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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 사랑하기에 아픈 가슴(아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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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에 아픈 가슴(아 5:2-8)


 여러분 중에 혹시나 연애 편지를 써보거나 받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연신교회 중등부 학생들은 워낙 인물이 되기에, 한 인물 하기 때문에 아마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설 기간동안 고향을 다녀왔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옛날 사진들과 받았던 편지들을 모처럼 한번 봤습니다. 예전에는 참 사진도 많이 찍고 편지도 많이 받고 편지도 많이 썼지요. 그때는 제가 한인물 했기 때문에, 물론 지금도 한 인물은 물론이고 두 인물도 하지만 어쨋든 편지를 하나씩 봤습니다. 그중에 한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직접 만나서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것 같아서 이렇게 편지로 씁니다’]하면서 이별에 대한 내용을 썼는 편지를 봤습니다. 그 편지를 보면서 사실 옛날 생각도 나고 마음이 허전하더라고요. 

 요즈음 만약에 우리가 연애 편지를 쓰면 어떻게 쓸까? 이렇게 써보면 어떨까요?

 

그대여! ‘그대여’라고 불러보지만 나는 그대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대의 얼굴 한번 본 적 없고 그대의 이름 더군다나 알지 못하고 그대의 나이,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책, 그대의 걸음걸이, 그대의 사는 집, 그대가 이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하고 싶어하는 일 등등 그 어느것 하나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항상 내게 있지요. 하늘 저 끝에서 부터 땅 이끝까지 떨어져 흩날리는 눈송이 위에 그대 있고, 멀리 첨탑위 길 잃은 작은 새 한마리의 깃털 위에도 그대 있고, 들려오는 음악소리의 오선위에 그대 누워있고 아주 간간이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의 눈물 뒤에도 그대는 항상 있습니다. 그대여! 언젠가는 만날 테지요? 그 만남의 시간을 알 수 없다 하더라고 만날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은 항상 마음 속에 있지요. 그날에 대한 집착은 없습니다. 그날이 언제이어야만 된다는 그래서 속으로 애태워 하는 그런 내 존재의 애닯아 함의 모습은 이제 없지요.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그대 향한 내 마음의 표현과 그대 향한 내 사랑과 그대 향한 그리움의 눈물은 이루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대여, 그대도 나와 같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대의 그대에게 이렇게 써본적 있나요? 글의 시작이 무엇으로 인해 기인 되었던지 그리고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대의 글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는지, 그런것은 묻지 마시고 그냥 그대 손길 가는 그림자의 방향대로 써 보신적 있으신지요? 없으시다고요? 그럼 지금 한 번 써 보세요. 흰 여백의 종이 한장과 볼펜 하나만 있으면, 아니 연필이어도 상관 없지요. 또 아니면 컴퓨터로 그대 마음 화면에 띄울 수 있다면 그리고 그대만의 공간이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요. 그리고 한 번 써 보는 것이지요. 그러면 알겁니다. 그것이 그대 마음의 솔직한 표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은 아가서입니다. 사실 목사님들이 이 아가서를 가지고 설교를 잘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지요. 사실 이 아가서를 읽어보면 참 야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 어느 잡지책 에 뒤떨어 지지 않을 정도로 야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떻게 이런 표현이 성경말씀 속에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모습, 신랑과 신부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숨긴다고 되는것이 아니지요. 쉬쉬한다고 해서 풀려지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 하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5장 1절을 보면 결혼잔치를 마치고 신혼 첫날밤을 보낸 다음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은 어느 나라나 마찬 가지이지만 큰 축복의 날이지요.

 2절 부터는 신부와 신랑 사이의 사랑의 갈등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지금의 우리와 예수그리스도로 연관지어서 생각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랑이 이제 친구들과 같이 있다가 돌아와서는 닫혀진 문을 향해 말을 합니다. 거기에 이제 신부의 마음의 표현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아니 이 부분을 읽고 남자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를 금지 못하지요. 아니 여자가 어디 하늘 같으신 신랑이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벌써 잠을 청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나온 신부는 비록 침상에 누워서 잠을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서 신랑의 음성을 듣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혹시나 육신도 자고 마음도 자고 있어서 밖에 누가 와서 두드리는지도 모른체 잠들어 있는지도 모르는 모습은 아닌지요?


