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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기초 7단계-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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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성결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교회의 지도력문제나 목회자의 도덕성문제가 일찍이 많은적은 없었다.

사회전체가 새로운 정부 출범후 각종 비리를 파헤치는데 주력하고 있고 사실은 그것도 얼마되는 않겠지만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목회자의 도덕성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있는 것이 감사한지 모르겠다. 요즘들어 부쩍 교인수 감소라는 긴장감으로 떠들어야 하는 교계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필경 사회구조적이나 정세변화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 내부의 문제에서 기인된 것으로 알아야 한다.


세상이 그토록 타협적이고 더욱 세속화 될수록 교회와 일선에 선 지도자들은 더욱 더 탈세속화를 추구해야하겠다. 요즘만큼 또 그만큼 기독교인들이 점을 치러 다니는 시대도 없었다. 더이상 생각하고 고민하기 싫어하는 현대의 병에 걸린셈이다. 그래서 다양성을 모두 인정하는 다원주의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의 생존권에 직결되는 신앙의 위기라고 보고싶다. 이런 시대에 성령과 성결이라는 주제는 어느면에서 낙후되지 않은 건전한 주제이며 다시 떠올라야 할 우리의 과제라고 믿어진다.


상처난 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교회들을 향하는 줄기찬 하나님의 음성일 수 있다. 다시한번 우리가 주님앞에 겸비한 모습으로 세상이 주님께 돌이키기를 도와야겠다.


1. 성령의 한 성품으로서의 성결

성결에 대한 운동들은 실제적으로 중요한 부흥시기를 맞게 했고 또한 수많은 영적인 지도자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성령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하나의 성품 때문이다. 그것은 깨끗함이라는 것 그리고 거룩함이라는 것 그리고 순수하고 순결하다라는 의미에서 세상은 자신과 구별된 성령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죄없는 이가 죄지은 무리들을 위해서 홀로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십자를 선택한 그 역사에서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만다. 왜일까, 그것은 그의 삶이 누구보다 순수하고 성결한 모습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변화된 모습을 갖게했을까?


그가 보여준 삶속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성령은 그와 함께 거했다. 그는 말하기를 요한복음3:3절에서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이 거듭남의 원칙을 늘 천명하고 있다. 새롭게 태어난다 혹은 중생한다라는 말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부담감을 지워주는 말일게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성령인데 그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은 늘 거룩한 것으로 여겨왔다. 그의 앞에서는 비밀이라고는 있을 수가 없었고 악과 어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은 그래서 분명 깨끗함이라는 ‘성결’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성품은 누가 임의로 갖게한 것도 아니요 그 자체로 거룩하고 깨긋하고 성결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17절에 선포하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를 헌것인데 새것처럼 만들어 놓고 그리고 그렇다고 인정하고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 성결한 성품은 결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야고보서1:17절에 보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다. 그는 변덕도 없으시고 그리고 그의 정결하고 깨끗함은 빛처럼 우리를 비추고 그리고 우리에게 향해서 회전하는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성결한 운동들

감리교를 출발시킨 동기가 된 웨슬레의 부흥운동은 성결운동의 대표적인 운동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지금도 웨슬레가 지나간 골목과 길목에는 술집이나 퇴폐적인 상점들이 존재하질 않고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웨슬레의 설교에 감복했다.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들의 잘못된 습관들을 포기했다. 그것은 성결로 가는 지름길이였다.


그 시작은 성령이 이룩한 일이였다. 하지만 이러한 경건하고 성결한 운동에는 오랜 역사들이 있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카톨릭의 외식에 저항하고 순수하게 복음으로 돌아가려는 종교개혁자들의 노력 속에서도 이 성결한 운동들이 벌어진다. 현재까지 모라비안 교도들과 많은 공동체들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요소들 중 하나는 성결한 삶이였다.


루마니아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한 성결한 운동이 있었다. 그것은 정교회내에서 일어났던 운동이였다. 1948년경에 한 정교회 주교가 사람들이 방탕하게 술먹고 주정부리는 모습을 매일 보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무의미한 강론들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이후로 그로부터 시작해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설교하고 주장하고 혁신적인 교회개혁을 시작했다. 이들은 공산주의에서도 살아 남았다. 그리고 지금도 30만명이 넘는 숫자로 아직까지 정교회에서 분리하지 않고 내부에서 지속적인 개혁과 쇄신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모든 부흥운동안에는 이런 성결한 운동들이 있어왔던 것이다.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금주 금연운동도 사실은 이미 우리가 오래전에 교회가 한국을 선교하던 구한말에 있었던 운동이였다. 이 운동은 부흥운동과 함께 민족주의적인 색체를 갖고 성결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마침내 이 운동은 성공했다. 부흥운동이 조선을 강타하고 수많은 지역과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며 교회들을 중심으로 세상이 바뀌어나갔다.


