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 그날이 오면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눅 17: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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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이 오면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나리(눅 17:20-37)
보이지 않는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던 모습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 같이 함께 했던 연신교회 중등부 친구들중 몇명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있을까?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곳에 간 것일까? 이곳이 마지막인데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이곳은 기쁨만이 있는 곳인데 슬픔, 눈물, 걱정, 근심, 한숨, 모든것이 사라진 그야말로 하나님과 함께 웃고 뒹굴고 장난치고 쉬똥게임도 할 수 있고 물고기와 함께 헤엄치고 사자와 함께 뒹굴고 달리기도 하고 원숭이와 같이 나무도 타고 바나나도 먹고 머리위에 날아가는 새와 함께 푸른하늘 은하수 향해 날아가는 이곳이 바로 천국인데 아직 몇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반대편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중에는 우리와 함께 연신교회 중등부에 다녔던 누구도 있더라고 전해진다. 누구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걔일 것이다. 그런데 이때 걔라고 생각했던 걔가 천국의 문이 닫히는 순간에 뒤늦게 머리와 몸통이 반정도 들어오는 것이었다. 마치 지하철을 탈때 지하철 문에 찡겨(?) 있는 그런 모습이다. 그러다가 이네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항상 꼴찌였고 말썽이었지만 그리고 이곳 천국에까지 들어오는데도 꼴찌고 말썽이었지만 그러나 꼴찌여도 좋고 말썽꾼이어도 좋다. 여기가 천국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문제 될리가 없다.
문이닫히고 난 뒤 확인해 본 결과 너무나 큰 충격적인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몇명의 연신교회 중등부 선생님과 전도사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왠일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생긴것은 아닐까?
마지막으로 들어온 그 말썽꾸러기 걔가 그렇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반대편 쪽으로 가는것 같더라고 했다. 반대편이면 어디인가? 여기가 천국인데 반대편이면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모두 순간 슬픔에 잠겼다. 그몇명의 선생님과 몇명의 학생, 그리고 전도사의 고통받는 모습이 영화의 필름처럼 지나간다. 모두 슬픔에 빠져 있고 울음 소리가 들리는 그때, 저쪽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한사람 잠자다가 부시시 깨는데 그는 바로 전도사였다. 다행이었다. 너무나 너무나 큰 다행이었다. 아니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면 나머지 선생님들은? 그리고 학생들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며느리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 소식에 대해 아는자는 한명도 없다.
선생님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장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부장 선생님이 보이지 않다니? 이 무슨 사건 인가? 중등부를 위해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던가? 그러나 다만 보이는 것은 그의 성경책 뿐이었다. 주일날과 같이 회사에 가신 모양이다. 3호선 지하철역에서 근무하시지만 그래서 매일 전철을 타지만 그러나 이 천국행 전철을 타야하는데 3호선 전철을 타서는 아니되는데 슬프게도 성경책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부장 선생님 흐흐흐.
그리고 두번째는 정 복진 서기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왜 그럴까? 중등부를 위해서 주보도 만들어 주시고 중등부를 위해서 하시는 일이 정말로 많으셨는데 왜 그럴까? 아마 그런것 같다. 주보 만든다고 고생이 되겠지만 요즈음 들어서 꽤나 하기 싫어했었다. 그래서 한주 맡기지 않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이야. 그놈의 주보가 뭔지? 서기 선생님 흐흐흐.
또 한분은 반주자 선생님이었다. 아니 열심히 하셨는데 그리고 매주 중등부 교사회의때도 얼마나 재미있게 해주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연속 2주씩이나 결석을 했다. 하나님 앞에서 연속 2주는 용납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한번은 아파서 또 한번은 시어머니 생신으로 며느리 된 입장에서 할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뿔사 오늘의 말씀에 무어라 쓰여 있는가? 노아때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그렇게 해서 심판을 받았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씀만 읽었어도 거기는 가지 않았을텐데. 아깝다. 그리고 피아노 위에 저 먼지는 무엇인가? 최 선생님 흐흐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선생님이 더 있었다. 그는 김 영미 선생이었다. 저번주에는 찌짐도 만들어 주시고 하셨는데 그리고 그동안 전도도 열심히 하셨는데 왠일일까? 아마 그런것 같다. 작년까지는 열심히 하셨는데 올해부터 신학생이 되더니만 머리가 굵어졌나? 그래서 몸이 무거운지 주일날 항상 예배 시간이 다 되어서야 교회에 오는 것이었다. 학생들 보다도 늦게 나온다. 완전히 군기가 빠졌다. 같은 신학생으로서 마음이 아프다. 누군가 그랬던가! 신학생 한명이 이땅에서 회개하면 천국에 있는 신구약 성도 모두가 일어나서 박수를 친다고 했는데.. 이렇게 될줄 알았으면 진작에 빠떼루 한판줘서 정신을 차리게 하던지 아니면 살인 무기인 앞 머리카락으로 찔러서 피를 보게 했었으면 정신을 차렸을 터인데 선배된 입장에서 불찰이 크다. 허나 어쩌랴! 모든것이 주님의 뜻일찐데. 쯧쯧. 김 선생님 흐흐흐.
