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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위에 은혜러라

본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장 14-16절)




 


오늘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참 기쁜 날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은 사실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아주 작은 시골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것도 가축들이 먹이를 먹는 구유(여물통)에 누이셨다고 하니, 동네사람 그 어느 누구도 아기 예수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음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우리 구주 아기 예수님은 뭇 천사들과 경건한 사람들의 찬양과 영광과 경배를 받으며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의 기록에 의하면, 들판에 있던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서,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0-11,13) 라고 큰 소리로 합창을 했습니다.


 


천사들의 찬양을 들은 들판의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가 영광을 돌렸고, 동방 박사들은 예물을 들고 머나먼 타국에서 찾아와 왕되신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고,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 이라는 사람은 아기 예수님을 직접 품에 안고 “내가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배하신 것이요”라고 성전에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또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밤낮 금식과 기도를 하고 있던 안나라는 여든 네살 된 여 선지자(예언자)는 아기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속량(구원) 할 것(구원자-메시아라는)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이 기쁜 날에 우리모두의 마음과 입술에서도, 천사들, 목자들, 시므온, 안나, 동방박사들의 찬양과 경배에 못지 않은 최고의 찬양과 경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오늘 성탄 예배의 시간에, 낮은 자리로 겸손하게 내려 오신 아기 예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시기를 바라고,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빛, 생명의 빛, 치유와 회복의 빛, 응답과 소망의 빛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임하시는 복되고 거룩한 성탄일이 되시기를 축복하고 축원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보면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25)고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에서는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2:7)고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복음, 요한 복음에서는 탄생장면이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장면 묘사는 두 개의 복음서에서 단 두 구절로 아주 짧게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너무 짧게 기록되었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아주 독특한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 줍니다, 그 기록이 요한복음 1장 1~18절의 내용입니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이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라고 기록했으면 누구나 다 알기 쉬울 터인데,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는 신선하고도 기이하기까지한 탄생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함께 1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멘.


 


이 말씀에, “예수님”, “탄생”, “구원자” 이런 표현이 있습니까? 하나도 들어가 있지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의 구원자 아기 예수님의 거룩하신 탄생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주 놀랍고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표현입니다. 말씀,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성경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말씀은 곧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왜 요한은 ‘말씀’이라는 어려운 말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한 것일까요?


 


‘말씀’이라는 헬라어는 ‘로고스’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철학에서 다양하게 사용하는 단어 였습니다. 기본적인 뜻으로는 ‘이성, 생각, 판단, 정의, 사고능력, 인간정신...’등 다양한 분야에서 언급되는 단어입니다. 금욕과 극기를 주장했던 ‘스토아학파’라는 철학파 집단은 로고스에 대해 정의하기를, ‘우주 만물을 합목적적(合目的的, 일정한 목적에 들어맞아 적합한 것)으로 지배하는 법칙’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요한이 이런 철학적 용어인 ‘로고스(말씀)’용어를 취하여 예수님을 설명한 이유는, 인간과 하나님을 연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에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야,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어” 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했었다면, 지금 시대에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겠지만, 2천년 전 당시의 신학의 발전상황에서는 도저히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제였습니다.


 


이렀듯 초기 교회 시대의 험난한 선교상황을 고려하여 인간이 평소에 쉽게, 편하게 사용되었던 ‘말씀’이라는 용어로 예수님을 치환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만드러진 것은 매우 시의 적절하며, 사도 요한을 통한 성령의 강력한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다가가, “나 이거좀 해줘, 나 돈 얼마 빌려줘, 나 이거 무조건 할거니까 말리지마” 이런식으로 무턱대고 말하는 것보다,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충분한 협조를 구하고, 성과에 대한 충분한 보상과 감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면 일이 잘 풀리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과 비 신앙인들이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한 최고의 접촉점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말씀’으로 표현되고,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만개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학도 많이 발전하고 연구 되어서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말씀=예수님, 예수님=하나님, 이라는 등식은 많은 학습과 성령의 감동으로 이미 충분히 설명되어졌고, 또한 믿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요한 사도가 내세우는 ‘말씀(로고스)’이, 현재의 내 믿음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또한, 오늘 이 기쁜 성탄절을 맞이하여, 내가 어떤 의미로 이 말씀과 거룩한 접촉을 하여야 하는지를 깨달으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제가 세 가지 믿음의 점검사항을 들려드립니다. 잘 들으시고, 성령이 주시는 깨달음의 감동대로 잘 순종하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시고, 복음의 기쁜 소식이 되시는 아기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직접 선택하시고, 나를 직접 만나시려, 나의 마음에 찾아오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먼저 요한복음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1절에서‘ 태초’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우주만물이 창조 된 시접이 아니라, 그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상태를 ‘영원’이다라고 표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제가 ‘태초’를-->‘영원’으로, ‘말씀’을-->‘예수님’ 이라는 단어로 치환해서 읽어 드립니다.


 


“태초(영원전 혹은 영원부터)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너무나 선명해졌죠. 말씀이신 예수님은 영원전부터 계셨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중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 사실을 처음 듣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그런데 비 신앙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신앙인들 조차도 이 말씀 한 구절을 지키지 못해 이단과 사이비에 빠지고, 말도 안되는 신비주의에 이끌려 다닙니다.


