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모자라지도 남지도(출 23:16)
본문
오늘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맥추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문자적 의미로, 맥추감사절은 보리를 추수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만, 오늘날에는 상반기, 그러니까 1월부터 6월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이 한 해 동안 주님께서 내려주신 은총을 상기한다는 의미에서, 맥추감사절은 추수감사절에 비해 조금 작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는 맥추절에 대한 메시지가 더 강하다는 점입니다. 엄밀히 말해, 추수감사절은 현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절기고요. 구약성서 관점에서 볼 때, 추수감사절은 맥추절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절기의 기원은 출애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정착하여 추수한 곡식들을 받아들고 제사를 드린 것, 그것이 맥추절의 시발점입니다. 출애굽기 23장 16절,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다음과 같이 계명을 주십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맥추절에 있어서 ‘감사’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농사를 통해 수확물을 얻는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곡식을 거둘 수 있는 것은, 농부들의 수고도 수반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늘이 내려주는 비와 햇살이 없어서는 불가능합니다. 때에 따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도우심 덕분에 우리는 먹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상기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날이 맥추절입니다.
한편, 또 다른 맥추절의 의미는, 출애굽이라는 정황context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집트에서 히브리백성들은 노예 살이를 했습니다. 삶의 터전은 있었지만, -고향이라 부를만한-자기 땅이 아니었죠. 실향민이자 종으로 살았던 것이죠. 그뿐만이 아니죠. 야웨 하나님의 은혜로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지만,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이어갑니다. 몽골의 유목민들은 유목생활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에 자유롭지만, 히브리 백성들에게 실향민/나그네 생활은 녹록치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집트나 이집트를 탈출해 유랑하는 시절 모두 다 난민이었던 것이죠.)
출애굽기 22장 21절,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를 읽다보면 반복되는 구절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주지 않았느냐, 네가 그 이집트에서 나그네였지 않았느냐, 나그네의 심정을 잘 알지 않느냐, 그걸 기억하면서 나그네를 돌보고 사랑하라, 야웨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들에게 이렇게 주문합니다. (출22:21, 23:9; 레19:34; 신10:19, 15:15, 23:7 등)
난민정책의 현주소
그렇지만, 사람이 간사한 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다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최근 한 변호사(정소연)가 쓴 칼럼을 읽었습니다.(“난민 신청인의 거짓말”) 그는 변호사가 된 첫 해에 난민 관련 사건을 여섯 번 맡게 되었는데, 다섯 번은 패소, 한번은 소취하를 했습니다.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특히 여섯 번째 난민신청자를 변호하는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 미심쩍다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 것이죠.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그것이 거짓말임을 확인했고, 화를 참을 수는 있었지만 난민신청을 철회하고 출국하라고 청했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쓴 칼럼 내용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브로커에게 전재산을 바쳐서 –분쟁으로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 자기네 나라를 빠져나왔는데,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탈출’인데, 그 나라가 난민 인정이 1%대에 그치는 한국 땅이라면, 그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불안했을까? 라고 반문하며 이렇게 덧붙입니다.
“어쩌면 그때 그 거짓말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중요한 거짓말을 할 수조차 없는 삶이 있다는 것을, 내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고.”
