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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절] 감사와 성숙(시편 100:1)

본문

어떤 원주민(인디언 시아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이런 기도문을 드린다고 합니다.


여기 아이를 잠자리에 눕힙니다.


이아이가 생명을 주시는 어머니 대지를 알게 되길


선한 마음과 생각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길


가슴에서 좋은 말만 나오길


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어른으로 쑥쑥 자라길


그리하여 나이들어서는 모두의 존경을 받게 되길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 되길 빕니다.(황창연, 13)


평범하지만 위대한 기도문입니다. 생명의 무게를 알고, 선함을 희구하고, 끊임없이 성숙해나가고, 그리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으로 뭇사람의 존경을 받고,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은 2019년 11월 첫 번째 주일입니다. 한국교회, 개신교는 개체교회의 특성을 살릴 수 있도록 교단차원에서 강압적으로 하는 게 적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언제 지키느냐, 이것이 가장 교회별로 다를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10월 달에 드리기도 하고, 11월에 추수감사절을 준수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언제 지키느냐, 그것은 각 교회의 상황에 맞게 하면 되겠죠. 이런 유연성, 날짜의 유동성, 이런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과의 불일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기원을 구약성경의 3대절기 중 하나인 맥추절이나 초막절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만, 시기상으로는 잘 맞지 않습니다. 초막절이 그나마 추석이라는 우리명절과 날짜 비슷하긴 합니다만, 10월과 11월에 추수감사절을 드리는 한국교회 전통과는 거리가 있죠. 우리나라 기독교가 미국선교사에 의해 자리를 잡게 되었기에,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일자가 흡사하다고만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어찌되었건 날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알맹이, 내용입니다. 나라마다 혹은 민족마다 곡식을 수확한 후에 감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것을 신앙적 틀을 가지고 추수감사절을 드리는 종교단체들도 전세계에 존재할 것입니다.


한편, 주님은 말씀하셨죠,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고요. 인간은 주변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먹고 자라야 정서적으로 따뜻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지주, 영적 스승들을 모실 때, 우리는 돈이나 명예, 욕심이 아니라 가치와 보람,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분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 속에 있을 때, 우리의 영혼을 맑아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몸, 육체가 건실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빵이 필요합니다.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마셔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이토록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음식은 소중합니다. 하늘과 땅의 선물, 밭에서 나는 갖은 채소류와 각종 나무들에서 얻는 열매들 덕분에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는 까닭입니다. 당연한 사실이죠. 어느 민족이고, 어떤 종교이고, 모든 사람들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이유, 또한 추수감사절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연이 우리에게 음식이라는 선물을 제공하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떤 인문학자(도정일)는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온몸이 찢기고 패고 겁탈당한 자연에 감사하고,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계속될 생산의 죄와 자연의 희생을 보속하기 위해 치르는 공동체의 속죄의식”이 바로 추수감사절 축제라고요. 어쩌면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야 할 신앙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이것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만물에게 은혜를 받으며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이, 어찌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먹을거리, 그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점점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신명기 26장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신명기 26장입니다. 학자들은 신명기 12장부터 26장까지를 신명기법전으로 부릅니다. 그 본문들 안에 율법들이 집약되어 있는 까닭입니다. 레위기가 제사법만 기술한 반면, 신명기는 제사법은 물론이고 일반 사회법들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법의 내용이 참 광범위합니다. 우상숭배 금지, 십일조와 재정관리, 안식년, 재판관을 비롯해 지도자들을 위한 매뉴얼, 소유권 분쟁, 각종 범죄와 성윤리, 결혼과 사업에 관련된 규정들 등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21세기 오늘날 문자 의미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극단적으로 신명기 20장을 보면, 전쟁 중에 거침없이 약탈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안식년과 희년에 노예를 놓아주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노예제도를 긍정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니 먹지말라는 음식규례도 있는데, 오늘날 많은 한국사람들은 이 율법을 어기고 있지 않습니까. 삶의 양태가 2천년이나 더 지났으니, 이 오래된 법들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때론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게 해석입니다. 그 율법의 정신이 오늘날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지 질문하고, 오늘날의 실정에 맞게 재해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신명기 26장은 다른 규례들에 비한다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이야기로 짜여져 있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인 까닭에, 아무도 이 말씀을 반박하거나 의구심을 갖지 않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이집트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시켜주시고,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야웨 하나님께 감사하라, 특별히 새로 정착한 땅에서 수확한 첫 곡식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라는 규례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유정란과 예배학 1. 웃음


황창연 신부님은 “당신은 유정란인가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좋은 사람의 기준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똑같은 달걀인데, 유정란은 병아리가 태어나게 하고, 무정란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유정란 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요. 그는 유정란과 무정란을 구별하는 방법 4가지를 언급합니다. 이 4가지가 오늘 본문의 메시지를 잘 요약해주고 있어서 인용해보고자 합니다. 하나씩 소개해보겠습니다.


첫째, 웃느냐 웃지 않느냐. 양반문화가 잔재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무게를 잡고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곤 합니다. 저 역시 그러할 때가 많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일정이 빡빡하고 바빠서, 누군가에게 쫓기는 양 허덕이는 게 현대인들의 실상이 아닙니까. 해야 할 일이 많으면 마음이 분주해지고, 압박감과 긴장감 때문에 표정이 굳어집니다. 일상속에서 즐거움은 점점 휘발되어가고 있습니다. 급기야 실실 웃고 다니는 사람을 경계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리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의 얼굴은 푸석푸석 건조해지고 삭막해져갑니다.