 


안상홍이 남자 하나님, 장길자가 여자 하나님이라는 이런 해괴한 주장에도 넘어가 버리는 이유도, 이만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덧입혀진 참 목자이며, 성령이신 보혜사라는 이런 참람한 거짓 주장에 획획 넘어가는 이유도, 다 이 한 구절을 제대로 깨닫고,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예수님=하나님’이 하나의 등식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예수님=하나님’이 나를 콕 집어 선택하시고, 나를 만나시려고, 내 마음으로 직진해서 오신 날이 성탄절 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나 때문에, 나를 만나시려고 만들어진 날이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당연히 예수님 이시지만, 또 하나의 주인공이 어누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이게 진짜로 믿어지면, 정말 감격해서, 감동해서 눈물이 안 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진짜 보잘 것 없는데, 내가 뭐라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시려는 약속을 잡으셨습니까? 하나님이 한가한 분도 아니신데 왜 굳이 나를 만나려 직접 찾아오십니까?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나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을 현실로 인식하게 되면 기가막히고, 코가막히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그 감동, 그 감격이 내 마음에 충만하게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거룩하신 말씀이신 예수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된 성탄절에 00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나를 택하시고, 나를 만나주시려고, 나의 마음에 찾아오셨다”는 성령의 감동과 감격이 충만하게 채워지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만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우리 구주 아기 예수님께 무한한 경배로 영광 돌리시는 거룩한 만남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우리 예수님과 영원토록 함께 거주하십시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이 인간(뼈와 살이 있는 욱체)이 되었다는 것으로 쉽게 이해 되실 겁니다. ‘육신(육체)’라는 원어(사륵스)의 뜻은 영혼과 대비되는 인간의 외적인 모습,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한계를 지닌 인간의 연약성을 뜻합니다. 무소불위, 전지전능, 영원무궁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렇게 한계를 지닌 한낱 피조물의 형체를 입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충격적인 사실인지 아십니까?


 


성육신 하신 사건은 인간의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경천동지, 천지개벽 이런 말로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는 신학공부하면서 이 말씀이 조금은 이해되고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큰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당시의 저의 이해의 정도로는, 우주 만물이 천만번쯤 생성, 소멸이 된 것 보다 훨씬 더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지금도 좀 고민하며 생각해 보면 머리가 띵 합니다. 성육신 사건은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절대적인 선택과 결정입니다.


 


이해하기는 불가하니 그냥 접어 두더라도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까요? 굳이 인간의 몸을 취하셔야만 했을만한 타당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뒤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 ‘거하신다(헬-에스케노센, 영- dwelling)’는 뜻은, 천막을 치고 야영한다는 의미로, 마치 구약의 하나님이 성막에서 모세를 만났던 것을 떠올립니다.


 


오랫동안, 아니 영원토록 함께 머물러 있으려고 작정하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눈에 보이고, 대화가 가능하고, 인간과 똑 같이 행동하면서, 24시간 함께 나와 붙어 살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누구랑 살기 위해서요? 네 맞습니다. 나랑 함께 살기 위해서, 내 마음의 집에 거주하시기 위해서, 거주지를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옮기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 내 마음의 집에 거주하시려 하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성탄절은 내 마음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는 시간입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거주 하였으면서도, 오랜 시간 혼자 계시도록 무관심 했다면, 얼른 내 시선에 보이도록 모셔와야 합니다. 그동안 못했던 쌓아놓은 이야기들을 서로 풀어놓아야 합니다.


 


00의 모든 성도들은, 이 번 성탄절을 기점으로, 나와 함께 거주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홀로 외롭게 하지 마십시오. 항상 내 마음에 거주하고 계신 나의 예수님, 나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언제나 부르시고, 찾으시고,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계속 하십시오. 말씀으 육싱이 되어 여러분의 마음에 거주하고 계시는 예수님과 동행하시며 평안과 건강의 은혜가 날마나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은 은혜위에 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14절 후반부에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이 은혜와 진리는 보관용이 아니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려는 선물입니다. 16절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했습니다. “은혜위에 은혜러라”, 은혜를 두 번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은혜가 선물로 주어질 때는, 끊임없는 은혜, 차고 넘치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 중단 되지 않고 무한정 지속 되는 은혜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위에 은혜를 선물로 받게되는 복되고 복된 날입니다. 우리 주님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위에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 00교회 모든 성도는, 은혜위에 은혜를 받는 선물의 주인공들이 되셔서, 남은 험한 인생의 길을 건강하고 평안하게 거뜬히 헤쳐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다른 것 다 제쳐두고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 은혜위에 은혜가 부어지는 기쁨의 날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15절 말씀으로 보면서 성탄절 말씀을 맺겠습니다. 15절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신앙고백을 하는 내용입니다. 뭐라고 햇습니까? “예수님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시지만 나보다 먼저 계시고 나보더 앞선 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앞세우는 신앙, 이것이야말로 성탄의 복을 받고 은혜를 누린 성도들이 꼭 드려야 하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들은 앞으로의 인생길에서 항상 예수님을 앞세우고, 높여드리고, 존중해 드리며 살아가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우리 예수님이, 여러분의 믿음안에, 소망안에, 삶의 현장 위에 항상 앞서서 먼저 계시고, 위로와 평안으로 항상 함께 하여주시고, 지치고 힘든 인생 길에서 항상 은혜위에 은혜를 부어주시는 영원한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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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말씀이신 예수님,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저희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고, 은혜위에 은혜를 선물로 내려 주시니 감사와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항상 동행하고, 항상 거주하며 살아가는 성탄의 주인공들이 되게하여 하옵소서. 말씀과 은혜로 인도하여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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