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강해13(골 3:1-4)
본문
오늘로서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에 도달했습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인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문제는 우리 인간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지 않고는 이러한 고백이 불가능 합니다.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러한 희망적인 믿음의 고백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단지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열린 새로운 운명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에 그 실재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의 삶의 가치는 너무나 다릅니다. '나'라는 한 인간의 존재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와 밖에 있을 때 "나"라는 한 인간의 가치는 큰 차이를 갖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괄호 안에 있는 수의 값어치를 바꾸는 괄호 밖의 기호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한 인간은 유한한 존재로서 괄호 안에 있는 어떤 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괄호 앞에 어떤 기호를 붙이느냐에 따라 괄호 안의 수의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그와 같이 '나'라는 유한한 한 인간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에 따라 큰 차이를 갖게 됩니다.
사도신경의 이 마지막 진술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생을 보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본 생의 전망은 죽어 무덤에 들어가서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본 생의 미래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친교 가운데 있는 희망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미래가 열려져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을 살아갈 때 무덤만 보고 살아가는 사람과 무덤 저편 영원한 생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어느 부족을 거느리고 있는 추장이 병으로 자신의 운명이 점점 다해 감을 알고, 어느 날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과제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멀리 바라다 보이는 저 산이 있지 않느냐, 너희들은 그 산에 올라가 너희들에게 가장 소중히 생각되는 것 한가지씩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세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받아 각기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산에 올랐습니다. 저녁 해가 거의 다 져가는 때 세 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 왔습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네, 아버지 저는 산에서 아주 신기한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 왔습니다."
아들은 돌을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래, 그것 참 신기하구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너는 무엇을 발견 했느냐?"
"네, 저는 이 평지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한 식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 왔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가져온 식물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에게
"너는 무엇을 발견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셋째 아들은 매우 송구스러운 태도로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산에서 형들처럼 아무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가지 보고 온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비로서 산너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산너머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비할 수 없는 광활하고 비옥한 초원이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너무 좁습니다. 우리 부족이 그곳으로 옮겨 살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셋째 아들의 손을 꽉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 네가 바르게 보았다. 나는 너에게 우리 부족을 맡기겠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유한한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유한성은 타고난 운명이지만 가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한성 그 차체로 끝날 수도 있고, 그것을 훨씬 넘어서 영원한 지평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지평으로 이어지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그 유한의 장벽을 넘어 영원한 삶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인류의 정신사에 인간의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넘는데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고대 사회로부터 내려오는 '영혼 불멸'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서에 근거한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전자는 인간에게는 불멸의 요소인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영혼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었고, 인간이 태어나면서 인간의 몸에 갇혀 있다가 인간이 죽으면 감옥과 같은 몸에서 분리되어 자유롭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는 전생, 이승, 내생으로 인간의 생을 나눕니다. 이러한 견해에서는 인간의 육체는 감옥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한편 후자인 죽은 자의 부활은 영혼 불멸이 아닙니다. 저는 어린시절 영혼 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결국 흙으로 다 돌아가며, 오직 영혼만이 영구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받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에서는 영혼 불멸을 말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요, 생명은 하나님과 화해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폐기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삶으로 창조 된다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의 육체가 살 것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몸이 다시 살 것을 믿는다고 한 것에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통속적인 삶에 대한 이해를 바꾸어 놓습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것은 불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영혼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의해 보존됩니다. 그리고 영은 각기 자신의 몸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영의 형체입니다.
영은 구체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 관계는 자기 자신, 이웃, 자연,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 가운데서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 갑니다.
