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믿습니다(창 1:1-2) 사도신경 강해
본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믿는 온갖 잡신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잡신들의 우두머리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홀로 전지전능하신 분, 홀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 홀로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이슬람의 '알라' 하나님과 비슷하며, 유대교의 '야웨' 하나님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슬람교인과 유대교인과는 달리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이 세 분으로 계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 모습, 세 형태로 계시지만 엄연히 한 분이십니다. "세 분이 어떻게 한 분으로 존재하시는가?"라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므로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을 더 자세히 알고 싶고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은 좋을 일이고, 권장할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계산을 무한히 뛰어 넘는, 거룩하고 신비한 하나님을 다 알려고 하는 것은 피조물의 교만입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인간은 침묵하거나 경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한낱 티끌과 먼지와 같이 작고 미천한 피조물인 우리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칼로 실험동물을 조각조각 짤라내듯이, 하나님을 어찌 그렇게 해부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인간의 손으로 해부할 수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찌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인간이 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인간이 어찌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거울을 보듯이, 하나님을 희미하게 볼 따름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는 다만 마음으로 믿고 무릎으로 경배할 따름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스럽고 아쉬운 것은 사도신경에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고 고백하고,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도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고 고백하는 사도신경이 유독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만은 아주 인색하게 설명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시고..."라는 고백에서 성령은 다만 성자의 탄생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등장하십니다. 마치 성령이 오직 성자의 탄생을 위해서만 존재하시는 것처럼, 다만 성자의 보조 역할을 하시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의 출생과 죽음, 부활과 재림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고백하는 반면, 성령에 대해서는 스쳐가듯이,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아주 짤막하게 고백합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런 탓인지는 몰라도,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성령에 대해서 아주 무관심했습니다. 아니 엄연히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이신 성령은 오랫동안 사람에게 푸대접을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무식하거나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을 당해 왔습니다. 심지어 "성령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심보가 비딱하거나 심지어는 조금 미치거나 병적인 사람으로 멸시를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만이 아니라 심지어 교회에서도 미움을 받았고, 그래서 교회로부터 추방과 박해를 받곤 하였습니다. 계란 한 두개가 섞었다고 계란을 통째로 버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목욕시킨 어린 아기를 구정물과 함께 버리는 사람은 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오용하고 모독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성령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대로, 아니 성경대로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의 문장만을 바꿀 것이 아니라, 그 내용도 좀 보충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듯이, "나는 ....하신 성령님을 믿습니다."라고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면 훨씬 더 좋을 법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영'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헬라어로는 '프뉴마'입니다. 이 말은 바람, 공기, 호흡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람이 사물을 움직이듯이, 성령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공기가 만물에 생명을 불어넣듯이, 성령은 만물에 생명과 생기를 불어넣는 하나님의 생명력,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능력으로서 창조 때부터 만물을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란 말은 바로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태초에 마치 둥우리에서 알을 품고 있는 새처럼 혼돈과 수면을 품으심으로써 새로운 만물을 낳으셨고, 만물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셨습니다. 이처럼 태초부터 성령은 바로 창조의 영, 생명의 영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놓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숨 덕분에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처럼 사람의 생명도 다만 물질적인 음식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인 성령으로도 유지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 7:24-25, 27-28). 더욱이 사람은 동물과 달리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생명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깨달음(욥 32:8)과 재주와 재능(창 41:38, 출28:3), 기술(출 36장)과 지혜(신 34:9, 왕상 3:28)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시인들과 예언자들의 영감도 바로 성령으로부터 왔습니다(민 11:17, 25f, 29, 삼하 23:2, 왕상 22:24, 겔 11:5, 단 4:89).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은 사람의 생존과 번영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원동력입니다.
