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은사는 지금도 존재하는가?3
본문
예수님은 어떻게 고치셨는가?
오늘날 주장되고 있는 치유 은사와 성경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비교하려면 성경으로 돌아가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우리 수님은 사도적 은사의 본을 보이셨고 수많은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 시대에 세상은 질병으로 가득헌다. 의학 수준은 조잡했고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보다 불치병이 훨씬 많았다. 역병이 도시 전체를 파멸시킬 수도 있었다. 예수님은자신의 신성을 보여 주시기 위해 질병을 고치셨다. 어떻게 고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지닌 여섯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을 보여 준다.
첫째, 예수님은 말씀 한마디나 접촉 한 번으로 병을 고치셨다.
마태복음 8장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하인을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 하인은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6~7절).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그의 집에 가서 하인을 고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하인이 나을 수 있다며 예수님을 만류했다(8절).
예수님은 특별히 이 백부장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로마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에 놀라셨다. 그래서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러자 그 즉시 하인이 나았다(13절).
예수님은 5천 명을 먹이시기 전에도(요한복음 5장) 무리 중에 병든 사람들을 거의 하루 종일 고치셨다.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았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수친 명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몇 명을 고치시든지 말씀 한 마디로 그들을 고치셨다. 연출도 없었고 특별한 환경도 없었다.
예수님은 한 번의 접촉으로도 병을 고치셨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5장25~34절에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졌는데도 병이 나은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예수님은 즉시 고치셨다.
백부장의 하인은 "그 즉시" 나았다(마8:13).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곧' 나았다"(막5:29). 예수님은 나병환자 열명을 그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순간적으로 고치셨다(눅17:14). 그리고 또 다른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자 "나병이 곧' 떠났다(눅5:13). 베데스다 연못에 누워 있던 병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다니기 시작했다(3.5:9) 심지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도 눈을 씻으러 가야 하긴 했지만-예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기적을 두 단계에 걸쳐 행하셨지만-즉시 고침을 받았다(요 9:1~7). 이 치유의 기적도 앞의 예들에 못지 않게 순간적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점점 나아졌고 앞으로도 더 나아질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점진적인' 치유를 행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즉시 병을 고치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기적적인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지 자연적 치유 과정에 불과하다고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셋째, 예수님은 완전히 고치셨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회당을 떠나 시몬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다 베드로의 장모가 거기서 고열로 앓고 있었다. 아마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녀 가까이에 서서 열병을 꾸짖으셨고 그녀는 그 즉시 나았다(39절). 실제로 그녀는 일어나 그들의 수종을 들었다. 회복기 따위는 없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뜨거운 물에 꿀을 좀 타서 마시라든가 몇 주 푹 안정을 취하라고 조언하시지 않았다. 증세에 아무 변화가 없는데도 '믿음으로 고쳐졌다고 주장'하도록 자극하시지도 않았다. 그녀는 즉시 나았고 그 사실을 알았다. 그녀의 치유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렇게 즉시 완벽하게 고치셨다.
넷째,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오늘날의 신유 치료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실망한 사람들이 다시 휠체어를 타고 긴 행렬을 이루며 집으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비행기나 방송 스케줄 때문에 신유 집회나 프로그램을 정해진 시간에 끝내시지 않았다. 누가복음 4장 4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강조는저자). 누가복음 9장 11절도 그와 비슷한 예를 기록하고 있다.
다섯째, 예수님은 기질성 질환을 고치셨다.
예수님은 요통, 가슴 두근거림, 두통, 기타 눈에 안보이는 가벼운 질환을 고치며 팔레스타인 지방이곳저곳을 다니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저는 다리, 오그라든 손, 앞 못보는 눈, 중풍 등 가장 명백한 종류의 기질성 질환을 고치셨다. 전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기적적인 치유였다.
여섯째,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누가복음 7장 11~16절은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한 도시에 계실 때 한 과부가 외아들을 장사하러 나가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신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관을 만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그 죽은 청년은 벌떡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5장 22~24, 35~43절에 나오는 회당장의 딸도 다시 살리셨다.
반면 오늘날 신유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장례식장이나 장례 행렬이나 묘지 앞에서 시간 낭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분명한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일부 은사주의자들은 오늘날에도사람들이 가끔씩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들은 성경의 예들과는 전혀 다르다. 병실에서 맥박계가 멈춘 환자가 되살아나는 것과 죽은 사람이 장사된 지 나흘 뒤에 무덤에서 걸어 나오거나(요한복음 11장을 보라) 관 밖으로 나오는(누가복음 7장을 보라.)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수님의 기적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명백한 부활이다. 오늘날 그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은사주의자들은 들은 풍문으로 별다른 증거도 없이 그런 주장을 한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기적의 역사를 하찮은 일로 만들어 버리는 죄를 짓고 있다. 왜 지금껏 텔레비전에서 행해진 기적들은 오로지 아무런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는 그런 기적밖에 없는가?
