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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고난]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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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마가복음 14장 66-72절)



 


사순절이 이제 두 주 남았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사순절 남은 기간에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기억하며, 인내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잘 해 나가시리라 믿습니다. 종려주일과 고난 주간을 지나면서, 점점 십자가 은혜와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게 임하셔서, 부활 영광의 첫 열매가 되시는 우리 주님과 감동적인 만남의 시간을 맞이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12명의 제자 중에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3명의 제자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 중에서 베드로는 이른 바 “수(首)제자”로 불려 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중의 가장 중추적인 인물인 베드로가 제일 감추고 싶은 자신만의 이야기, 소위, 흑역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배반한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을 본문 그대로 살펴 보면


 


첫 번째 부인,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6),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67)


두 번째 부인, “이 사람은 그 도당(예수님의 무리)이라”(69),


“또 부인 하더라”(70)


세 번째 부인,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70),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71)


 


한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 했습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 “저주하며 맹세하되” 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한 것으로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 부분은 영어 성경을 보면 명확합니다. NIV 성경은 “He began to call down curses on himself, and he swore to them, 'I don't know this man you're talking about.”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주의 대상이 “on himself”, 자기 자신인 베드로 본인 이라고 분명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상황을 제일 잘 번역한 것이 현대인의 성경인데요. “베드로는 만일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이 사람을 정말 모릅니다”라고 햐였습니다. “저주하고 맹세 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거친 말을 하면서,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한다면 천 벌을 받을 것이요, 진짜 천 벌을 내리는 하늘을 두고 맹세합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못 알고 계셨던 분들은 앞으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어쨌든, 얼마나 급했으면, 자기 자신을 저주하면서, 그 무서운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맹세까지 해가며 예수님을 부인했겠습니까?. 이 모습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극한의 상황에서는 살고 싶은 욕망이 가장 우선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거의 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 했을 겁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더욱 슬퍼집니다.


 


이 사건 있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14:27) 라는 말씀 하셨고, 이에 베드로가 나서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14:29)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14:30) 라고 하셨고, 이에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14:31)라고 말합니다.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은 베드로 혼자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제자도 그렇게 대답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뿐 만 아니라, 야고보나, 요한 같은 다른 어떤 제자가 거기에 있었다고 하여도, 죽어도 부인하지 않겠다는 몇 시간전의 결의에 찬 대답은 다 잊어버리고, 철저하게 예수님을 부인하기는 마찬가지 였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이야기는 베드로의 부인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의 이야기이고, 또한 오늘 날 믿음으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나눌 때에, 나는 과연 세 번 부인하는 현장에서 어떻게 대답했을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을까요? 그가 목격자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혀가서 대 제사장 앞에서 어떤 모욕과 치욕을 당하는지 똑똑히 본 목격자였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예수님이 대 제사장 앞에 섰을 때 이미 예수님의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 멍이 들고 퉁퉁 부어 올라 있었습니다. 병졸들이 예수님을 짐승처럼 끌고 오면서, 얼굴이며 몸이며 무지막지하게 마구 폭행하는 장면을 베드로는 실시간 라이브로 목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공회(산헤드린공회)앞에 선 예수님은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으로 치는 사람, 손 바닥으로 치는 사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마구 잡이로 예수님을 폭행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네가 선지자 노릇 하려면, 누가 때렸는지 한 번 맞춰 봐라”(마 26:68)라고 희롱했습니다.


 


이렇게, 온갖 모욕적인 상황이 연출되는 광경을 베드로는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자기도 붙잡히게되면 저렇게 험한 꼴을 당할 것을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 왔습니다. 그렇게 신적인 능력을 많이 보여주신 예수님이 그토록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이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 끔찍한 모든 장면을 목격한 베드로가 내린 선택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 모든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무턱대고 예수님을 시인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무모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의 어느 사모님이 이러한 말씀을 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나는 주기철 목사님 영화의 고문 장면을 도저히 보기도, 듣기도 매우 힘들다. 나는 겁이 너무 많다. 만약 실제로 일제의 군인들이나, 공산국가의 군인들이 나를 위협하고, 고문하려 한다면, 고문 당하기는커녕, 한 대 얻어 맞기 전에 예수님을 부인 할 것 같다. 나는 죽는 것이 무섭기 전에, 이미 주먹으로 얻어 맞고, 치욕을 당하는 것을 도저히 견뎌낼 자신이 없다. 나에게 나쁜 상황이 닥쳐오면 제일 먼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내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잇기 때문에, 그러한 내 자신의 연약함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예수님 앞에 죄송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진짜 그 상황이 오면 나는 예수님을 부인하고야 말겠지.....”