 이제 신랑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온갖 아부성 발언을 다해서 신부의 마음을 달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닫혀진 문을 향해서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높이시면서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그 주님의 머리에 이슬이 밤 이슬이 가득하도록 우리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말을 듣고 신부의 혼자 생각이 이렇습니다.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여기서 신부의 게으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밖에서 밤이슬을 맞으면서 추위에 떨고 있는데 어디 신부가 옷을 벗었다고 아니면 발을 씻었다고 게으름을 피웁니까? 말이 안되지요. 귀찮아서 일어나지 않으려는 모습, 이것은 사실 문제가 있지요. 이것이 신부의 가장 큰 실수 입니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것과는 다른 모습입니까? 아니면 같은 모습입니까? 신랑되신 예수께서 우리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우리도 여전히 귀찮아 하는 모습은 아닌지요. 지금의 평안함이 좋기에 지금의 분위기나 지금의 삶의 자리가 좋기에 이렇게 귀찮아 하는 모습은 아닌지요. 그러나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평안은 참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행복은 참된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신부도 사람인지라 마음이 움직여서 일어나서 이제 신랑을 위하여 문을 열어줍니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신랑이 물러간 뒤입니다. 그리고는 후회를 합니다. 6절에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라고 후회를 합니다. 그리고는 이제 반전이 되어서 신부가 신랑을 찾아서 나섭니다.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라고 합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었지만 이미 신랑은 떠난 다음이었지요.

 주님이 우리를 찾아 오셨지만 우리가 주님께로 마음을 움직일때 주님은 이미 떠나셨습니다. 물론 그것은 완전히 떠난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도록 주님은 잠시 우리의 삶을 그냥 두십니다. 이것 또한 주님의 계획하심 안에 있는것이지요. 주님의 찾아오시는 때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외롭고 힘이 들고 지칠때 주님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때만 주님을 찾고 우리가 조금 편하고 불편함이 없을때 주님을 잊어버리는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정작 주님이 필요할때는 주님을 거들떠 보지 않고 문밖에서 찬 이슬을 맞도록 내버려 두는 우리의 모습은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성중에서 지나가는 자들이 신부를 만나매 신부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지키는 자들이 이 신부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것을 막거나 방해할 때 그때 사탄은 활동을 합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배반할때 하나님을 우리가 멀리할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을때 바로 그때 사탄은 우리 가운데서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몸이 찢어지고 상하게 되고 병들게 되는 것이지요.

 이 매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신부로 하여금 자기의 실수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해주고 또 신랑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지요.

 

 그리고 이제 신부가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면서 만나는 여자들에게 말을 합니다. 너희에게 내가 부탁을 한다하면서 가슴저린 부탁을 합니다. 8절에 보면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이제 신부는 신랑이 떠난 다음 신랑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그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기에 병이 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사랑의 열병을 알아 보셨습니까? 사랑의 열병을 알아본자 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병이 나신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사랑하기에 병이 나신 분이십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가슴이 아프지요. 신부가 신랑을 만나지 못해서 겪는 그 사랑의 아픔은 물론 크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기에 겪는 아픔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요.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사랑을 하셨으면 당신의 하나 뿐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까지 하셨겠습니까?

 [어느 가정에 12명이나 되는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짜다가 한명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식구가 걱정을 하는데 첫째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자식도 많은데 한 명정도 없어도 크게 걱정할 것 아닙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다가 시어머니에게 혼이 났다고 합니다. 혼을 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머니에게는 어느 자식이든 소중하다. 잃어버린 그 자식이 더 소중하다면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모에게서 모든 자식이 소중한 것은 자기의 태중에서 나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중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태중에 품고 해산의 고통을 겪으셨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잃어버린 한 생명을 찾기 위해서 그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은 사랑하기에 병이 났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세상의 매를 맞고 이제 새롭게 변한 신부가 신랑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합니다. 그것은 10-16절에 나옵니다. 하여간에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요. 이런 부탁에 예루살렘 여자들이 이 신부에게 묻습니다. 아니 니가 사랑하는 자가 우리가 사랑하는 자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너가 사랑하는것 만큼 우리도 우리의 신랑을 사랑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이제 신부가 말을 하지요. 한번 들어봐라 하면서 자기의 신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10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머리는 정금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이건 완전히 저의 이야기 같습니다.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고.(눈 깜박인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하늘을 두루마기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표현할 수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 인간들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사랑하기에 가슴이 아프지요. 사랑하기에 하나님의 가슴이 저릴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다가 병이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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