그와 같은 꿈들을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것일까, 그와같은 지도력을 우리는 갖을 수 없는 것일까, 한 잡지사설에서 과연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지도력을 맡길 수 있을것인가라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접한적이 있었다. 과연 그 말이 참말일까, 반신반의하면서 조그마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이 시대의 지도력을 잡아야할 것이다. 바로 성결한 삶의 운동으로 가는 길을 말이다.


3. 알미니안주의냐 칼빈주의냐

성결한 삶이란 무엇일까,

인간적으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일까, 도덕적인 삶일까, 종교적인것인가, 행함으로서의 믿음인가, 아니면 결백주의인가,


우리가 어느 선에서 출발하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알미니안주의자일 수 있고 칼빈주의자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율법주의적이며 바리새적인 색체를 갖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만 믿고서 나태한 신자가 되기가 쉽상이다. 지도자들은 성결한 삶이라는 주제로 설교하기가 무척 쉬울 것이다.


그것은 그 성결한 삶이 율법주의적으로 들리고 바리새적인 색체를 가지고 있다는 착각 때문이다. 그래서 십일조를 강조하고 헌신과 결단을 강조하는 행함의 믿음을 말하자면 알미니안주의에 휩싸이기 쉽다. 자신도 모르게 가장 인간적인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중 기독교 방송과 극동방송에서 들려 나오는 설교들 중에 사실은 많은 설교들이 이런 유형의 설교와 공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챨스피니는 그의 저서 [성결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성결은

Ⓐ 막연하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는 온전한 성결을 이루지 못한다.

Ⓑ 율법의 행위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없이 스스로 행하는 무슨 훌륭한 행위로도 온전한 성결함을 얻을 수 없다.

Ⓒ 좋은 감정을 가지려고 애쓰는것으로도 안된다.

Ⓓ 율법의 행위로 은혜를 받으려해도 소용없다.

Ⓔ 다른 사람의 경험을 모방해도 온전한 성결함을 얻을 수 없다.

Ⓕ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것으로도 안된다.

Ⓖ 기도를 부탁하거나 집회에 참석하는것으로도 안된다.

Ⓗ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특별한 관념을 갖는것으로도 안된다.

Ⓘ 스스로 어떤 깃대를 세운다고 해도 안된다.

Ⓙ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작정한 때와 장소를 고집함으로도 안된다.


우리의 어떤 조건도 그리고 노력도 성결한 삶은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직 믿음으로 이 성결한 삶을 얻을 수 있다. 바울사도도 이런 고민을 무척이나 많이 한 사람이였다. 그는 골수 바리새주의자였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성결한 삶을 율법주의적이며 행위로서의 구원과 믿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을 가려내고 처단하려고 노력했다. 율법주의와 우리의 일개의 행함의 노력과 이 성결한 삶이란 전혀 관계를 맺고있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다 성결한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며 이것은 믿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 성결한 삶이 율법적이며 행함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오늘도 갈라디아서2:21말씀을 말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성결한 삶의 많은 요구들과 아이디어가 무진무궁하겠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포기하고 매장시켜 버려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신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가지고 우리는 말하고 또 말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결한 삶을 우리는 문자적으로 행함으로서 혹은 율법주의적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결한 삶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가는 삶이다. 그것은 도무지 율법적이요 혹은 특별히 구별된 행동과 장소를 통해서 이루어 지지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삶이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닐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성결한 삶을 살아 오셨고 살아가고 살아갈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성령과 가정

요즘 들어 부쩍 가정의 불륜관계를 드라마로 방영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것도 적나라한 표현 때문에 주부들 사이에 유행까지 번지고 있는데 이 부도덕한 세속적이고 음란한 문화 속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주부들을 대할 수 있을까, 신앙은 늘 구체적이고 예수께서는 성령이 늘 우리 곁에서 돕는 보혜사로서 계신다고 말씀했다.


