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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님의 나라! (마 6:33) 사도신경 강해

본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화가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배웠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기적이라기보다 신비요, 신비라기보다 은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자마자 곧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고 말한 후에 예수님의 생애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곧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기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얼마 살지도 못하고 곧바로 죽어버렸다는 애통한 소식입니까? 아기 예수가 탄생하던 날에 함께 태어난 아기들이 헤롯의 명령으로 살해를 당했다는 기록은 있어도, 아기 예수도 역시 살해를 당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이 땅에서 대략 30년 혹은 33년 동안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애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생애 중에는 도저히 밝히지 못할 기막힌 사연이나 절대로 공개해서는 안 될 놀라운 비밀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생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든, 예수님의 고난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삶이 없다면, 고난도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의 고난은 예수님의 생애와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살고, 왜 고난을 당하고, 왜 죽습니까? 세상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갑니다. 더욱이 고난을 당하고 싶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남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은 더러 있지만, 언제나 고난을 받기를 각오하고 고난을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욱이 죽고 싶어서 죽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물론 "죽고 싶다. 죽고 싶어서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긴 합니다. 그래서 자살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처음부터 죽기를 원하였을까요? 아닙니다. 모든 생명체는 오래, 행복하게, 아니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본능입니다. 물론 생명체에는 죽음의 본능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도 결국 후손의 생존을 위한 희생이라고 한다면, 실로 죽음의 본능보다 생존 본능이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은 어쩔 수 없이 고난도 받고 죽어야 합니다. 죽기 싫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잘못으로 혹은 고의로 고통과 죽음을 자초하거나 앞당기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대개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난과 죽음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삶을 원하며, 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더욱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진시황제가 꿈꾸었던 장수불멸의 꿈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꿈꾸고 있고, 과학자들은 그런 꿈을 앞당기려고 애씁니다. 더욱이 우리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명예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후세를 위해 많은 공로와 재산을 남기기도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삶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고통을 적게 받으며, 그래서 오래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일평생 소원은 무엇이었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의 유일한 인생 목표는 오래, 고통이 없이, 행복하게, 명예롭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애초부터 자신의 꿈을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이루기 위해 오셨고, 바로 그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고, 바로 그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의 삶의 직접적인 결과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사도신경이 예수님의 삶을 생략한 채 탄생과 함께 곧 바로 죽음으로 직행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길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스스로 고난과 죽음을 자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얼마든지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기시고, 이를 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그래서 예수님은 죽을 줄을 뻔히 알면서, 아니 죽을 자리를 찾아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기 위해 태어났다면, 태어나자마자 죽는 게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어린 아기여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철이 들면서부터는 죽기를 작정하고 불과 물에 뛰어 들고, 창칼로 위험한 놀이를 하고, 높은 언덕에서 뛰어내리거나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 벌렁 드러눕는 등, 죽기 좋은 위험한 행동을 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 반드시 십자가에 죽을 요량이셨다면, 로마 군인이 잡아죽이려던 위험한 사람들의 무리에 기꺼이 섞여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도 아니고, 죽을 방법을 모르셨기 때문도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또한 "당신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처음으로 끝까지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을 가르치셨습니다.

만약 그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은 굳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굳이 십자가에 돌아가시지 않고도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죽는 것만이 예수님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성공과 행복은 예수님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삶과 죽음조차도 예수님의 목표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하셨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그들은 오래, 행복하게, 아니 영광스럽게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였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한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반박하고 방해하고 모함하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잡아죽이고 말았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괴롭히고 죽여야 했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이 기대하던 나라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의 편에서 말한다면, 예수님이 꿈꾸시던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꿈을 파괴할 정도로 매우 위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예수님이 기대하시던 하나님의 나라와 그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나라는 서로 충돌하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먼저 도발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셨지만,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들을 죽일 리는 만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라"고 말씀하실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길래,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만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하였을까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상세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란 죄악의 세력이 정복되고 완전히 새로워진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탄과 죄악과 어둠과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이기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과 더불어 가까이 오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 방식을 180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곧 "회개하라"는 말의 뜻입니다. 회개란 단지 죄를 뉘우치고 착한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 지금까지 바라보고 살던 목표를 완전히 뒤바꾸라는 말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비록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였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공포와 협박의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외쳤지만, "도끼로 찍어버린다." 운운하며 협박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이라는 말 그대로 바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 즉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과 해방, 평화와 생명, 사랑과 용서, 치유와 소망으로 넘치는 곳입니다. 인류가 꿈꾸어 오던 것 중에서 가장 좋은 나라, 아니 그것과 감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최고로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즐거이 혼인잔치와 비교하셨습니다. 혼인 잔치야말로 정말 가장 즐겁고 행복한 곳이 아닙니까? 혼인 잔치에는 지나가는 거지들도 즐거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아니 혼인 잔치는 실로 배고픈 각설이들이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곳이 아닙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슬픈 자, 우는 자, 배고픈 자, 눌린 자, 병자, 쫓겨난 자, 못난 자, 한 마디로 줄여서 말한다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그 어떤 조건도 제시하시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도 없었고,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었습니다.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었고, 잘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없었습니다. 만약 한 가지 조건이 있다면, 혼인 잔치를 인정하고 주인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여 그냥 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지만 회개라는 것도 대단한 조건, 아니 아무런 조건도 되지 못합니다. 의원을 마다하는 병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싫어하는 거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탕감을 싫어하는 빚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해방을 거부하는 노예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들에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은혜로 주어지는 놀라운 기적이요, 은혜로운 선물이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주저하지 말고, 겸손하게, 아니 기쁘게, 아니 감사히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하고 저항하고 결국 예수님을 잡아죽이려는 무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 사람들, 스스로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맛있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늘, 풍성히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찌 잔칫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까? 더욱이 평소에 그들이 깔보던 더러운 거지들이 드나드는 잔칫집에 오려고 하겠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행복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어찌 참 행복과 참 구원을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이 초대하신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오기는커녕, 오히려 이 잔치를 베푼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부자들, 권력가들, 경건한 사람들,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들, 힘과 빽과 끈이 든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반기지 않았고, 그래서 제 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도 끝까지 기다리시고, 끝까지 구원의 기회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초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변명과 구원의 기회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오려고 해도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아니 바깥에서 후회하며, 가슴을 치고 슬퍼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 날이 올 때까지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계속 박해할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박해하였던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까지 박해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태어나시고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사셨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미움과 박해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운명을 계속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 때문에 심문을 당하고 고난과 죽음까지 당하는 일이 아직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손해와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과 구원을 얻게 된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또한 고난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죽음으로 실패하시지 않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리하여 비록 많은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좁은 길과 좁은 문이었지만,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과 예수님이 들어가신 문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지금 이기는 사람이 승리자가 아니라,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이 참 승리자입니다. 지금 웃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순교의 죽음을 당한 스데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환난과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승리의 면류관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니 하늘에만 계시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주님이 걸어가신 길로 기쁘게 걸어갑시다. 비록 힘들고 외롭더라도, 비록 이 세상에서는 실패하는 사람같이 보여도, 하나님 나라에서 승리하는 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승리에 동참하십시다. 고난의 길을 통해 영광의 나라에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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