에 힘쓰는 일들이,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과, 우리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항상 우선이 되고, 습관이 되어 마지막 때를 잘 준비하여 가는 00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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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모이고, 성령을 구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는 일에 전심을 다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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