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 부모님은 누구신가?(잠 23: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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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누구신가?(잠 23:22-26)
엄마!
이 세상 살아가면서 내가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엄마가 있어서 난 참 좋다. 자주 엄마의 얼굴을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수 있어서 난 그것이 너무 좋다. 곧 서른의 나이가 되는데 아직까지 어머니라고 불러드리지 못하고 엄마하고 부르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다 큰 놈이 아직 엄마라 한다고 나무라시지만 엄마, 그것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는거 아닌거 엄마도 알지?
엄마에게 어머니라 부르는 그날이 오겠지만 바램이 있다면 그날이 될 수 있는 한 늦어지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부르는 날이 오면 그날부터 왠지 모르게 엄마와 멀어질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지.
엄마,
이번주는 우리 중등부에서 어버이 주일로 지키게 되었다. 그래서 어버이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번주 설교는 설교로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엄마에게 편지 쓴 것을 읽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냥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그냥 그렇게 쓰고 그렇게 끝맺으려고 한다. 중등부 애들에게 그리고 선생님들에게 이 편지를 읽는데 전도사가 되어서 어머니라 불러 드리지 못하고 엄마로 부르는 것이 저들이 생각하기에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다소 쪽팔린다는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그게 좋은데 어떡해.
엄마, 이것을 읽고 끝내면 무슨 설교가 그렇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 살다보면 이럴때도 있고 저럴때도 있는법.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렇게 틀에 박혀서 살아가는 것 너무 갑갑하잖아? 그지 엄마. 이 말을 하는 것은 사전에 미리 말을 함으로써 설교가 끝나고 난뒤의 사태를 무마시키기 위함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중에 전반부 4계명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라면 후반부 6계명은 인간과 인간 관계인데 그 중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5번째 즉, 첫 계명으로 나오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큰 의미를 두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우리 인륜에서는 가장 큰 인간의 도리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답이지. 그냥 답인 것이다. 문제는 그 답을 답으로써 찾아가는 과정이 문제가 아닐까?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그냥 설교로 할까? ‘여러분, 부모님을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수없이 많은 교회에서 이 말씀을 가지고 이번 어버이 주일 설교를 할텐데 부모를 공경하라는 그말이 그저 그렇게 전해진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엄마,
그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사실 엄마에게 효도한번 제대로 한적 없지. 그 효도 개념이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라지만 그렇게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린 적도 없고 그렇다고 가진 것이 있어서 엄마에게 용돈을 드린적도 없는 것 같고, 친구들은 벌써 장가도 가고 능력이 있어서 어떤 놈은 벌써 둘째 손주를 부모님께 드린다고 하는데 그리고 직장에도 열심히 다니고 해서 내집 마련의 부푼 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아직까지 장가도 가지 않고 장가갈 마음은 있는지 없는지 항상 걱정하면서 엄마는 나를 지켜보지만 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삶이 좋다.
장가, 그거 좀 늦게 갈 수도 있고 자식이야 한꺼번에 쌍둥이 낳으면 되지. 그런데 사실 두려운 것은 자식을 낳았는데, 엄마, 나 같은 놈이 나오면 난 어떻게 감당을 할까? 두렵잖아? 가끔씩 미친짓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하지? 같이 미친짓을 할까? 그러면 우리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실까? 그런데 엄마, 올해 중등부 선생님들과 서로 기도제목을 나누는데 연초부터 ‘나의 하와를 만나게 해달라고’ 나의 기도부탁을 했는데 아직까지 응답이 없는걸 보니까 아무래도 선생님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다. 엄마도 그렇다고 생각하지?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봐. 엄마가 우리 선생님들이 기도좀 할 수 있도록 기도좀 해줬으면 한다.
그러나 엄마, 올해안에 기필코 한명을 데리고 갈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엄마, 내가 원래 어릴 때 부터 한 Tough하는 captain 박 아니유, 그래서 말인데 정 없으면 교수님이라도 데리고 갈테니까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돈, 사실 그것에는 원래부터 관심이 없는 것 엄마도 알잖아? 보통 친구들 처럼 결혼해서 자식 낳고 그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고 그리고 내집 마련의 꿈을 가지고 이 세상 돈 때문에 아둥바둥 이리저리 치이면서 살아가는 삶, 그런 삶을 내가 왜 살아야지? 그렇게 살아가는 삶, 그것이 정말로 의미 있는 삶일까? 그런것에 대한 생각은 내 삶의 생각 속에는 없잖아. 또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그냥 세끼 굶지 않고 먹고 살아가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엄마, 나는 살고 싶다. 정말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내 생을 살아가고픈 마음이 있지. 내 마음을 표현 하면서 그 마음에 비추어서 나는 정말로 살고 싶은 것이지. 무엇이 가치있고 무엇이 중요하고 그래서 무엇을 먼저 해야 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지. 또 그렇게 살고 싶지. 그러나 그것이 계산된 삶을 의미한다면 그런 삶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지. 열정을 갖고 싶은 것이지. 내가 사는 삶에 나의 열정을 쏟아서 모든 일에 임하고 싶은 것이지. 狂氣있게 살고 싶은 것이지. 객기가 아닌 광기. 그것은 미친다는 것 아닐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미치면서 사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치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만이 삶의 희망이고 그것만이 삶의 기쁨이기에 주 예수그리스도에게 나의 모든 것을 드리면서 살아가는 삶. 그 누가 뭐라 해도 정열적으로 헌신적으로 미친듯이 하는 것을 의미하지. 그러나 그것이 꼭 무엇을 이루어야만 된다고 생각지는 않지. 무슨 결과를 기대하는 것도 아니지. 다만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지. 그것이 비록 겉으로 보기에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삶일지라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 것이지. 태양빛 아래 뉘인 작은 내 그림자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어차피 쳐다볼 수 없는 태양빛이라면 내 작은 그림자 사랑해야지. 그 그림자 사라지기 전에.