어쨌든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죽은 사람을 살려 내신 기적들을 거의 다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대개는 수많은 군중 앞에서 행하셨다는 점에 주목하라. 예수님의 치유의 은사는 확실한 은사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시기 위해, 또한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시는 방식으로 치유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귀신과 질병을 쫓아내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시는 방법이었다.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준다. 또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한다고 말했다(요 20:30~31)
사도들은 어떻게 병을 고쳤는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신유 은사의 기준을 세우셨다. 오늘날의 신유 치료자들은 예수님과는 다른 수준의 능력으로 사역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신유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 모두에게 신유의 은사를 주셨다(눅9:1~2). 후에 예수님은 이 은사를 70명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주시고 둘씩 짝을 지어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도록 파송하셨다(눅10:1-9). 신약에서 이들 외에 병 고칠 능력을 받은 다른 사람도 있는가? 그렇다. 사도들과 가까운 몇몇 동역자, 즉 바나바(행15:12), 빌립(8:7), 스데반(6:8)도 이 은사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사가 교회에서 닥치는 대로 사용되는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신유 은사는 그리스도, 열두 사도(및 바울),70인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과 가까운 동역자들과만 관련이 있는 은사다.
사도행전 3장은 신유 은사가 사도들의 말씀 선포에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어떤 불구자가 그들에게 구걸을 했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l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행 3:6).
그 순간 그 불구자는 자기 발로 일어서서 걸어가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곧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오랜 세월동안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던 이 불구자를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잡아 모인 무리에게 그들이 본 광경에 놀라지 말라고 말했다. 그 기적은 베드로나 요한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 전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베드로의 말과 치유의 기적이 청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평생 메시아를 열심히 기다려 온 유대인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베드로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상상해 보라. "너희들이 몇 달 전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너희들의 메시아다. 그분을 믿어라."
우리는 이 메시지가 1세기의 유대인에게 얼마나 충격적인고 불쾌하게 느껴졌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유대인에게는 메시아가 일반 죄수들처럼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한마디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유대인은 메시아가 능력과 영광 가운데 오셔서 팔레스타인을 손아귀에 쥔 가증스런 로마인들의 속박을 일소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베드로가 이 불구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그의 말을 듣는 청중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사람이동요하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 사도행전 4장 4절에 따르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다.
교회는 오순절에 태어났다. 새로운 시대가 왔고 하나님은 사도들의 말씀 선포에 도움이 될 기적의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셨다. 실제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치유의 기적이 지닌 여섯 가지 특징이 사도들의 신유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도들은 말 할 마디, 손길 한 번으로 병을 고쳤다. 사도행전 9장32~35절에서 베드로는 중풍으로 병상에 누운 지 8년이나 된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쳤다. 베드로는 그저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그런데 그 즉시 애니아의 병이 나았다(34절).
사도행전 28장에서 우리는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안수로 병을 고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멜리데 섬의 유력자인 보블리오는 바울 일행을 영접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열병과 이질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바울은 환 자를 보러 가서 그에게 기도하고 안수하여 병을 고쳤다(8절).
사도들은 병을 즉시 고쳤다.
성전 문 앞에 있던 앉은뱅이 거지는 즉시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행 3:2~8), 어떤 치료나 추가적인 재활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거지는 평생을 불구로 지내다가 한순간에 나았다.
사도들은 병을 완전히 고쳤다.
우리는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불구자의 이야기에서, 또한 9장에 나오는 애니아의 부친이 고침 받은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9장 34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라는 말은 이 사실을 가장 통찰력 있게 보여 준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신유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모든 신유도 완벽헌다. 점점 낫는 일도 없었고 증상이 재발한다거나 차도가 느리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없었다.
사도들은 어느 누구라도 고칠 수 있었다.
사도행전 5장 12~16절은 사도들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했으며 사람들이 사도들을 높이 칭송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병자에게 덮일까 바랐다. 그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도 모여 병든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었다(행5:16).
사도행전 28장 9절에서 우리는 바울이 보블리오의 아버지를 고치자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무도 예외가 없었다.
사도들은 기질성 질환을 고쳤다.