이때 갑자기 천국행 열차가 급정거를 하는것이었다. 그러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꿈이었다. 꿈인것이 천만 다행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루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하는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또 여기있다 저기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마지막 날은 많은 사람들이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는데 가지도 말고 좆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까?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주인으로 계시는 나라이지요. 그 나라는 참 평화와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참 평화와 평안과 기쁨이 넘치고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사도행전 1장 7절에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다.’ 그런 쓸데 없는것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자의 날은 이때다 저때다. 이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닌것입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진다해서 그게 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 아시는 시간 입니다. ‘계시 받아서 몇일이다’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은 점쟁이 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을 또한 점쟁이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우리안에 찾아와 주셔서 참으로 우리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하옵소서. 하나님, 때로는 인간이기에 고민이 많습니다. 번민이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참평안이 없을때가 많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주님께서 참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셨는데 왜 우리의 마음에는 참 평안이 없는가요?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다고 하시는데 왜 우리는 가끔씩 서로에게 힘이 아닌 짐이 되는가요?
주님, 우리가 본질적이지 못한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옵소서. 그때가 언제 인지 그때의 징조가 어떻게 되는지 그것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요.
우리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는 그것은 아직까지 우리의 옛 자아의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주인으로 오시는데 그래서 내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나는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까지 나는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이 계실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게 문제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가 이것일 것입니다.
주님 우리안에 당신의 나라가 이룩되게 하소서. 이 보잘것 없고 약하고 사악하고 추해보이는 이곳에 주님이시어 직접 찾아오셔서 지금 여기에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그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날은 먼저 그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친히 저희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저희로 천국 백성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고난을 받고나서 영광을 얻음이 아니요 주님이 대신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우리가 나음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때를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이 비유를 하십니다. 노아의 때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했다고 합니다.
롯의 때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고 롯이 하나님의 인도로 소돔 땅에서 나갈때 불과 유황으로 그땅이 망했지요.
저에게는 개인적인 바램이 있습니다. 제가 장가가기 전에는 주님이 좀 오시는것을 참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마지막이 되기전에 장가는 가야 하는데, 아니 장가는 아니어도 누군지는 한번 봤으면 쓰겠는데..
마지막 때에 무엇이 더 중요합니까? 주님과 깊이 있는 만남의 시간이 중요하고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마지막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 시집가고 육체의 즐거움을 쫒아간다면 그리고 인간적인 일들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 영혼은 불쌍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여러분, 노아의 방주에 들지 못하는자,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남아있는 자 같이 멸망하시렵니까? 그래서 영원토록 고통의 세월 속에서 살아가시렵니까?
그리고 주님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날에는 지붕위에서 가지러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밭에 있는자는 돌이키지 말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롯의 처가 소돔에서 나와서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돌아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는 끊어야 합니다. 돌아봄은 죽음인 것입니다.
마지막날에 한남자는 데려감을 당하고 또 한남자는 버림을 당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함께 있지만 마지막은 다릅니다.
천국에 막상 가보면 저 사람은 분명히 이곳에 올 것 같지 않는데 오는자가 있고 그 사람은 분명히 여기 있을 사람인데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마지막을 원하십니까? 주님의 나라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러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그곳에 있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참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함께 있지만 마지막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밤의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의 태양이 우리에게 오면 세상의 모든것은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하나님을 믿는자는 천국의 잔치 자리에 초대 받아서 기쁨으로 갈 것 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자는 지옥의 이빨가는 죽음의 잔치자리에 초대를 받을 것입니다.
어느 초대를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시는 잔치 자리를 원하시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그 세계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말씀을 통해서 임하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떤 신앙 자세를 가지시기 원하십니까?
첫째, 준비하는 자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노아, 롯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그말씀 따라 살아가는 그래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아는 신앙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모하는 자에게 주님은 주십니다.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주님은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 다시 천국에서 만납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눈물 흘림 없이. 슬픔없이, 고독없이..
(기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천국백성으로 삼아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갖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시여, 우리가 삶속에서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세계를 간절 히바라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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