엄마, 오늘 말씀에 보니까 26절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그런 표현이 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또한 우리가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드리기를 원하지. 우리의 잘난 것, 우리의 재능, 우리의 지식, 기술, 시간, 돈, 이런 것 보다도 가식적이지 않고 형식적이지 않는 그저 아무런 계산됨이 없는 나의 모든 것을 드리기를 원하는 것이지.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 한송이를 주면서 ‘이것은 내 마음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을 드린다는 의미 아닐까?
엄마 또한 이런 마음 아닐까?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라.’ 그래 난 내 마음을 엄마에게 드리고자 한다. 엄마는 내가 그 무엇을 드리지 않아도 섭섭해 하지 않지. 내가 선물을 드리지 않아도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그리고 그 무엇을 드리지 않아도 엄마는 나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는 것 나는 알지. 그러나 내가 엄마에게 내 마음을 드리지 않는다면 엄마는 굉장히 섭섭해 하고 굉장히 괴로워 할거야 그지? 자식에게 바라는 것은 마음이지.
엄마, 정말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서 마음이 통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 삶은 얼마나 행복한 삶일까? 그런 삶은 어디에서 가능할까? 그 삶이 이 세상에서 가능할까? 엄마 가끔씩 그런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하면 나는 굉장히 괴롭다. 그러고 싶은데 정말로 그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나자신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괴롭다. 그런데 그것이 내 혼자만 괴로운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으로 인해 괴로워할까? 그런 것으로 고민을 할까? 사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마음을 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을 한다. 엄마, 내가 편지 자주 쓰는 것 엄마도 알잖아. 그 편지를 쓰는 이유도 마음을 주기 위한 것인데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해야만 되는 말이 있다면 주로 편지를 써서 말했지. 그것은 직접 만나서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리된 마음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편지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편지에서 나의 마음을 읽었으면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는 것 같다. 아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그 다음의 행동은 나의 몫이 아니고 그 사람의 몫인것이지.
또 그 다음 표현이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우리의 눈으로 엄마가 가고 계신 그 길을 즐거워하라는 말씀일 거다. 나는 엄마가 살아가는 삶이 좋다. 특별히 뚜렷한 것은 없으시지만 지금은 집에서 손주를 키우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활하시면서 살아가는 엄마의 삶이 좋다. 아니, 난 엄마가 무엇을 하지 않아도 엄마가 인생의 길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즐거움이다. 그것보다 더 즐거운 즐거움은 나에게는 없다.
엄마,
오늘따라 많이 울고 싶어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냥 울고 싶어진다. 엄마, 난 하나님이 그리고 예수님이 엄마 같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같은 분이기도 하지만 엄마같은 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엄마, 옆에 계신 아버지가 섭섭해 하시겠지만 이해하실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편지를 드렸기에 이해하실거다. 우리 자식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보다 더 관심을 써주시고 그리고 우리가 아플 때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는 분이 우리의 엄마 아닐까? 우리네 아버지는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속으로 혼자서 삭이시지만 엄마는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기에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기에 하나님 또한 엄마 같은 성품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고 확신한다.
오늘도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오늘도 자신의 자녀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는 하나님,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지옥가는 마지막 한 생명까지도 천국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그 눈물은 하나님의 사랑일진데 그 하나님이 그 예수님이 이 어버이 주일에 엄마를 더욱 생각나게 만든다.
엄마, 두서 없이 많이 쓴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써야 할 것 같다. 오래 읽으면 우리 중등부 애들이 싫어하고 또 선생님들도 싫어한다. 애들은 애들이기에 이해가 가지만 선생님들이 싫어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 그리고 조금더 하면 간 크다고 할 것 같아서 또 잘못하면 맞을 것 같아서 이만 줄인다.
마지막 한마디. 엄마. 사랑해요.
1998년 5월 어버이 주일을 맞으며
아직까지 그래도 영원한 엄마의 마마보이가 되고 싶은 엄마의 둘째 아들이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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