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부] 아브라함과 롯(창 13: 8-18)
본문
아브라함과 롯(창 13: 8-18)
여름의 폭우와 폭염이 다 지나가고 결실의 가을입니다. 땅은 여러 종류의 곡식과 다양한 채소와 과일들을 땅 밑에서 또는 땅위에서 수확할 수 있게 합니다. 농부의 흘린 땀과 수고가 그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태풍으로 큰 손해를 본 농가의 문제는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을의 수확은 봄부터의 씨 뿌림과 돌봄이 없다면 얻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수확은 순간에 뚝딱 일어나는 마술이 아닙니다. 밤 같은 경우엔 나무를 심은 지 수 년이 지나야 밤송이가 열린다고 합니다.
나무 중에서 열매 맺히는데 가장 오래 걸리는 나무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사람 나무가 아닌가 합니다. 사람은 한 삼십년 기다려야 자신의 몫을 겨우 할 수 있게 되고 좀 큰일이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으려면 또 이삼십년은 더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미래의 자화상이 그려져 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아브라함과 롯을 통해서도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큰 아버지와 조카로서 상당한 기간 함께 살았지만 살아가는 길이 달랐고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본문의 일을 보면 그들이 어떤 인생의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리들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침 받을 수 있습니다.
II. 하나님 말씀 듣기
롯은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일찍 죽자 아들이 없었던 큰 아버지 아브라함의 그늘에서 아들처럼 살았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따라서 가나안 땅으로 함께 왔고 그곳에서 기근이 들자 애급으로 함께 갔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함께 왔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두 사람 모두 상당한 소유 곧 소와 양이 많아서 서로가 엉키게 되고 그래서 양 측의 목자들이 다투게 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함께 있는 것이 힘들게 되어서 이제 서로가 갈라져 살아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두 사람의 신앙과 사람 됨됨이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날부터 그 인생을 믿음의 길로 살았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그 믿음의 길이 100% 온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들도 믿음의 길을 가고 있지만 부족한 것이 많지 않습니까?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고 좌절하고 때론 불신과 회의 속에서 헤맬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인간이라 연약할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믿음의 길을 살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믿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창세기 15:6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음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원리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복음의 진리가 여기서부터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걸은 믿음의 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만연한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하나님의 지시하는 말씀을 따라 한 일입니다. 고향인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한 것입니다. 나중 백세에 얻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려고 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기 쉬운 일들이 아닙니다. 터 잡고 사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으로 가서 사는 것은 실천하기 힘든 일입니다. 백 세에 얻은 아들, 그것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셔서 주신 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일을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실행가기 어려운 일을 그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에 대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마음 깊은 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공연히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런 약속을 하시면서 지시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묵묵히 믿음의 길을 걸어 간 것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 깊은 곳에서 간직하고 살면 이 세상의 풍조와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나라가 망하고 낯선 땅 바벨론에 포로로 갔지만,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믿음이 그들을 요동치 않은 삶의 자세로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들과 늘 함께 하시고 복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을 붙들면 흔들리지 않고 살 것입니다.
세 번째는 믿음의 길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큰 아버지의 소유와 조카의 소유가 서로 분쟁이 생길 정도라면 아브라함이 롯에게 얼마나 후하게 대해 주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삼촌 라반이 야곱을 품삯을 열 번이나 변동하면서 되도록 야곱을 노동력을 이용하려고 한 것을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롯에게 얼마나 배려했는지 모릅니다. 분쟁이 생겨서 갈라서야 할 때도 우선권을 조카인 롯에게 줍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살기보다 영원한 것을 소망하고 살아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도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 소유가 필요했겠지만 조카에게 야박하게 하면서까지 소유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간혹 기독교인 중에서 지나치게 물질에 탐욕이나 애착을 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그리 옳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에 대해 소홀히 생각하는 것도 그리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물질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과 분쟁이 생길 때 조금은 손해 볼 마음의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들처럼 물질만,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영적 축복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조카를 잘 돌보아 주었고 앞으로 정착할 땅에 대한 선택권도 롯에게 먼저 양보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2. 롯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길과는 반대로 롯은 이 세상의 길로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길이요 육신의 길입니다.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따라 사는 것입니다. 큰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살았지만 큰 아버지에게 선택권을 양보할 줄도 모르는 자기중심의 삶을 산 것입니다. 물질을 확보해야만 살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착할 땅을 선택하면서 큰 아버지는 생각지도 않고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곳을 먼저 결정하고 맙니다. 요단들이란 소돔과 고모라 성이 있는 곳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좋아 보이는 곳으로 갔지만 그 결과는 비참과 수치였습니다.
III. 결론
여기 예배드리는 사는 중에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롯처럼 이 세상과 육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살면서 같이 하나님께 단도 쌓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롯은 제대로 된 믿음을 마음에 가지지 못했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신앙 근처에 있다고만 믿음의 길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길로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궁극적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롯은 아내가 소금기둥이 되었고 인간으로서는 아주 수치스런 일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은 우선 보기엔 그리 지혜로운 것 같지 않지만 그 길이 영원한 영광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들이 믿음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께 우리들의 삶에 형통함을 주시고 참된 복도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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