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자 예수(눅 4:18-19) 사도신경 강해
본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일은 우리 나라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광복절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지 어언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그 날의 감격을 기억하는 분들의 숫자도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 날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아니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해방이 되던 그 날에 모든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서, 급히 만든 태극기를 들고 마구 흔들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던 일본 헌병과 경찰, 일본의 앞잡이들은 혼을 잃고 도망쳐 버렸고, 경찰서와 일본 신을 섬기던 신사(神社)는 박살이 났습니다. 그때 우리 조상들은 감격하여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삼천리 강산에 새봄이 오는 날, 우리의 앞뜰에 무궁화 피었네. 동포여, 동포여, 이날을 잊지를 말자. 영원히 자유를 길이 누리세."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 "이라고 시작하는 6.25의 노래처럼 피비린내가 나던 6.25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일제의 압박과 서러움에서 해방되던 광복절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를 괴롭히던 사람들은 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고, 용서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날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실로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점점 우리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의 감격도 날로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잊을 수 있어도, 그 때 그 사람들은 잊을 수 있어도, 일제로부터 당한 온갖 압제와 수탈은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손들이 아무리 듣기 싫어해도, 대대로 이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손들이 다시는 남의 나라의 종살이를 하지 않도록 계속 알려주어야 합니다. 일제 시대에 젊은 청년들이 강제로 징병되어 총알받이로 죽어갔다는 사실, 젊은 여성들이 위안부, 정신대로 끌려갔다는 사실, 장년들이 '보국대'라는 이름으로 탄광과 노동현장으로 끌려갔던 사실,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애써 지은 농사를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다 빼앗기고 초근목피로 연명했다는 사실 등을 소상히 알려 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과 조상이 물려준 소중한 우리 몸을 생체 실험 대상으로 삼아 찢고 죽인 일제의 만행도 똑똑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점점 유약해지고 철이 없어지는 우리 자손들이 이처럼 몸서리치는 고통을 겪지 않으려고 스스로 몸부림을 칠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모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종살이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히 종살이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도 밥처럼, 아니 공기처럼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동안은 숨을 안 쉴 수 있고, 잠깐 동안은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기가 희박하거나 완전히 사라지면, 인간은 질식하게 되고 결국 죽게 됩니다. 자유도 마찬가집니다. 잠깐 동안은 자유가 없이 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영원히 자유를 잃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미국에 노예로 팔려와 종살이와 차별을 당하던 흑인들은 "오, 자유, 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지금 나는 얽매였으나, 나는 돌아가리라. 자유 주신 주님께"라고 외쳤습니다 .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해방자 예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는 까닭은 오늘이 바로 '해방기념주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설교 제목은 지금까지 제가 주일마다 설교해온 '사도신경'의 순서와 우연히 일치합니다. 오늘 저는 "사도신경이 예수를 왜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지"를 말씀드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오늘날까지 왜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까? 아니 우리들은 왜 지금까지 계속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까?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이제는 '예수'라는 성에 붙은 이름처럼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이름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라는 이름에는 뭔가 특별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인간 예수의 특별한 사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해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려고 예수를 보내셨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예수', 유대인 '예수'가 우리를 도우시려고 오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처럼 '예수'라는 이름도 그 당시에는 매우 흔한 이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헬라어로는 '예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은 인간 '예수'가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분,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아'라는 말을 헬라어로 옮긴 말입니다. '메시아'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누가 기름부음을 받았습니까?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임명을 받을 때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예수'가 '그리스도', '메시아'가 되신다는 말은 그가 바로 오늘 지금도 우리의 왕, 우리의 제사장, 우리의 선지자(예언자)가 되신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세울 때에 실제로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어떤 여인이 예수의 발에 기름을 부었다는 기록은 있어도,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상징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가 왕으로 등극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가 제사장 직분을 맡으신 적은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가 스스로 선지자로 자처하신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에게 부어진 기름은 실제의 기름이 아니라 성령이었습니다. 예수는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임명을 받을 때에 하신 말씀이 아니라,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선언하신 '사명 선언서'입니다. 비록 예수는 입으로 직접 "나는 그리스도다, 나는 메시아다"라고 말하신 적은 없지만, 오늘의 본문을 통해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메시아, 그리스도로 등장하셨음을 온 천하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우리는 메시아,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의 목적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는 남의 입을 빌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으로 말하십니다. "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기름부음을 받았다. 나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왔다." 예수가 오신 목적은 한 마디로 줄여, '주의 은혜의 해', 즉 희년(禧年)을 전파하시기 위함입니다. 안식년이 7번 지난 후에 오는 50년째의 해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벨의 해'라고 불렀습니다. '요벨'이란 '수양의 뿔'이라는 말인데, 희년에 수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었기 때문에 이 날을 바로 '요벨의 해'라고 불렀습니다.예수는 이 날을 '주의 은혜의 날'이라고 하고, 보통 우리는 이 날을 '희년'이라고 부릅니다. '희년'이란 말 그대로 '즐거운 해', '자유와 해방의 해'라는 말입니다. 희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토지 무르기, 율법 낭독, 계약 갱신, 노예 해방, 빚 지불, 빚 탕감, 토지 경작의 금지와 같은 일이 시행되었습니다. '희년'은 한 마디로 해방의 날입니다. 빚으로부터 해방된 날,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이 날에는 심지어 동물도 노역으로부터 해방되고, 땅도 경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이 제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제정하신 이상적인 제도였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하고 고결한 사회정의의 이상을 실현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희년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되었고, 다시 성취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와 같은 사건을 장엄하게 말합니다. 인간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기름을 충만히 받고 인류의 메시아,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메시아, 그리스도가 하시는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은 해방입니다. 자유를 선포하고, 자유를 주는 일입니다. 무엇이 자유입니까? 감옥에 갇힌 자에게 자유란 바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눈먼 자에게 자유란 자신을 뒤덮고 캄캄한 어둠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입니다. 억눌린 자에게 자유란 자신을 억누르는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자, 눈먼 자, 억눌린 자야말로 바로 가난한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정신적으로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가난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마음으로도 가난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애통과 신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바로 이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시고, 그들을 도우십니다. 그들을 해방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셨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가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포로를 얽매던 사슬이 풀리고 그를 가두던 옥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도 아니고, 장님이 당장 눈을 떠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먼저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기 시작합니다. 남이 자신을 경멸한다고 해서 스스로도 자신을 경멸했던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남을 억누르고 가두고 눈멀게 하는 사람이 경멸을 받아야 하지, 착취와 눌림을 당하는 사람이 왜 경멸을 받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억눌린 자, 눈먼 자, 갇힌 자가 고개를 들고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려고 노력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도우십니다. 그들이 불의와 절망에 대항하여 싸우기 시작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대장이 되십니다. 대장으로 호령만 하시는 게 아니라 그들의 곁에서 친히 도우십니다.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과 함께 싸우시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시고, 그들과 함께 승리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온갖 불의와 어둠과 죄악의 세력에 싸워 이기셨듯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마침내 영원한 승리자가 되셨듯이, 우리도 마침내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격려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며,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고전 15:57) 하십니다.
실로 우리는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말미암아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해방을 쟁취한 것도 아닙니다. 더욱이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미국이 우리를 해방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해방을 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이 일제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던 우리를 미국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를 드려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계산에 따라, 아니 일본에게 휘말려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한 것입니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일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고 했듯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면 미국도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이 지키지 아니하셨다면 미군도 일본에게 졌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얽매인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성령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멍에를 지우기보다는 그 멍에를 풀어주는 사람이 됩시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분이 주시는 참 자유를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 자유를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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