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부] ‘지극히 작은 자 하나’ (마25:31-46 마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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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작은 자 하나’ (마25:31-46 마6:2-4)
1. 1964년 키티 제노베스라는 여자가 뉴욕주의 키우 가든스에 있는 자기 아파트로 밤늦게 직장에서 귀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집 앞에서 습격을 받아 칼로 찔리고, 강도에게 그녀는 그 근방을 ‘살려 달라’고 소리치며 30여분간을 저항했습니다. 계속되는 비명 속에서도 인근의 집들과 아파트들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경찰을 부르거나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나중 조사 결과 38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비명 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관여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사망한지 20분 후까지 경찰에게 신고되지 않았고, 경찰이 와서 앰블런스로 그녀의 시체를 싣고 가기 위해서 도착했을 때에도 아무도 길거리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미국만의 현실일까요?
2. 여러분은 해마다 TV에서 소년 소녀 가장 돕기 모금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평상시에는 불우 이웃을 생각지도 못하고 지내는 분들이 TV에 얼굴이 나온다니까 줄을 길다랗게 서서 잠시 동안 이나마 얼굴을 알리기 위해 봉투를 모금함에 넣고서 잠깐 사회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말입니다. 또 명절 때만 되면 라면이나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는 각종 복지시설 정문에서 그 물건을 쌓아 놓고 사진을 찍고는 바쁘다며 시설을 둘러보지도 않고 그냥 가 버리는 높으신 분들. 이 사람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들 하십니까?
3. 어때요. 이 사람들! 우리가 비난할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존경할 만한 사람들입니까? 제 생각은 여러분과 다를지 모르겠지만 존경까지는 못 갈지라도 이 정도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을 생각해서는 호통을 치고 싶지만 도움을 받는 입장을 보면 어쨌든 그만한 혜택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실제로 저는 정신이상자 요양 시설인 사회복지법인 은성원에 근무하는 심리 상담원으로서 이와 같은 경우를 자주 접했습니다. 먼저 선물이 오고, 한참 후에 사람이 와선 그 선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는 가 버립니다. 참 허망하죠. 그렇지만 그렇게라도 들어온 선물은 남습니다. 직원들 마음이야 안 좋지만 그것의 혜택을 누리는 원생들은 즐겁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안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참 기가 막힙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이라도 끊이지 않고 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진심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구제에 대한 말씀에 애당초 우리는 해당도 안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아예 생각도 안하니까요. 북을 치든 장구를 치든 뭔가 하는 것이 있어야 말이 될 것 아닙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는 마6:3-4절을 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참조; 시10:14) 생체학상으로 말하지 않고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더라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도 안되는 이야기죠.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주님은 우리에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합니다. 어떻게요? 자신도 모르게 하는 것 - 즉 습관화시켜 자신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 일을 해 놓고 ‘내가 언제 그랬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러한 상태입니다. == 구제의 대상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 능력이나, 기회가 없는 자에게 국한되어야 하며 게으른 자는 제외되어야 한다. 살후3:10 == 탈무드의 기록에 보면 고아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선행이라 적혀 있다.
4. 몇년전입니다. 주님과 더 은밀한 교제를 하고 또 평소에 만나고 싶었던 대천덕 신부님을 찾아서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 갔었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존경스런 한 평신도를 만났습니다. 그 분은 주님의 말씀을 몸 그대로 실천하고자 애쓰시는 분이셨습니다. 소록도에서 몇 년 봉사를 하셨습니다. 몸이 이글어진 아이들의 밑을 닦아주며, 피고름이 나오는 것을 싸매주고 그들과 함께 하며 느끼는 것은 늘 자기 갈등이었습니다. 어떤 갈등이겠습니까? 이들을 정말 돌보고 싶지 않고 도망쳐 버리고 싶은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기도하며 이들을 돌보곤 했습니다. 저에게 고백하는 것은 이런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이 주님 앞에 너무나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느껴져서 잠시 시간을 내서 예수원에 찾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분 앞에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과연 나는 그런 마음으로나마 그 나환자들을 돌볼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조그마한 마음들이 모여서, 나는 할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라도 이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쩌면 사회 복지 단체에서 일을 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5. 자! 이분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실은 이 분에게 있어서 장애자가 사소한 도움을 요청할 때면 부담없이 도와줄 겁니다. 나중에 물어 보면 기억도 못할지 모릅니다. “내가 언제 그런 일을 했었지?” 오히려 반문할지도 모르죠. 이것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구제의 행동 ! 나중에 나 자신이 기억도 못하는 구제 ! 이것이 참된 구제라고 -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부터 40절까지 한번 봅시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떄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어때요. 제가 너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결코 허황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일의 지도자가 되실 여러분과, 그리고 저는 바로 이와 같이 되어야 함을 목표로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6. 이제 우리는 문제 제기만이 아닌 보다 구체적인 참여에로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청년회, 또는 여러분이 봉사하고 있는 부서는 과연 얼마나 이웃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는지요. 지금 하지 않으면 나중에 풍족하고 넘쳐흘러도 안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도울까요. 일단 교회 내의 어려운 사람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다음은 사회내 여러 사회복지 시설들이 있습니다. 자! 한번 살펴볼까요. 원하지 않든 원하든 임신을 했습니다. 미혼모 시설이 있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영아 시설이 있습니다. 좀 더 큽니다. 고아원이 있습니다. 정박이거나 장애자입니다. 정박 시설이 있고 장애자 시설이 있습니다. 성인이 됐습니다. 정신이상입니다. 정신이상 시설이 있습니다. 노인이 됐습니다. 양로원이 있습니다. 어때요. 시설들이 많죠. 이런 시설들이 아니고서도 연결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들, 점심을 굶고 다니는 결손 가정의 아이들, 보이지 않는 그늘 속에서 나름대로의 꿈과 이상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 나가는 이들, 또 좁은 감방에서 양심수로 정의를 부르짖다 갇혀 지내는 이들이 많다는 것도 인식해야 합니다.
7. 돌고래들은 부상당한 동료들을 구하는 흥미 있는 패턴을 보입니다. 돌고래들은 포유동물인 고로, 살기 위해서는 공기를 마셔야 됩니다. 만일 부상당한 돌고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 그 돌고래는 죽게 됩니다. 몇 명의 관찰자들은 돌고래들이 부상당한 동료를 도와준다는 것을 보고하여 왔습니다. 한 케이스에서 한 마리의 돌고래가 수중의 폭발로 기절했습니다. 두마리의 다른 성숙한 돌고래들이 부상당한 돌고래가 회복되고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물위에 뜨게 붙잡아 줌으로써 도와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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