하지만 믿는 가정에서도 모두가 다 온전한 가정생활을 맞는 것은 아님을 고려할 때 우리는 성령의 가정에서의 역사를 깊이 그리고 조심스럽게 연구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성령을 늘 영적인것으로만 혹은 신비한 능력으로만 강조해 왔다. 그리고 영적이라는 말 뒤에는 광신적인 신앙이나 초월적인것만 알리려고 부산했다. 과연 성령의 영적이라는 말이 그렇게만 의미되어져야 하고 가르쳐져야 하는가, 그래서 어떤 목사들도 바람이 나서 여집사랑 자식과 남편과 아내를 버리고 야밤도주해야 하는가, 오히려 그것은 샤머니즘적이다. 하나님의 영은 결코 우리의 가정에 근심을 주시는 영이 아니시다. 유혹을 함께 물리치시는 영이시다.


1. 주부들의 성령충만

주부들은 성령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 교회마다 여자는 넘친다. 시집가지않은 쳐녀까지 여자들만 가득찬 것 같다. 그런데 그 여자들이 기도하는 기도내용은 늘 가정에 대한 염려와 근심들이다. 하지만 은밀한 기도들 때문에 고통하는 기도들도 있다. 여인들의 기도는 교회에서만은 우렁차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여인들은 감정도 예민하고 쉽게 동요된다는 점에서 영적인것에도 예민하고 쉽게 반응하는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영적이라는 표현들 때문에 때로는 남편으로부터 분리감과 소외감도 당한다. 과연 영적이라는 것이 그렇게 신비적이며 초월적인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령의 속성중에는 그런 예도 있지만 그것만이 영적인 현상은 아니다


대부분 영성에 대한 이해를 세상과 분리된 경견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소위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의 구분하는 일이다. 표면상으로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은 모두 영적인 일이며 거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하나님과 교회에 직접 연관되지 않은것은 모두 육적이며 세속적이라고 간주한다. 성령에 관한 신앙을 무속종교로 변질 시켜버릴 가능성도 크다.


성령세례를 받고 치유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받아 좁더 특별한 형태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영성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소위 신령한 은사를 갈구해야 한다.하지만 놀랍게도 신령이라는 말 자체도 ‘영과 진리’라는 뜻으로 우리들의 성서에서 들려주던 신비적인 어감과는 사뭇 다른점이 있다. 결국 총체적으로 영성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육체적인 일들이 현저하게 세속적으로만 간주되어 버렸다.


바른 영성이란 우리의 의지와 결심을 넘어서는 오직 은혜로만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하는 삶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다. 그런데 그 성령은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성- 그리스도의 성품은 인격과 현실을 초월한 신비주의가 아니였다. 성령충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하며 성령충만은 더불어 사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뜻한다. 그런데 어떻게 동행한다는 말인가?


동행이라는 히브리어 말 자체는 그 의도와 뜻과 동기가 일치된 함께 나아간다는 의미를 안고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같은 동기와 의도와 방향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는 삶이 성령충만한 삶이다.


그러니까 영성은 그리고 성령충만은 관계속에서 성숙되고 열매 맺는 삶이라는 사실이다. 성령충만한 삶은 열매를 맺는 삶이다. 그것은 한 가정의 주부가 가정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관계를 통해서 더불어 사는 삶, 열매맺는 삶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다. 그 성령이 우리를 가정안에서 가장 올바른 방법과 가장 올바른 동기와 의도와 뜻을 가지고 우리를 바른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성령자체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게하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의 모습에 특별히 남편과 아내의 모습과 나아가서 가정에게 형상화 되기를 원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 갈라디아서 4:19


2. 부부관계와 비밀

약혼때에는 서로가 알아갈수록 신비롭고 경이에 찬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결혼후에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정적인 비밀들을 발견함으로써 갈등에 빠져간다. 그러면서 싸우기도 하고 참아가기도 하는데 결국 그것은 부부갈등이 심화된다. 갈등은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다. 그것은 그 갈등을 얼마나 잘 해소하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결혼에서의 최고의 비밀은 개인의 육체적인 성적 비밀이다. 이 육체적인 비밀은 최상의 비밀이다. 그런데 이 비밀을 함부로 결혼전에 내어주는 것은 큰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 그 신비로운 비밀을 좀더 절제한 상태에서 줄 필요가 있다. 결혼은 육체와 정신이 평행선을 달리는 철길과도 같은데 그래야만 기차가 달릴 수 있다. 육체적인 평행선은 그을 수 있지만 이 정신적인 평행선을 그어가기는 쉽지않다. 서로를 알아가고 자신을 내어주는 이 작업이 바로 성공한 가장 잘 결합된 결혼생활이다.


무엇인가를 숨긴다는 것은 완전한 결합이 될 수가 없다. 서로 동상이몽을 하고 커가는 정치와도 같다. 결혼에서는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언제부턴가 남편한테 비밀스러운 쪽지가 있고 혹은 다른 냄새들이 베어있다. 혹은 남편은 사랑을 육체적으로만 표현하는데 자신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좀더 낭만적인 교제를 원한다.


