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부] 소망밖에 있었던 사람들 (엡 2:12~13)
본문
소망밖에 있었던 사람들 (엡 2:12~13)
이 세상의 모습은 마치 「절망이라고 이름 지어진 감옥」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망이 있는 것처럼 살고 있지만, 참 소망이 무엇인지 그 바라는 가치관마저도 혼돈과 무의미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IMF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집을 떠나 지하철역 등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이 있어도 집없는 자가 되어 노숙을 했습니다. 왜? 희망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집없는 사람’을 표현할 때 `homeless`라는 말을 씁니다. 한편 `소망이 없다`는 말은 `hopeless`라는 말을 씁니다. m과 p한 글자의 차이이지만, 여기서 `homeless`보다도 `hopeless`가 더 절망적입니다. 집이 없는 것보다 소망이 없는 것이 더욱 더 불행한 일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희망의 혁명」이라는 저서를 통해서 말합니다.
"희망이 일단 잃어버려지게 되면 생명은 사실상으로나 잠재적으로 종말을 고한 것이 되고 만다. 희망은 생명의 구조와 인간의 정신의 원동력을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세익스피어는 "희망은 모든 사상의 아버지이다"라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귀한 사상이라도 참된 소망이 없는 사상은 죽은 사상입니다.
믿음의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에게 참 소망이 있습니까?
누군가 나를 볼 때, 그가 나에게서 소망의 빛을 볼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소망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여기에 참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절망이 있는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참된 소망을 발견할 수 없는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하루는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 행각에 각색 병자, 소경, 절뚝발이 등 많은 사람들이 누워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 앞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고, 그 물이 갑자기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는 자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삼십 팔 년이나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먼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절망을 절실히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에게 좋은 소식은 오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더욱 깊어가는 것은 절망이었습니다. 그곳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새롭게 일어나 나아갈 삶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그에게 다가온 참된 소망이 그를 일어나게 하였고, 그로 하여금 다시 앞에 있는 인생을 위하여 걸어가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빈 그물만 거두고 있는 시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채워진 소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현장에서 간음하고 잡혀온 돌에 맞아 죽을 여인에게 용서함으로 채워진 소망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함께 십자가에 달린 한 편 강도에게 믿음으로 채워진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바로 방황하며 절망에 신음하던 나에게 오셔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하나님의 사랑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엡2:12-13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소망의 주인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세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속적이며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는 소망이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기 때문입니다.
골 1: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독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한 편 들어보세요.
독일 어느 시골에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였지만 먹고살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일하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소망을 가졌지만 점점 갈수록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기진맥진하여 나무밑에서 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꿈을 꾸는데 누군가 나타나서는 이렇게 말하고 살아졌습니다.
“동쪽으로 30리쯤 가면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베어 넘겨라 그러면 그 나무가 넘어지면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
깨어 일어난 젊은이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가서 나무를 베어 넘기자, 그 가지에 있던 새둥지에서 새알 두 개가 굴러 나왔습니다. 그 중에 부딪쳐 깨어진 알에서 새끼 새가 나와서 금방 자라더니 공중으로 훨훨 날아오르는데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새알 하나를 까 보라. 그 안에 금반지 하나가 있는데 무슨 소원이든 다 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젊은이는 그 안에 있는 금반지를 꺼내 가지고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아내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원을 말할까? 소를 달라고 할까? 좋은 집을 달라고 할까? 돈을 달라고 할까? 둘은 밤새껏 의논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열심히 살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니 다른 것을 말하자 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적당한 것이 생각나지 않자 그들은 반지를 잘 싸서 옷장속에 넣어 두고는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차츰 돈도 모으게 되었고, 땅도 사고, 소도 사고, 집도 사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삼형제를 낳고 백발이 성성해질 때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습니다. 아들 삼형제는 그 금반지를 꺼내놓고는, “우리 부모님이 이 금반지 때문에 희망 속에서 사셨는데, 우리가 그 소원을 풀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부모님의 묘소에 같이 넣어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십니까?
금반지 하나 속에 감추어진 희망이 그들을 좌절하지 않고 살게 했습니다.
우리에게 참 소망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귀한 선물입니다.
