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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강해8(행 1:6-11, 히 8:1-6)

본문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사도신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명제에서 마지막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입니다. 이 진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풍부한 신화적인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는 장면을 저 우주 공간에 있는 어떤 별들 가운데 하나에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화려한 보좌가 있고, 예수께서 그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내려다 보고 계십니다.

우주 공간 어느 별에 올라가 계시는 예수께서 하시는 일은 주로 인간의 잘못된 일을 감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상하게 되는 동기는 그 다음에 "그가 다시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가 다시 오실 때에는 무서운 형벌의 시간입니다. 그러한 이해에서 하나님은 공포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의 승천에 대한 이러한 신화적인 상상은 우주 과학이 발달하면서 점점 어려워집니다. 요즈음 신앙을 갖는 것이 옛날 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서 머무를 수 있는 신화의 공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칼 융은 자기에게 찾아오는 환자들 중 많은 수의 환자가 정신질환과 관련된 것 보다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종교적인 문제로 천당과 지옥의 개념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거에 가지고 있던 천당, 지옥 개념이 무너지면서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문제시하는 것은 잃어버린 천당, 지옥의 개념을 다시 세워갈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예수께서 은하계에 있는 어느 유성에 올라가셨다는 것을 규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존재 방식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전과 후 그의 존재 방식과 사역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진술하고있습니다.

히브리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히13:8) 그러나 그의 존재 방식과 사역의 형태는 부활하기 전과 후에 완전히 다릅니다. 부활하시기 전에는 성육신 하셔서 십자가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지상의 사역을 완수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그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으로"바뀌었습니다.

사도신경 이 대목에 "오르다. 앉다. 오시리라."는 세 개의 동사가 있습니다. 이들 동사의 시제는 다 각각 다릅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동사가 독립된 동작으로 끝나지 않고 처음 동작이 그 다음 동작으로 이어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첫 번째 동사가 그 다음의 동사의 동작을 지시합니다. 이것은 존재 양식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 오늘,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존재 방식과 사역의 형태는 바뀌었습니다. 어떻게바뀌었는가? "오르시고, 앉으시고, 오시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먼저 "하늘에 오르사"는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진술과 서로 대칭됩니다. 이것을 고대 사회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관으로 문자적 해석을 한다면 예수께서 땅속에 있는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가 천상 세계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이 세상이 하늘, 땅, 지옥의 삼층천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한 고대시대의 세계관에서 이 진술을 이해한다면 지옥과 하늘은 엄연히 대조적인 장소입니다. 예수는 아주 음산한 지하의 감옥과 같은 곳에 계시다가 저 천상의 세계로 옮기워져 가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이 대목을 그러한 개념으로 받아드릴 때 예수는 오늘과 같은 우주시대에서 우주비행사들과 같은 분으로 상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도 신경에서 지옥이나 하늘은 공간 개념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방식과 사역의 형태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지옥으로 내려 가셨다는 표현은 인간과 연대하셔서 인간의 가장 어두운 삶의 부분까지 경험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늘로 오르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참여하셨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오르셨다는 동작은 곧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동작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변화의 구체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개념으로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오르심은 피안의 천공의 세계로 들어가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예수의 존재, 하나님의 차원에서 예수의 능력과 영광 안에 계시는 그의 존재를 의미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면, 그는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히7:25)"고 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의 존재 방식은 '종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며,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참여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다."에서 하나님 아버지 우편은 장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에게 부여된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러한 존재 양식으로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얼마나 암담했을지 모릅니다. 구약 시대 대제사장은 본래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와 해결을 받고자 할 때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신다는 것은 그 분이 우리의 생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문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의 삶이 이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니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하늘에 있는 시민권자"로 표현했습니다. (빌3:20)

히브리서 저자는 이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4:14∼16)

부활하신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계시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에 존재해 가시는 구체적인 존재방식과 사역의 한 형태가 교회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존재방식과 사역의 한 형태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예수께서 보여주신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교회는 현실에 있지만 영원 가운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판하러 오시리라."입니다. 이 진술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밖에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10∼11)

그래서 입을 가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결국 죽음에 삼킨바가 되고 말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강요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무지, 오만, 반항 가운데 더 이상 얽매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벤허'의 작가 루 윌리스 는 미국 인디애나 주 브룩빌에서 태어나 법률을 전공하던 중 멕시코 전쟁이 일어나자 지원병으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북 전쟁 때 육군 소장으로 북군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그 내용을 제1장에 쓰고, 이어서 제2장 첫 페이지를 쓰다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소설 벤허를 썼습니다. 사실 벤허는 주인공 벤허의 이야기라기보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둘째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는 진술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 목적, 윤리의식을 부여해줍니다. 만물을 새롭게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그 때를 기다리면서 텔레비전에 넋을 잃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을 해야합니다.

사도행전 본문 말씀에 제자들이 예수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할 때가 이 때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때와 시기에 관한 것은 너희에게 속한 사항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오직 증인의 임무를 충실히 해가라고 하셨습니다. 증인의 삶은 분명한 삶의 가치, 목적, 윤리적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간 동안 특별히 기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나타내 보이라고 했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4∼5)

관용의 삶은 서로 나눔의 삶이며, 돌봄의 삶입니다. 주께서 오신다는 이 진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기심, 욕심에서 해방시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관용을 베푸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 때가 어둡고 암울한 저주스러운 시간이 아니며, 기쁨과 영광의 시간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희망, 기쁨, 영광을 극히 제한된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이 세상에 알릴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세째 우리에게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은 이 현실에서 참되고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동인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동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 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4:8)

무엇에든지 삶을 긍정할 수 있는 동인은 그 분이 다시 오신다는 희망에 있습니다. 이 날은 궁극적인 해방의 날입니다. 이 날은 경건한 자들이 쌓아 올린 공적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 날은 예수의 산상 수훈 팔복에 나타나 있는 가난한 자, 우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자비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들에게 최후의 날, 최종적인 해방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이 마지막 때에는 성공한 자들, 자신의 뜻을 관철한 자들, 세상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쓴 자들의 실체가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이 교회에서 까지 득세하며, 칭찬과 영예의 갈채를 받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최후의 날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모든 세상적인 가치가 전도되는 날입니다. 그들이 오히려 슬퍼울며 탄식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다시 오신다는 이 약속은 의를 위해 고난 당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보다 큰 희망과 용기와 격려를 주는 약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날은 모든 것이 파멸해버리는 허무의 시간이 아닙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는 완성의 시간이며, 새로운 시작의 시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마지막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며 시작입니다. 이 시작은 이 세상으로 다시 환생해서 지나간 옛것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시작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새 차원의 시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과 온전히 화해된 삶, 용서된 삶, 치유된 삶, 보상된 삶으로서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도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를 힘입어 언제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을 다 경험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깊이 이해하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새롭게 열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볼 때 지금은 밤이 깊어가고 낮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롬13:12-14)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게 되는 것은 어둠의 시간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저주와 심판의 시간이 아닌 해방의 시간입니다. 그 해방의 시간을 기다리는 우리는 좌절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며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나타내 보이며 그때를 기다려 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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