 


이렇게 말씀 하시고 한 숨을 푹 내쉬던 모습이 기억에 떠 오릅니다. 참 현실감 있는 자기 고백 아닙니까? 누가 이 분의 고백을 못났다고, 믿음 없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정말 자기 자신이 죽도록 예수님께 충성하고, 죽기까지 그 분만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자신도 한 순간에 그렇게 무너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믿음은 평안할 때 검증 되지 않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올 때 진짜 믿음과 가짜 믿음, 굳센 믿음과 약한 믿음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해서 누가 그에게 손가락질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다 베드로와 같이 행동 했을 겁니다. 왜요?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침 밷음 당하지 않고, 주먹으로, 손 바닥으로 마구 폭행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기 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던 수 제자 베드로도 불과 몇 시간 만에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망합니다.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사역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이러했던 베드로가, 결국 부활 신앙으로 무장한 후에, 거침 없이 복음을 위해 순교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변개하지 않는 믿음, 상황에 따라 부인 되지 않는 믿음, 죽음도 두렵지 않은 믿음이란, 오직 부활 소망으로 철저하게 채워진 믿음 뿐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사건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충만한 믿음은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요즘 세상밖의 삶의 현장으로 나아갔을 때, 어떤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까? 교회가 온갖 욕을 먹는 집단이 되고, 목사가 혐오의 대상이 되고, 예수님의 이름이 더렵혀지고, 교회 다니는 성도들이 기피 대상 1순위가 되어버렸습니다. 2천년 전 공회 앞에 서신 예수님이 치욕과 모욕을 당하셨듯이,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비난과 매도를 당하며 뭇매를 맞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우리가 이러한 현장을 바라보는 목격자들입니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언의 말씀 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듯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겪고 있는 이 어려운 현장을 목격하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이 뭇매 맞는 것을 싫어하면서 또 다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선택과 행동을 할 것입니다. 이 때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 때문에, 욕 먹고, 무시 당하고, 비난 받고, 불이익 당하고, 심지어는 생계의 위협이 온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선택하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당당하게 예수님을 시인하실 자신이 있습니까?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의 베드로가 아닙니다. 부활 소망으로 가득찬 믿음의 군사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영적 군사입니다. 상황이 어려워지고, 신앙의 환경이 점점 암울해 갈 지라도, 절대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선택하신 우리 주님의 고귀한 순종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은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에게 말씀했던 교훈을 들려 주시면서, “너희 00교회 모든 나의 자녀들은 나를 세 번 시인하리라”, 이 은혜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00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참혹하게 고난을 당하신 우리 주님을 기억하시면서, 더욱 더 예수님을 시인하고, 자랑하고, 드러내고, 전하는 일에, 진정으로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강한 믿음의 용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심경은 복작했을 겁니다. 부활 하신 예수님을 보고 기쁜 마음 한 켠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과거의 기억 때문에, 얼굴 들어 예수님을 쳐다 보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의 짐을 안고 있는 베드로를 어떻게 상대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서, 부활 하신 예수님은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시고, 그 물고기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 현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세 번 말씀 하십니다. 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②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③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째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근심하면서 대답을 하였는데,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근심은 아마도 세 번 부인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 때문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시시 때때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멀리하고, 버리고, 심지어는 배반 하기까지 합니다. 무관심은 그냥 일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 한사람을 상대 하시기를,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불러 주십니다. 부인 했는데, 징계하시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아마 노골적으로 부인하고, 격렬하게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가실 분이 우리 주님 이십니다.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분들 중에 제가 가장 많이 예수님에게서 도망치고, 베반하고, 버리고, 멀리한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 앞에 가장 많이 엎드려야 하는 지목의 대상이 되었나 봅니다.


 


사순절은, 바로 우리 주님이 사랑을 가지고 우리 곁으로 오시는 기간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사랑하지도 못하고, 맡겨진 직분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지도 못하고, 전도도 하지 못했어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 오십니다. 기본이라고 하는 예배, 기도, 말씀, 찬양, 감사가 다 중단된 상황일지라도, 우리 주님은 여전히 환환 웃음을 지으시면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 하신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단다” 들려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사랑은 세 번 부인 당하신 것을 사랑으로 바꾸어 주시는 놀랍고 위대한 사랑이십니다.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이미 우리가 얼마 만큼 주님을 부인할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우리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나를, 우리 교회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순절 남은 기간 동안 베드로의 심정으로 심히 고민하면서, 지난 날 세 번 우리 주님을 부인했던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씀 하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런 후에 부활의 소망을 가득 받아서, 내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마음껏 올려 드리십시오. 그것이 시인하는 자의 믿음이요 자세입니다.


 


우리 주님은 12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말씀 하셨습니다. 무섭고도 엄한 말씀입니다. 사순절은 부인했던 삶을 시인하는 삶으로 회복하는 믿음의 재 충전 기간입니다.


 


00교회 모든 성도가, 세 번 주님을 부한 베드로의 마음으로 통곡하고, 참회하는 가운데, 사랑으로, 부활 영광의 소망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시는 우리 주님과 기쁜 만남을 잘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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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희생을 하셨는데, 저희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오히려 부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굳건한 부활신앙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랑 주시고, 믿음으로 굳세게 하시는,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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