사도들은 기능성 질환, 징후적인 질환, 심신상관적 질환 따위를 다룬 것이 아니었다. 성전 문에 앉아 있던 사람은 40세쯤 된, 날 때부터 불구인 사람이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는 전염에 의한 기질성 질환인 이질을 앓았다.
끝으로, 사도들은 즉시 사람을 살렸다.
사도행전 9장 36~42절은 베드로가 도르가(다비다)를 어떻게 되살렸는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42절에 주목해 보라.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여기서도 우리는 기적이 복음의 메시지에 신뢰감과 영향력을 더해 주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20장 9~12절에서는 유두고라는 청년이 높은 데서 떨어져 죽자 바울이 그를 되살려 냈다. 반면 오늘날에는 온갖 주장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신유 사역에서 이런 여섯 가지 특징을 보여 주지 못한다.
마지막 요점을 제시해 보겠다.
성경에 따르면 기적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 은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의 신유 치료자들은 마음대로 병을 고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릴 능력이 없다. 그들에게는 성경적인 신유 은사가 없다. 그들은 이런 말로 곤란한 상황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 이처럼 반복되는 실패의 책임은 하나님-또는 치유를 구하는 사람-에게 떠넘겨진다.
신유의 은사는 사라졌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 병을 고치신다.
신유 은사는 교회 초기에 사도적 공동체가 복음 메시지의 권위를 확증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어진 기적적인 표적으로서의 은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성된 이후 이러한 표적들은 사라졌다. 기적적인 표적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사도들은 오직 사람들이게 복음 메시지의 유효성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강력한 표적으로서만 신유은사를 사용했다.
빌립보서 2장 25~27절에서 바울은 병세가 매우 위독한 자신의 좋은 친구 에바브로디도를 언급한다. 바울은 이전에 신유 은사를 보은 주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간단히 고치지 않았는가? 아마도 신유 은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바울이 자신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신유 은사를 악용하는 일을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찌 됐든 에바브로디도를 고치는 일은 신유 은사의 목적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신유 은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임을 확신시키기 위한 표적이었다.
우리는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거기서 바울은 병든 드로비모를 밀레도에 남겨 두었다고 말한다. 왜 바울은 자기와 절친한 그리스도인 친구 한 사람을 병든 채로 남겨 두어야 했을까? 왜 그를 고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신유 은사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딤전 5:23;고후 12:7을 보라.)
신유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기적적인 표적으로서의 은사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완벽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영구적인 방법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는,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친다. 만일 그 말이 맞는다면 우선 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병이 들도록 허락하시는가?
신자들도 죄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 이 세상에서 왜 우리만 그런 고통을 면제받는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건강하다면, 만일 완벽한 건강이 속죄의 보장된 유익이라면, 수백만의 사람이 구원을 받으러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동기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의 육체적이고 일시적인 질병에 대한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서가 아니라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은사주의의 신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은사주의자들은 체험에 호소함으로써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추론에 대해 답변할 때가 많다. 그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그렇지만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그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나는 은사주의자들에게서 그런 식의 천편 일률적인 말들을 끊임없이 듣는다. "내가 알기로는 이 부인의 아들은 암에 걸렸는데‥‥‥‥‥내 친구의 어머니는 관절염이 너무 심해서 거동도 못했는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은사 치료자라도 기질성 질환을 포함해서 진짜로 입증 가능한 순간적 치유의 사례를 보여 주지 못하니까요." "어떤 은사 치료자도 치료받기 위해 오는 모든 사람을 다 고치지 못하고 수백 명의 환자가 집회에 올 때 모습 그대로 아프거나 불구인 채로 집에 돌아가니까요.' "어떤 은사 치료자라도 죽은 사람을 살려 내지는 못하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 이외의 어떤 증거도 필요로 하지 않고 구원의 길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니까요." "은사주의의 신유는 속죄와 구원에 대한 미심쩍은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까요." "은사주의에 대해 글을 쓰거나 가르치는 이들은 사람들이 병들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요." "은사 치료자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들이 신유를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증거는 비약하거나 근거가 없거나 너무 과장된 경우가 많으니까요." "믿음 있는 사람들은 병원에도 많이 있는데 은사주의자들이 병을 고치러 병원에 간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은사주의자들의 신유는 대부분의 경우 의심할 여지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은사주의자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병들고 죽으니까요," "신유를 둘러싸고 온갖 혼란과 모순이 벌어지니까요.' "나도 한가질문합시다.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그건 분명히 성경적인 신유 은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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