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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강해1(요일 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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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내용은 사도신경의 첫 번째 고백의 명제인 하나님과 관련된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분, 여권신장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 분은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왜 하필 아버지 하나님이냐, 어머니 하나님도 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의에 대해 저는 반박하기보다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나, 남성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에 있어서, 그 교제는 주인과 종, 왕과 신하, 기업주와 노동자, 장교와 사병의 관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 질서에서 생겨난 기능적 역할들입니다. 이러한 관계에는 친밀, 사랑, 생명은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표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주장, 요구, 경계, 이익추구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에는 유보의 장벽, 숨긴 것, 일방적인 요구, 강요된 복종, 체념,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 성공을 위한 인연 맺기 같은 것들이 개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는 친밀함, 사랑, 자족, 희망, 신뢰, 생명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교제에서 경험하는 결핍, 고갈, 갈등, 무의미, 무시당함, 상호 의존성, 불만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은 생명,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중 서점에서 잘 팔리고 있는 조창인의 장편소설 "가시고기"가 있습니다. 작가는 그 소설에서 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애틋한 '부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순수한 아버지의 부성애를 그려 놓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새끼를 돌보는 가시고기"로 상징화시키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 당하는 아들과 아버지를 맺어주는 본질적인 힘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명예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요즈음처럼 상하고, 왜곡된 부성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은 잘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아버지 상 때문에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왜곡된 아버지 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하나님 안에서 참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의 부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신 자리가 어디인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Fatherhood)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친밀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요하킴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신 호칭의 기원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연구결과 그러한 호칭은 옛날 아람 사람의 가정에서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임을 찾아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바"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그 어떤 서먹서먹한 거리감, 이질감도 없습니다. 아주 가까운 관계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가깝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 대해 조금도 거리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 분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면서 우리에게는 아주 친밀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 아버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대부분 이방신들은 사람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분으로 인해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더 좋은 것을 담기 위한 포기이지 강요는 아닙니다.

셋째,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용서는 우리를 옛것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우리의 심령을 소생시켜 주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용서는 용서받은 우리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게 하는 용서입니다. 이웃에 대해 닫혀진 마음을 열게 하는 용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용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는 용서입니다. 그분의 용서는 새 삶을 만들어 가는 용서입니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에게 도망하여 숨어버린 인간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다섯째, 십자가에서 우주적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아버지는 세상 전체를 사랑하시면서 세상에 있는 자녀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얼굴과 눈을 마주 대해 바라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이 자상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 10:29∼30)
이 말씀은 아주 세심한 아버지의 사랑, 돌보시는 아버지의 관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기원, 원천, 목적이 그 분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육신의 아버지가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이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저는 지난 날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데 대해, 그 전능의 뜻을 마술적 힘, 분노와 의분의 힘, 강압적이고 파괴적인 힘으로 이해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왜 나에게 있는 이러한 고통을 그대로 방관 하십니까? 당신은 너무 무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은 전능하신 분이신데 나쁜 사람들을 왜 한꺼번에 때려 부수지 않으십니까? 전능하신 아버지는 제가 고통스러워 할 때 너무 침묵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에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전능은 저의 이해와는 너무 다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나타난 아버지의 전능은 악한 사람을 때려 부수는 전능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시는 전능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서 드러낸 아버지의 전능은 저의 고통을 무엇이나 없애 주시는 전능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드리게 하고 죄를 회개하게 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치유해 가는 전능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버지의 전능은 우리를 폭력, 증오, 파괴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전능입니다. 폭력, 증오는 전능이 아니라 약함, 비열함, 열등감입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그러한 전능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파괴적이며 냉혹한 삶의 방식을 추구하게 하는 전능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체념, 운명론, 절망으로부터 동터오는 새로운 희망의 아침을 보게 하는 전능이십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타락한 세상을 보기하고,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존하시고, 유지해 가는 전능이십니다.

우리가 전능한 아버지를 가까이에서 이해해 갈수록, 조급함, 과격, 흥분에서 벗어나게 되고, 인내, 소망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인도의 '간디'의 비폭력도 그 근원을 캐보면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 신실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어떤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가는데 총, 칼, 폭력 대신에 '비폭력'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윤리관은 전능하신 아버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는 자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전능이 무엇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심에 자신을 위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보기하지 않는 그 근거도 역시 아버지의 전능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짐을 지고 가면서 아버지께 감사하고 그 분을 찬양하는 것은 그 분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주일에 말씀드린 양팔이 없고, 한 쪽 다리가 짧은 아이를 낳은 부모가 자신의 운명을 저주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아이를 내다 버리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전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레나 마리아를 인간의 최악의 불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환상, 영웅심에 사로잡혀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에 있어서 진지합니다. 끈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왜, 아버지가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하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가 그러한 전능자이시기 때문에 아-멘 합니다. 만약 전능하신 아버지가 히틀러나 변덕스러운 마술사라고 할 때 우리는 아-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의 믿음의 관점을 매 순간 순간 바르게 세워가면, 이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다 진지하게 대면해 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강요했을 때,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예수를 군중들 앞에 세우고 "보라 이 사람을"(Ecce homo)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 아버지를 보라." "너희들의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입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자녀들의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분을 보라." 그 전능하신 분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요 19:4)

사도 요한은 이 아버지는 사랑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사랑에 묶여 있는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고 사도는 증언합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의 한계 가운데서 전능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파괴와 분열이 아닌 지속적인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범죄한 인류에게 파멸이 아닌 다시 사는 영생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닮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닮는 길이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7)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와 깊은 교제를 원하십니다. 이 아버지는 우리를 그의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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