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TOP
DOWN

사도신경강해3(마 16:13-20, 히1:1-3)

본문

오늘 우리는 드디어 사도신경의 중심부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오스카 굴만(Oscar Cullmann)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순위로 볼 때 분명히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출발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성령에 대한 신비의 빛이 드러나게 되고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 기독교에 입문하려는 사람들 가운데 사도신경의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에 대한 고백에는 별로 갈등을 느끼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두 번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에 대해서는 신앙의 갈등과 걸림돌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는 오늘 우리들 시대에서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시대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이 대목이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헬라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시인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전능하신 천지를 창조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큰 걸림돌이 됩니다. 헬라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그들의 철학적 지성에 맞지 않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지난날의 역사에서나 오늘의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에 걸림돌이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긴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는 정교한 조직신학적 체계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서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저는 사도신경에 명시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말씀드리기 전에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종교적 구원은 심신의 수양을 통해서 육체적,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 어떤 신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구원은 "육체 밖에서, 세상 밖에서, 인격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제가 지난 날 이해한 구원도 이 세상에서 좋은 일하며 착하게 살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이해에서, 금욕적인 삶은 최고의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것과는 반대입니다. 사도신경에서 구원은 세상, 역사, 인격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심신 수련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원은 외부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와서 잠자는 심령을 깨워 일어나게 해서 믿음, 소망, 사랑을 갖게 합니다. 로흐만 교수는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벗어남이 아니고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이행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일반 종교와 철학에서 이해되고 있는 구원은 역사 안에서가 아니라 역사로부터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은 이 현실에서 모든 재앙, 실패, 고난으로부터 면제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역사 안에서 구원입니다.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은 역사의 현실을 멀리 떠나 저 피안의 세계에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현실로 직접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시편 11편에서 시인이 경험한 현실은 너무 살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시인은 자기 시대의 상황을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한다."(2절)고 표현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인의 친구들은 시인더러 산으로 도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거절하고 자기는 "하나님께 피했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피했다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현실의 고난을 직접 대면해 가면서 투쟁하며 싸워 나가겠다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의 하나님은 무감정의 하나님, 피안의 세상에서 승리해서 들어오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경의 하나님은 죄와 불법, 악이 있는 현실에서 그것들과 마주 대면하셔서, 투쟁하시며 승리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은 개인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인의 삶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은 일반 종교에는 그 종교의 창시자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 마호멧과 같은 종교 창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스스로가 종교적 수련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종교적 선각자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그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도들은 그들의 설교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하였습니다.

사도신경의 두 번째 고백의 명제는 "나(우리)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입니다.

여기서 먼저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드리는 것이 바른 순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유대 민족이 고대하던 구세주입니다. 특히 그들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들은 이 메시아가 오면 그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개인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새 역사가 시작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신구약 성서에서 그리스도는 새 일, 새 역사, 새 삶으로 동일시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 안의 삶'(딤후 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롬 8:1)등,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 새 운명, 새 목표, 의미, 가치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잘 살다가 내세에 천당에 가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미 가운데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그리스도가 누구냐? 라는 물음에 대해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신구약 성서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에게만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이외에 여러 사람에게 이 이름이 명명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 다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로 여호수아입니다. 그 뜻은 '구원자'입니다.

성서에서는 이름이 매우 중요시됩니다. 우리 나라 풍습에서 이름은 장차 어떤 사람이 되어가라는 뜻에서 신중히 고려해서 이름을 짓곤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성품, 인격,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자선사업을 많이 하고, 덕과 사랑이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과 일치되는 이름으로 "덕애 - 덕과 사랑이 있는 사람 - 라고 소개됩니다.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임을 알게되고, 그가 하는 일을 통해 그의 이름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러한 의미의 이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매우 구체적인 구원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일을 행하신 분이 누구인가? 에 대해 복음서에서 그 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합니다. 그 예수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 그 자체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의 얼굴을 가진 한 인격으로 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영원히 이 현실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시간 개념으로 크로노스 안으로 카이로스(하나님의 시간)가 들어온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主)입니다. 이 주는 신약 성서에 무려 600번 정도 나오는 매우 보편적인 호칭입니다. 주라는 말의 본래 뜻은 '소유주'입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시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몸, 마음, 영혼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시고 보존해 가시는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와 미래에 오직 그 분만이 역사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그 분 외에 다른 이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향해 그리스도인은 나의 주로 고백하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것 때문에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할 것을 강요당하고,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자굴에 던져지기도 하고, 십자가에 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주에 대한 고백은 피안의 세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의 역사 안에서 되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안에서 다른 대상을 주로 고백하는 것을 모두 배격합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신 아들"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에는 그 외아들, 신약 성서에는 "독생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번역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외아들, 독생자는 생리적으로 부부관계에서 태어나는 아들, 혈통을 이어받은 독자를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의미에서 아들이 아닙니다. 영어로 'His only Son'입니다. 유일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역시 라틴어로도 같은 뜻으로 되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아들이란 의미를 그리스도의 역사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내적 차원과 관련된 것으로, 예수와 아버지와의 유일한 관계를 표 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와 아버지의 의지, 행동, 본질의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는 유일한, 누구 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한 아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고, 아버지는 그 안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나 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2) '유일한 아들'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종의 모습에서 그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이 더욱 분명해 졌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 을 그의 유일한 아들에게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종 의 삶을 통해서 그 자신이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분 이 아니고 전 인류를 위한 분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셨습니다.

(3) 이 유일한 아들은 섬김을 받는 자리에 홀로 있지 않고, 섬김 의 자리에서 자기 자신을 대속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가 자신을 대속물로 내놓으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이루 었습니다. 그 화해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사람들과 형제의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마지막 때에 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찾고 있는 분으로, 우리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로, 우리를 섬김의 자리로 불러내시는 분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과 신자가 아닌 친구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래 자네 그리스도인이 됐다지?"
"그렇다네." "그럼 그리스도에 대해 많이 알겠군, 어디좀 들어보세. 그리스도는 어디서 태어났지?"
"모르겠는 걸."
"몇 살 때 죽었지?"
"모르겠네."
"설교는 몇 차례나 했나?"
"몰라."
"아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고선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게 없잖아!"
"자네 말이 맞네, 아닌게 아니라 난 아는게 없어서 부끄럽네. 하지만 이 사실 하나는 분명히 알고 있지. 3년 전 난 주정뱅이요 빚도 많았고, 내 가정은 산산조각이 돼가고 있었지. 저녁마다 처자식들은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걸 무서워 했지. 그러나 이젠 술도 끊었고, 빚도 갚았고, 우리 가정은 화목해졌네.
저녁마다 아이들은 나를 목이 빠져라고 기다리게 되었거든, 이게 모두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축복일세.

또한 그 분이 나를 사랑하고 계심을 나는 알고 있다네,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나에 관한 신학적 지식을 갖고 있느냐? 묻지 않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고백(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를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내세 문제가 아닙니다. 현실의 문제입니다. 현실의 역사 안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 현실에서 나의 주, 나의 생명, 나의 목적, 나의 의미, 나의 가치가 무엇이냐? 이 문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과 관련됩니다. 현실에서 나는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다시 말씀드리면, 나는 하나님과 화해 가운데 살고 있는가 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