그런것들이 오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부부가 각기 다른 주머니를 차고 있는것도 결혼생활의 투명성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가 필요한 부분 때문에 각기 다른 주머니를 차야만 했다. 이런 비밀은 계속해서 자라가고 성장해 간다. 그 두사람은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밀은 왜 가져야 하는가 어떤 면을 가지고 있는가 예를들어 아이가 자라면서 아이는 개인이 되기 위해 부모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데 그것이 비밀은 도구가 된다. 비밀을 간직하게 되면서 자신은 부모와는 구별된 존재이며 자신만의 개성을 가진 한 인격체임을 깨닫게 된다. 게오르그 구스도르프는 말하기를 ‘비밀은 존재하며 그 비밀은 나와 내 속에 살아있는 그 누군가에게만 속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거의 모든 아이들의 놀이에는 비밀스런 상징이 담겨있다.


의자는 배고 방은 항구다, 두마리 늑대가 물장난 침, 음식만들기(소꼽장난),총,. 이것은 엄마나 아빠는 모르는 자신만이 아는 인식이다. 그래서 좀더 남이 못 닫는 비밀스러운 장소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자신들만의 장소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비밀은 그 자체로 비밀스러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비밀을 말하기전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고 다른 사람들은 그 비밀을 캐려고 노력하고 자신은 혼자 즐긴다. 아이들이 성장해서 사춘기를 겪으면서 자녀들은 부모들이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밀스런 문제들 혹은 성적문제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장해서 결혼한 사람들, 부부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 비밀을 지키는 것은 개인의 존중과 직결된다. 사람들이 탐정소설,역사소설 혹은 연애인들의 사생활이 담긴 주간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비밀 비디오 테이프등 이러한 비밀을 좋아하는 이유는 비밀이 가지고 있는 매혹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밀들이 탄로나면 한 개인은 무진장한 수치심과 치부를 드러내어서 자살에 까지 이를 수 있다.


그와같이 한 개인들은 알리고 싶지않은 소중한 비밀들을 가지고 있다. 그 비밀들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고 소중하게 간직되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 비밀들은 사랑, 연애, 어떤 경험일 수 있다. 이러한 비밀들은 특별한 사람들을 강하게 결속시킬 수 있다. 시어머니가 모르는 부부만이 아는 비밀. 이런 비밀들은 책임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개인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들을 우리는 존중해줄 필요가 있고 존경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비밀을 털어 놓을때 그 관계는 더욱 가까워질 수 있다. 나만 아는 비밀을 나아닌 다른 사람에게 전할때 이 관계는 특별한 관계로 책임감을 가진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특별히 상담할때 서로 비밀을 털어놓음으로써 좀더 가깝게 상담할 수 있다.


그러면 부부간에 비밀이 존재해야 하는가, 대답은 그렇지않다. 부부간의 비밀은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만들어 내고 서로 객체의 분리감을 조장하기 때문에 사소한 비밀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성령이 모르게 비밀스러운 행위를 할 수 없다. 가장 밀착되게 우리의 삶속에서 함께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천지의 비밀스러움이 이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밝히 드러나겠다고 말씀하셨다. 부부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관계에서 비밀을 지켜주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이 되겠지만 부부관계에서는 서로 비밀스러움을 만들지 않는 것이 부부관계를 존중하는 태도다.


3. 성경이 말하는 성범죄

세상이 묘해지니까 요즘에는 동성연애라는 표현도 자연스럽게 책과 보도에 떠오른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남자 동성연애자의 45%는 기혼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네덜란드는 국회의원의 절반이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다.


예전 소돔과 고모라는 이 동성연자들의 성이였다. 그들은 롯에게 들오온 남자들을 상관하려고 롯에게 손님들을 끌어내도록 요구했다. 동성연애의 성을 멸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성경에서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레위기18:22에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또한 처녀가 아님도 성경은 비판하고 있다. 신명기22:20f에 ‘.그 처녀에게 처녀인 표적이 없거든 처녀를 그 아비 집 문에서 끌어내고 그 성읍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는 그가 그 아비 집에서 창기의 행동을 하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행하였음이라‘


성경은 결혼사람의 문란한 성생활을 금하고 있다. 신명기22:22에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또한 신명기22:23f에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중에서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것이니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바울사도도 음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했다. 고린도전서5:9에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고린도전서6:18에서는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바울은 외도를 몸안에서 짓는 범죄라고 고발하고 있다. 히브리서13:4에서는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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