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울음을 그치게 하는 부활의 능력
본문
울음을 그치게 하는 부활의 능력
요한복음 20:11-18
오늘은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을 지난 주 한 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부활주일은 오늘을 포함하여 6주 동안 더 계속됩니다.
주님의 부활과 성령께서 강림하시기까지 50일이 걸린 것을 기념하여 부활절을 7주 동안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봤던 마가복음 16장 1절부터 8절까지와 오늘의 본문을 종합하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두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무덤을 찾았을 때 여자들의 염려와 달리 무덤문은 이미 열려 있었고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전해 주면서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여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여 제자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가 그들과 함께 무덤으로 갔는지 아니면 혼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무덤으로 갑니다.
무덤에 도착한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못합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던 마리아는 다시 무덤 안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봅니다.
그때 안에 있던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고 합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하고 뒤를 돌아볼 때 예수께서 서 계셨지만 마리아는 그 분이 부활하신 주님임을 알지 못하는데 주님이 먼저 마리아에게 말을 붙입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합니다.
이러한 대화를 보면 마리아는 시체가 없어진 빈 무덤을 보고 천사가 말한 것을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니까 그의 관심은 온통 시신이 없어진 것에 쏠려 있었습니다.
삼일 전 무덤에 장사 지낸 사랑하는 선생님의 시신이 없어졌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안타깝겠습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마리아는 슬피 울며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리아에 대해서 4번이나 울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시신의 실종사건은 마리아를 심히 슬프게 만들었고 눈물을 감출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천사와 부활하신 주님이 똑같이 질문을 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천사나 주님은 이미 부활의 사실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 부활하셨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울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울 이유가 없었는데 우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왜 우느냐?’ 는 말씀은 부활을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여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안타까운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부활절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여러분의 슬픔과 아픔과 눈물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아프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많은 일들이 생겨납니다.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의 ‘호흡’이라는 희곡이 있는데요,
막이 오르면 쓰레기가 잔뜩 어질러져 있는 무대가 등장합니다.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연극은 아기의 첫 울음 소리로 시작하여 한 노인의 임종의 헐떡거림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서 베케트가 말하고자 한 요지는 인생은 허무하고, 존재는 덧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슬픔과 눈물과 아픔의 연속입니다.
이런 인생 속에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가로 막고 있는 수많은 아픔과 눈물과 슬픔을 이기고 기뻐 찬양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이 되는 줄 믿습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신학자인 C. S. 루이스는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아내가 슬픔을 이겨 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 계시고 아내는 여전히 ‘그 하나님 품 안에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루이스의 아내는 임종 때 이렇게 고백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루이스는 아내와 자신이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을 때 주어진 ‘예기치 못한 기쁨’이 인생의 가장 슬픈 순간에도 떠나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 준 기쁨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삶을 위해 다시 사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 새 삶을 주고자 다시 사셔서 그분의 영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기쁘게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갈 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눈물과 슬픔과 아픔을 이겨내고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어내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울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어찌하여 우느냐? 왜 우느냐?’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먼저, 울을 필요가 없는데 왜 우느냐? 는 뜻입니다.
사실 주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는데, 그렇다면 마리아가 울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기뻐하면 기뻐하였지 울 필요가 없었는데 마리아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마리아가 주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하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4:13)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주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 사이에 죽은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도들은 이 죽은 사람들이 재림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하였습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자는 자들에 대하여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재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슬퍼할 이유가 없는데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지 못하면 이렇게 슬퍼할 수 있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기에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사실을 알고 믿을 수 있으면 우리는 울지 않고 슬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화여대 총장을 지내고 교육가로서 한국 여성들을 위하여 큰 공헌을 했던 김활란 박사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유언하였습니다.
“내가 죽거든 장례식 대신에 더 풍성한 생명의 길로 환송해주는 환송예배를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거기에 적합하게 모든 승리와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가 되기를 원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모실 때에, 그의 유언에 따라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웅장한 환송음악회를 열어 장례식을 대신하였습니다.
이 분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알았습니다.
죽으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고 기뻐하고 축하받을 일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며 우리는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생의 삶을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 부활의 사실을 여러분 꼭 아시고 믿으시고 마리아와 같이 슬퍼하거나 울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서 눈물을 거두게 하시고 슬픔을 거두게 하십니다.
두 번째로, 시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 아닌데 왜 우느냐? 는 뜻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슬피 울고 있었던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부활의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마리아의 관심은 온통 없어진 예수님의 시신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아버지 장례를 모시고 삼우제때 산소에 가 보니 산소가 파 헤쳐졌고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면 여러분, 얼마나 황당하고 걱정이 되겠습니까?
그런 일이 만약 조선시대에 일어났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마리아가 그런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마리아가 슬퍼하여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었던 것은 주님의 시신은 없어지거나 누가 다른 데로 옮겨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천사와 부활하신 주님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다른 데로 옮겨진 것이라면 정말 우리는 안타깝게 울고 그 시체를 찾아서 무덤을 잘 만들어놓고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의 마지막 본분이고 마지막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님의 시체가 다른 데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것이기에 우리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하였고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고
우리가 거짓 증인이 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고전15장)
당시에 헛된 소문처럼 제자들이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을 했다면 우리는 정말 원통해하고 울어야 합니다.
거짓 소문에 따라 헛된 신앙생활을 하고 우리의 믿음이 완전히 헛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고 안타까워하고 원통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시체가 옮겨진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을 비아 돌로로사라고 하는데 그 마지막 14번째 지점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입니다.
여기는 주님께서 돌아가신 곳일 뿐 아니라 장사되시고 부활하신 곳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장소에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는데, 성묘교회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있던 곳인데 그 곳에는 시신이 없습니다. 빈 무덤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다고 울고 안타까워하는 종교가 어닙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고 슬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다른 종교의 교주처럼 무덤이 크지 않고 화려하지 않다고 슬퍼하거나 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무덤이 비어 있기에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무덤이 비어 있기에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고 거짓증인이 되지 않고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세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데 왜 우느냐? 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부활의 사실을 전혀 믿지 못하였고 또한 시신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슬픔에 사로잡혀 그 분이 주님이심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알려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마리아야’ 부르시고 비로소 그 분이 동산지기가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믿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슬피 울고 있는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죽은 자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살아계신 분이시기에 그 분을 만날 수 있고 그 분과 대화할 수 있고 그 분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분과는 영원히 이별이 되지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울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줄 믿습니다.
역사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 분이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의 삶을 축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의 삶을 마치지 않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지금도 살아계시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비록 힘들고 어렵고 눈물이 마르지 않을지라도 지금도 살아계시는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울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여자여 왜 우느냐?’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울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의 시신이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기에 울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에 울지 않아도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202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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