소망은 이루어져야 만이 소망이 아닙니다. 이루이지지 않아도 소망은 소망의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그 차체가 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소망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죽어야 이루어지는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늘 나라 아니겠습니까?
2. 그렇다면 소망은 어떻게 증거되고 있습니까?
역설적입니다. 소망은 도리어 절망스런 자리에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 홍해라고 하는 큰 장애물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리어 절망이 소망이 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또한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무대 위에 등장할 때, 다윗은 아무도 상대할 수 없다고 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대장앞에 섭니다.
도리어 환난의 때에 소망의 증인이 등장합니다. 역경과 문제 앞에 부딪혔을 때, 그곳에서 도리어 소망이 체험되기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소망의 주님을 만납니다.
아프리카의 최남단의 곶(串)을 과거에는 ‘폭풍의 곶(cape of tempest)`이라 불렀습니다. 너무나 물결이 빠르고 풍랑이 심하여 그곳을 지나가는 많은 배들이 침몰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르투갈의 용감한 선원들이 이에 여러 번 도전하여 드디어 안전하게 이 곳을 통과할 수 있는 해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부터 이곳의 이름을 바꾸어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머무는 곳마다 절망의 자리가 소망의 자리로 바뀌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세 딸을 잃은 변호사가 자신의 재산 13억을 맹아학교를 위해 장학금으로 내놓은 일이 있습니다. 세 딸을 잃은 슬픔 어찌 가볍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한탄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는 보다 많은 자녀를 선택하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수많은 자녀들에게 도리어 기쁨의 빛을 주고 그들에게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두십시오.
①그 소망의 돛은 바람이 불 때 도리어 올릴 수 있습니다.
사공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돛을 올립니다.
역설적이지만, 소망은 평안할 때보다, 풍파중에 얼굴을 내밀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503장)
②그 소망의 돛은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믿음으로 올릴 수 있습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을 할 때 비전을 가르치며 성서의 소년 다윗이 골리앗 장군과 싸운 이야기를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골리앗은 치기에 너무 크다(Too big to hit)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였으나, 소년 다윗은 나의 돌팔매가 빗나가기에는 그가 너무나도 크다(Too big to miss)고 생각하였다.“
여러분, 절망이 클수록 소망이 크게 역사합니다. 역경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역사합니다.
③그 소망의 돛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합심하여 올릴 수 있습니다.
시107:28-30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3. 여러분! 이제 희망의 돛을 올리십시오.
영국의 처칠 수상은 고등학교때만 해도 그들의 국어인 영어성적에서 낙제점을 받은 사람입니다. 육군사관학교 시험도 삼수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가 영국이 큰 시련에 빠져 있을 때, 나라를 구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더우기 국어 성적에 낙제를 하였던 그가 "제2차대전회고록"을 쓰고 노벨문학상까지 받을 정도로 유명한 문필가가 되었습니다. 그가 정치일선에서 은퇴하고 고향에서 책을 쓰고있을 때, 모교로부터 초청강연을 부탁 받고 지팡이를 짚고서 모교(하로우)의 강단에 올라섰습니다. 수 일전 교장은 수천 명의 학생들에게 "여러분의 대 선배이시고 대 웅변가이신 처칠수상이 연설하실 때 한 마디도 빼놓지 말고 주의 깊게 들어 노트에 모조리 기록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강단에 선 처칠경은 두꺼운 안경너머로 학생들을 한참동안 응시하더니, 다음과 같이 몇 마디를 하고서 하단해 버렸습니다.
"젊은이들이여!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 결코!"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찾으시고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렐루야!
때때로 나는 나를 포기할 때도 있지만,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경은 우리에게 위대한 소망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6:19-2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앞서가십니다. 이것이 소망이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위해 항상 앞서 가시는 예수님-이 소망을 위해 인생을 바치십시오!
♪ 앞서 가신 예수님 바라보면서 모두 맘을 합하여 힘써 일하세
여호수아 본받아 앞으로 가세 우리 거할 처소는 주님 품일세. (382장)
지금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소망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나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로 당신에게 소망의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지금 당신에게 소망의 주님이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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