또 생각해봅시다. 한국사회가 오랫동안 동경해온 나라는 미국이지 않습니까. 미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이주민들의 나라’, ‘기회의 나라’, 이런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나라입니다. 햄버거가 주식인데, 이것 역시 흥미롭습니다. 햄버거에는 고기 패티가 들어가지 않습니까. 과거엔 안심, 등심 같은 부위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만 먹을 수 있었고, 어깨 부위 상치고기는 중류층이, 가난한 자는 복막이나 주워 먹었다고 하죠. 이에 저항하듯, 유럽의 계급제도에서 탈출하여 평등을 기치로 걸고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고기의 모든 부위를 아무렇게나 섞어서 다져만든 고기 패티로 햄버거를 먹었습니다.(참조. <아메리카 기행>, 312) 그렇게 수많은 문화들이 공존하고 공생하고 있는 게 미국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새 미국은 백인우월주의를 기치로 걸고, 이주민들의 유입을 막고 급기야는 정착하려는 외지인들을 추방하는 추세입니다. 난민보호협정에도 탈퇴를 한지 벌써 오래되었죠. 이런 분위기마저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흉내 내려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참된 종교와 환대
테러를 일으키며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근본주의적 종교, 문화, 관습), 분명 나쁜 짓입니다. 맘카페를 중심으로 “불법난민으로 망한 유럽, 왜 한국이 따라가는가?”라고 배타성 짙은 선전propaganda이 넘쳐난다죠. 이것 역시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타인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혐오와 배제를 조장하는 종교가 가장 위험합니다. 그것은 거짓종교입니다. “비용을 따지고, 그들이 초래할지도 모를 혼란을 미리 예단하며 그들을 배척하는 것”은 종교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김기석 설교 2018.6.24) UN난민홍보대사인 배우 정우성 님이 반문했듯이, “타인종 타민족 (타종교)를 배타적으로 대하면서 어떻게 우리 아이에게 '너는 세상을 사랑해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종교는 어떠해야 합니까. 증오하고 미워하기보다 있는 모습 그대로 긍정하고 수용/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주요 정신 중 하나는 ‘환대’입니다. 기독교의 정신 중 하나는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전적 의미는, 낯선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대접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정서, 관습과 닮은 데가 있죠. 나그네를 반갑게 맞이한다는 것, 과거에는 없는 형편 속에서도 손님처럼 나그네들에게 밥 한 끼 해주었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요즘도 품이 넉넉한 사람들은 집으로 이웃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합니다. 정수기 필터를 교체하거나 택배를 배송하려는 목적으로 가가호호 방문하는 노동자들에게 물이라도 한 잔 드리려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고무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환대의 전통을 끝끝내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헌금원칙: 1. 자발성 2.균등, 필요에 따른 분배 그리고 품앗이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8장은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마 이 서신을 쓰기 1년 전부터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이어오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고린도지역은 무역이 활발하고 경제적인 수준은 남달랐습니다. 고린도교회 교우들의 살림살이는 꽤 풍족하고 넉넉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로마제국의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에서의 신자들은 로마의 식민지 치하에서 빈곤으로 허덕이는 유대인들이 절대다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그렇게 물질적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급기야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고 있다고 추켜세웁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알 수 있는 헌금의 원칙은 ‘기꺼운 마음’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 말입니다. 구약성경 제사에 대한 규정에서도 반복되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뜻이죠. 맥추절 추수와 관련된 대목을 소개해봅니다. 신명기 12장 7절입니다.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오늘날 부족한 것은 재화가 아니라, 나누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광야에서 유리했던 출애굽 공동체의 모습, 만나와 메추라기를 나누어 먹던 장면을 상기시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5절입니다.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출애굽기 16장 18절 말씀을 인용한 것이죠. 거의 같은 의미이긴 한데요. 출애굽기 16장 18절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남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남은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고, 욕심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 상호부조, 품앗이,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경제원리가 아닐까요.
해야 하기 때문에: 난민에게 편지쓰기
앞서 구약시대의 예배는 “즐거워하는 것”이라면서 신명기 말씀을 언급했는데요. 몇 개 구절 더 읽어보고 싶습니다. 신명기 16장 9절 이하인데요. 맥추절을 칠칠절로 부르기도 함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일곱 주를 셀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 날부터 일곱 주를 세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특히 11절, 노예, 나그네, 고아, 과부, 이런 밑바닥 계층, 소외당하는 이들과 함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어제는 도서관 어린이독서회에서 전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그림책들을 몇 권 나누고 왔습니다. 전쟁고아들의 글과 그림을 읽어보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독후활동을 진행했는데요. 한 학생이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안녕? 르네야 난 제희라고 해. 르네야 그동안 전쟁 때문에 외롭고 심심하고 힘들었겠다. 전쟁 때문에 집이 무너져서 살 집도 없네. 나랑 같이 살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으니까 많이 아쉽네. 엄마 아빠도 없어서 많이 외롭지? 앞으로는 내가 힘이 되어주고 파이팅 하고 응원할게. (후략)”
이 글을 읽고 제가 다시 그 초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되물었습니다. “진짜 이런 피난민들과 같이 한집에서 살 수 있겠어?” “그럼요.” 아이는 흔들림도,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경청해야 합니다. 순진하다고 어리다고 아직 치안을 모른다고 해서 아이들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이런 말을 했다죠.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기에,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할 일이 있다고, 더 나아가 주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기에, 어떤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3년 전, 터키 보드룸 해변에서 만 3세의 아이,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발견되었고, 전 세계인들의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어쩌면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의 모습으로, 아일란 쿠르디의 모습으로,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 대하기 불편한 사람, 내가 경멸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자선을 나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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