성령은 새로운 생명, 거듭난 생명, 중생을 위해서도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예수님에게 찾아온 니고데모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장). 자연인, 아니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물과 성령'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물과 성령'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떤 이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말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씀과 성령'을 말합니다. 하지만 둘을 종합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에 응답하여 사람들이 회개하여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 깨닫고 회개하여 물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성령이 임하십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회개하고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도 함께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떼어서 따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성령은 자유로우신 영이시므로, 만약 우리가 성령을 근심케 하면, 언제든지 떠나가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다시 오시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성령이 충만히 오시기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첫 생명, 첫 창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도 활동하십니다. 성령은 현재의 생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을 위해서도 활동하십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시니,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또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할 때, 마른 뼈만이 가득한 조용한 골짜기에서 소리가 나더니, 뼈들이 서로 붙고,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일어서는데, 마치 큰 군대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환상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살리는 영일 뿐만 아니라 죽은 시체까지 일으키는 영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린 것도 바로 성령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이 장차 우리의 죽을 몸을 다시 살릴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 생명의 영인 성령을 사람들은 왜 믿으려고 하지 않으며, 더욱이 성령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까?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령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성령을 바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바람을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잡을 수 있습니까? 물론 흙바람, 먼지바람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흙과 먼지이지, 바람은 아닙니다. 손으로 바람을 움켜쥐려고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손에 머물지 않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갑니다. 그렇다고 바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요한의 말대로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일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머니의 배로부터 태어나듯이, 사람이 거듭나는 것도 분명한 영적인 진리, 영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은 영의 존재, 영의 활동,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을 부인하는 걸까요? 사람이 공기를 떠날 수 없고, 공기를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아직도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존재합니까? 성경은 이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마치 공기가 보이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공기를 들여 마시고 살면서도 공기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므로 어리석다기보다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입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만이 소중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실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고, 때로는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요즘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가 되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얼굴과 몸을 가꾸는 일에 열중입니다. 심지어 마광수 교수는 몸이 예뻐야 마음도 예쁘고, 얼굴이 예쁘지 않은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고 말하면서, 외모를 중시하는 풍토를 더 한층 부추깁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마광수 교수도 외모가 별 볼일 없이 보입니다. 사람이 일순간, 본능적으로 외모에 끌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속담이나,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보기 좋은 개살구가 얼마나 많습니까? 보기 좋은 버섯은 대개 독버섯입니다. 꽃뱀이라는 말이 왜 나왔습니까? 외모가 사람을 얼마나 속이는지를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외모에 속지 마십시오. 외모만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잘 가꾸어진 여성의 몸매도 물론 아름답지만, 가정을 위해 희생하신 어머니의 몸은 얼마나 더 아름답습니까! 더욱이 늙으신 어머니의 마음은 젊은 여자의 몸보다 얼마나 더 아름답습니까? 상처를 입은 몸은 고치기 쉽지만, 망가진 마음은 고치기 어렵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 잘 돌보아야 하지만, 보이는 몸보다는 보이지 않은 마음에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보이는 땅보다 보이지 않는 하늘은 무한히 넓고 넓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땅보다 더 중요합니다. 땅도 물론 인간에게 소중하지만, 하늘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땅을 딛지 않고서도 살 수 있으며, 밥을 먹지 않고 물을 마시지 않고도 잠시 동안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기를 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보이는 몸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믿지 않거나 성령을 믿는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도 전부 다 믿지 마십시오. 그들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제대로 열리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영'이라 다 믿지 말고, 영을 분별하기를 위해 힘쓰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인지, 예수를 따르는 영인지, 아니면 귀신의 영이나 이 세상의 영인지, 정신적인 이상 현상인지, 아니면 감정적인 흥분인지 잘 분별하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근심케 함으로써, 성령을 여러분 곁을 떠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이 떠나시면, 여러분은 건강도 잃고 생명의 활기와 기쁨도 잃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신앙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늘 여러분과 함께 하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성령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눅 12:10)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으로 태어났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성령으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과 은사를 날로 더욱 풍성히 누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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