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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으신 분(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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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으신 분(눅 10:38-42)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 볼 수 있다면

  물안개 피는 강가에 서서 작은 미소로 너를 부르리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우리들은 변하지 않아

  내가 아플 때 보다 니가 아파할 때가 내 가슴을 철들게 했고

  너의 사랑안에 나는 옷을 벗었다.거짓의 옷을 벗어 버렸다. 

 

  너를 사랑하기에 저 하늘 끝까지 마지막 남은 진실 하나로

  오래 두어도 진정 변하지 않을 사랑으로 남게 해 주오

 

 김 종환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정도의 노래 가사면 교회에서도 부를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 큰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옆에 있어주는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지요. 또 자기의 존재의 아픔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의 아픔이 자신을 철들게 했다는 표현은 기가 막히지요. 자기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보다 더 아파오니까 그 아픔속에서 인생이 무엇인지 알게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그저 옆에 있어만 줘도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사람. 여러분, 사람들 중에 멋있는 사람 그리고 좋은 사람,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라만 봐도 좋은 사람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은 그윽한 사람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남자든 여자든 그윽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생활을 하시다가 그윽한 여자를 보면 보는 즉시 저에게 삐삐를 쳐 주시기 바랍니다. 제 삐삐 번호는.. 그런 사람을 보면 왠지 모르게 이야기 하고 싶고 무엇인가가 깊이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이지요. 보이는 그것이 전부인 사람보다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그 뒤에 무엇인가 있는 사람,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나면 그 뒤의 무엇인가가 보고 싶어 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윽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어느 자매들과의 만남에서 일어난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어느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다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그녀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집에 들어오신 이후로 줄곧 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준비하는 것이 많아 마음이 몹시 분주했습니다. 집에 손님이 오셨는데 무엇을 대접할까하며 분주했습니다.

 목사님이 집에 심방을 오셔도 무엇인가 대접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지난주에 담임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연신교회에 처음오셔서 심방을 다니셨는데 집집마다 커피를 내어 와서 많게는 하루에 14잔인가 마신적이 있다고 합니다. 안마시면 준비하신 분들이 실망을 하실 것 같아서 순교적 각오를 하고 드셨다는 겁니다. 목사님이 어느 집에 오셔도 그렇게 준비를 하는데 예수님이 모처럼 마르다의 마을에 오셨는데 그것도 자기 집에 오셨는데 어떠했겠습니까? 마르다는 다만 식사 한끼라도 잘 대접을 해 드려야 하지 않을까하는 고민에 이것 저것 준비하는 것이 많아 분주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동생이 분명히 있는데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바쁜 줄을 알면 와서 도와 주어야 할 것인데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엌에서 나와서 보니까 동생 마리아가 예수님과 지금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본 언니 마르다는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아니면 열을 받았을까요? 열이 났겠지요. 그래서 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아니 저것이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앉아서 놀기만해’하면서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지요. ‘예수님, 내 동생에게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것으로 근심을 하는데 몇가지만 하든지 아니면 한가지만이라도 해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할것이다’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가 하는 것을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준비하는 마르다 보고도 여기와서 같이 이야기 하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냥 그렇게 하도록 놓아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것으로 근심하고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쁘게 근심하고 염려하려면 그리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려면은 한가지만 하라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무엇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 중독증이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무엇인가 일을 해야만 자기의 존재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유가 없는 사람이지요. 저도 마찬 가지이지요.

  교사 선생님들 교사도 하시고 성가대도 하시고 여전도회도 하시고, 어떤 분은 여전도회 회원도 아닌데도 벌써 가입을 해서 하시는 분이 있던데 누구인지는 말씀 드리지 않겠지만 어쨌든, 또 남선교회도 하시고 중창단도 하시고 하여간에 많이 하시는데 그중에서 무엇을 할것인가가 고민이 되지요.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고민한다 해도 제가 무엇을 하라고 말씀 드릴 것 같습니까? 뻔하지요. 선택하라고 하면 그것만 하세요. 무엇일까요? 여전도회만 하세요. 선생님들, 교사만 하시기 바랍니다. 교사만이라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족하다는 것이지요. 두가지 때문에 고민이 되시는 분 이제 결단의 때가 왔습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과감히 성가대에서 나오셔서 교사로서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넘들이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다른 것 하는데 나만 혼자 한가지만 하니까 그것도 이상하고 무엇인가 모자라는 것 같고 해서 따라서 성가대 하시려고 마음 먹고 계시는 분 아예,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랬다가는 절단 낼껴! 즉시 한가지만 하시기 바랍니다. 이건 저의 말이 아니고 어명입니다. 에수님의 어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무엇인가 해야만 된다는 생각이 마르다의 일 중독증인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의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자기 중심적 사고방식입니다. 자기가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자기처럼 되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우리에게는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이만큼 했는데 왜 너는 이만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문제인 것입니다. 마르다 자신이 자신은 이만큼 하는데 동생은 무엇하고있느냐 하는 그 생각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르다가 자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마리아는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었지요. 그것이 바로 획일적 사고 방식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지 못하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그것인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똑같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마리야는 그저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즐거웠습니다. 기뻤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열심히 준비는 하지 못해도 그저 그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좋았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저 듣고만 있어도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분과 대화를 하면서 웃을때는 함께 웃고 진지할때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속에서 먹지 않아도 즐거운 즐거움을 마리아는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사람. 여러분 서로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런 분은 우리주 예수님 한 분 밖에는 없지요. 우리가 거울을 보듯이 직접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분이 지신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십자가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제는 너무나 많이 달려 있기에, 밤거리를 다닐 때 고개를 조그만 들고 다니면 보이는 것이 십자가밖에 없기에 이제 식상한 붉은 네온 십자가 입니까?

 감격과 감동을 주어야 할 십자가가 가끔씩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다면 그리고 불편하게 만든다면 그것 또한 문제일 것입니다. 삶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헤매이는 사람들이 거리를 헤메고 다닐 때 그저 바라만 봐도 새힘이 솟는 그런 십자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붉은 네온 십자가.

 ‘어세오세요. 놀다가세요.’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도시속의 이리 저리 방황하는 미친개들의 정욕의 상징인 네온사인과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그 위에 내어놓으시면서 돌아가셨는데 그러기에 그 십자가 바라보면 눈물이 있어야 하고 그러기에 그 십자가 바라보면 감사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에 그 십자가 바라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다시 살아났구나 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생의 간절한 감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 그저 좋은 십자가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으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주셨는데 틀에 박히고 교리화된 그러기에 더욱더 사람을 얽어매이게 한다면은 그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이제 십자가를 십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만 봐도 좋으신 분으로 그 원래의 그 모습으로 회복시켜 드려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그저 바라봐도 좋으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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