기계는 웃지 못합니다. 인간만이 웃을 수 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도 있고,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웃는 것은 중요합니다. 분노, 두려움, 질투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숨겨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기쁨, 반가움, 놀라움, 감사함은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이 섭섭해하거나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김찬호, 유머니즘, 28)


신명기의 예배학,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가, 이 부분은 신명기 도처에서 수차례 반복되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11절에 그 내용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마지막 명령문, 동사에 주목합시다. 즐거워하라, 기뻐하라, 웃으라, 이것이죠. 신앙인은 웃어야 합니다. 즐거워해야 합니다.


유정란과 예배학 2. 감동


유정란과 무정란을 구별하는 두 번째 기준, 그것은 감동하느냐 감동하지 않느냐입니다. 어느 누가 감동받는 것을 싫어하겠습니까. 어떤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감동받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르르 녹고, 볼이 발그레해지는 경험,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지만 과열된 경쟁사회를 사느라 마음이 무뎌지고, 감정의 굳은살이 두꺼워진 현대인들이 감동받는 일은 현저히 줄었습니다. 감동할 준비를 하기보다는 화낼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게 우리의 실상이 아닌가 안타깝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고개를 숙여 핸드폰만 들여다봐서 그렇지,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까지 정화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도 그렇고, 산 위에서 탁 트인 세계를 구경하는 것도 상쾌한 일입니다. 탄성을 자아내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억하며 감동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의 족장시대, 요셉 때에 이집트로 내려가고, 거기서 후손들이 번성하나, 이집트사람들로부터 학대와 괴롭힘, 중노동을 강제당합니다. 고통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땅까지 허락해주십니다. 이 감동적인 역사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종살이 하던 우리들을 구원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감격과 희열, 감동이 일평생 지속되기는 어렵지만, 그 은혜를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유정란과 예배학 3. 나눔


세 번째 기준은, 나누느냐, 나누지 않느냐 입니다.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감동적인 사연이 있습니다. 홀로 어렵게 장사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한 어르신께서 한푼두푼 아껴 모은 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기부했다는 소식이 간헐적으로 보도됩니다. 아름다운 나눔입니다. 자기 이익을 좇지 않는 참사람의 모습을 그런 어르신에게서 엿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1장 1절부터 4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가진 게 많다고 나눌 수 있는 게 아님을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살림살이가 어려운 분들이 생활비를 쪼개고 또 쪼개서 나눔의 실천을 하고 계심 또한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특별히 신명기는 헌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 원칙을 제시합니다. 신명기 12장 18절과 19절입니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물론 성전을 유지하는 비용으로도 쓰여야겠지만, 본문에 의하면, 오늘날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인, 자녀, 노비를 위해 헌금이 사용되어야 합니다. 지역사회의 구성원들을 비롯해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죠. 교회는 자기 몸뚱아리를 불리는 것만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지역에 보탬이 되는, 이웃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유정란과 예배학 4. 감사


네 번째, 유정란과 무정란을 구별하는 마지막 지표는 감사입니다. 감사하느냐 감사하지 않느냐. 여기에 달렸습니다. 신앙인의 제1덕목은 단연 감사입니다. 우리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감사의 제목들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인생, 때로는 외롭고 힘들기도 하겠지만, 매일 매일이 기적처럼 주어졌다고 믿어봅시다. 그런 믿음을 품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사람으로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3절과 4절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성도, 주님의 발자취, 거룩한 길을 뒤따라 걷는 우리가 해야 할 말은 감사입니다.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 자기의 탐욕을 부추기거나 타인을 괴롭히는 말은 어떻게 해서든 틀어막고, 우리는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지는 길입니다.

뜬금없는 얘기지만, 아기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어떨까요. 올해 우리교회에 갓난 아기가 생기면서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습니다. 이전에도 교회분위기가 명랑했지만, 더 밝아졌습니다. 아기 덕분에 웃는 일이 몇 번 더 늘었음은 분명합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아기는 왜 웃을까요.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그렇죠. 아기를 보면서 웃지 않는 사람은 드뭅니다. “아이 예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아기를 쳐다봅니다. 아가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타인의 돌봄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만, 그 생명력으로부터 우리는 좋은 기운을 전달받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이 그토록 신비롭습니다. 손을 꼼지락거리고, 발차기를 하고, 연신 눈을 돌려 여기저기 쳐다보고, 그런 모습이 마냥 신기합니다.


아기를 바라보듯이, 타인들을 대한다면 어떨까요. 건강하게 또한 아름답게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본다면, 그의 존재를 있는 모습 그대로 긍정한다면, 우리 세상이 조금은 밝아지지 않겠습니까.


혼돈과 공허만 가득했던 곳에 주님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려는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하나님만이 참된 빛이 되십니다. <댕커스>의 저자 임효주 목사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계시의 힘을 제공한다.”(48) 감사하십시다. 감사해야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때, 세상 도처에 숨겨진 하나님의 암호를 풀어낼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이끌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을 찬미합시다. 가나안 땅을 허락하신, 먹을거리를 생산하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들을 살갑게 돌보는 것입니다. 신실한 예배자, 이웃을 섬기는 자로 성화되어가는 우리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주일 설교원고 설교문 /김포 장기동 운양동 지음교회 평화교회 / 신명기 26장 강해설교|작성자 here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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