이렇게 몸으로 형성되어 가는 삶이 죽음을 끝으로 모두 폐기 처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육체 (살과 뼈)는 빠져 버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는 다른 차원의 몸으로 바뀌어 영원한 교제의 삶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영원한 교제의 삶에는 눈물, 한숨, 질병, 고통, 죽음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부활의 삶은 그 누구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그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에게서 듣고, 보고, 경험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그것으로 예수의 삶도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 사흘만에 무덤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예수의 삶이 죽음으로 인해 손상되거나 폐기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차원 가운데 있는 그의 부활의 몸, 그의 부활의 삶을 목격했습니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모습은 형체가 없는 여기저기 떠 다니는 유령과 같은 실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몸을 가진 한 분의 인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다른 몸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옆구리에 창자국이 있고, 손, 발에 못 자국이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몸에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부활의 몸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몸입니다. 그 때의 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온전히 화해되고, 용서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몸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들은 이야기들 가운데 기억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은 교통사고, 수술, 화장을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는 부활시에 육체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손상입은 육체는 그때에도 손상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상상적인 이야기들이 전적으로 허무맹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몸의 부활은 그러한 의미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던 사람이 부활 후에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당한 고통, 결핍, 아픔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때, 실현되지 못한 아픔, 결핍은 치유받고, 보상 받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을 때와는 다른 온전한 몸을 가진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에게는 한, 증오, 적대감, 슬픔, 후회, 두려움과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 가운데 있게 됩니다. 그에게는 충만, 기쁨,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신경의 마지막 진술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확신 가운데서 바라보는 희망의 미래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러한 미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선취해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 우리의 생의 과거, 현재, 미래가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졌음이라." (3)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1∼2)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생은 이 현실의 생으로 마지막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은 죽음을 끝으로 모두 폐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또 다른 몸을 가진 인격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일생이 그 분 앞에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의 지나온 생은 실패, 결핍, 수치감, 상처등 실현되지 못한 생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미 용서되고, 치유되고, 보상된 생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예수의 부활의 몸에서 보게 됩니다. 부활하신 후의 예수의 몸에 그대로 남아 있는 창자국, 못자국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몸의 상처는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어두운 현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수치감, 좌절, 후회를 더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 드린대로 모두 용납되고, 치유된 삶에서 그러한 지나온 삶을 보게 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기서는 찬송, 감사, 환희, 기쁨, 사랑만이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실패한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마지하는 "영원한 삶에는 눈물,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계21:4) 그것은 우리의 도덕적인 의, 공적, 자기 실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교제는 오직 사랑 그 자체입니다. 성도 여러분 몸이 없는 영이 있을 수 없고, 영이 없는 몸도 불가능합니다. 몸은 영의 형체요, 영은 구체적인 몸을 형성해 갑니다. 그러나 부활 후의 몸은 부활 전의 몸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 가운데 있는 몸, 썩지 아니할 것으로 되어 있는 몸입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죽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폐기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삶을 그 어떤 피조물도 와해시킬 수 없습니다. 영원 가운데 있는 우리의 삶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며"라는 기도문을 읽어드리는 것으로 저의 설교를 마칩니다.
제게 손을 놓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승의 삶을
부여잡으려는
저의 환상과
두려움과 집착과 열망을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저는 믿습니다.
당신께서 보시기에 가장 좋을 때
당신께서 저를 부르실 것이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당신 사랑이 제가 미처 끌어안을 수 없는 기쁨을
제게 마련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모든 잘못들을 용서하시리라는 것을.
그런데, 그런데, 아직도
부서진 장난감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아이처럼
저는 손을 놓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낯선 까닭에 무섭습니다.
당신이 제게 빛을 약속하신 그곳에서
저는 단지 어두움만을 바라봅니다.
참 삶이 시작되는 그곳에서
저는 단지 삶의 끝장만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저의 인간적인 집착을 이해하십니다.
저의 불안전한 감각을 이해하십니다.
저를 지으시고 자라게 하신 분은 바로 당신이시기에.
제게 느낌과 환상을 주신 분도 바로 당신이시기에.
당신은 보고 계십니다
제가 붙잡혀서, 이끌려서
제가 알지 못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함을.
저의 기력은 쓰러지고
저의 총명도 소용이 없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저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당신만이, 오로지 당신만이
끝없는 사랑이시기에
늘 그러하셨듯이 제 곁에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고독한 여정의 황혼에서.
당신께서 저를 붙잡으시고
저를 이끄시며,
저를 받아들이시고
저의 부서진 형체를 다시 맞추실 것입니다.
저는 아무런 비밀이 없습니다
두려움이나 부족한 답변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약함과 힘없음과 두려움이
당신 앞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부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다시 태어나기를 원합니다
당신 팔 안에 잠들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빛 안에서 깨어나기를.
저는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무한히 자비하신 나의 하나님
저는 믿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눈이 볼 수 없고
귀가 듣지 못하는 것을
당신께서 죽음 너머에 저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것을.
당신 이름 안에
저는 내어놓습니다, 생의 남은 시간을.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기 대령하였나이다
저의 마지막 여정에 내내 함께 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영원히 당신과 함께 머무를 집으로.
-조 만나스-Joe Mann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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