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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부] 'TO be or not to be'(롬 1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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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or not to be'(롬 14:7-9)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 문장은 세익스피어의 작품 햄릿에 나오는 유명한 햄릿의 독백입니다. 햄릿의 아버지는 왕이었는데 아버지의 동생이자 햄릿의 삼촌의 모략에 의해서 아버지는 죽게 되지요. 그리고는 그의 삼촌이 대신해서 왕이 되고 햄릿의 아버지가 됩니다.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는 것이지요. 그 모습 속에서 햄릿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던진 한마디가 이 문장이지요.

 우리는 이 문장을 보통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런데 때로는 삶이 약간은 따분하기에 말장난을 좀 해보면은, 이 문장의 끝에다가 물음표(?)를 붙이고 그리고 ‘be’를 ‘있다’로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있다가도 없다니 그것이 문제냐?’ 조금더 인위적으로 해석을 해보면 ‘있다가도 없다니, 그 무슨 소리냐?’로 해석을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존재. 비존재. 실존. 있음. 없음.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개념규정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에 대한 개념규정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요? 머리가 띵해집니까?


 여러분, 있음은 무엇이고 그 있음이 사라지는 없음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존재가 지금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없어질 우리의 존재이기에 우리는 어떤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지는 않나요? 마지막, 지구의 종말, 시작이 있기에 끝 또한 당연히 있을 그 마지막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요? 죽으면 끝인가? 아니면 무슨 다른 세상이 있는가요? 지구의 종말은 언제 일어나는가? 어릴 때 그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지구상에서 다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는 무엇이 있을까? 머리 속에 이렇게 그려 보면 암흑밖에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2,000년을 앞두고 세계가 긴장하고 있지요.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다느니 해성이 지구와 충돌을 하는데 누가 지구를 구할까? 독수리 오형제도 사라졌는데 누가 지구를 구할까? 이제 1000년이 바뀌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한해가 가는 것이 아니고 거대한 천년의 문명이 바뀌는 시기이지요. 이러한 시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 요즈음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2.000년 문제(밀레니엄 버그)라는 것입니다. 천년을 가리키는 ‘밀레니엄’과 컴퓨터의 에러를 가리키는 ‘버그’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의 시작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과 기업들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컴퓨터나 반도체가 연도를 끝의 두자리만 인식하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한데서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1998년 6월 14일을 98.06.14로 인식하게 했지요. 그런데 이것이 2000년이 되면 1900년와 구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컴퓨터가 네자리 연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잘못된 연산처리와 오작동으로 전세계가 혼란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벌어진다면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서고 은행에 있는 수억의 돈이 다른 사람의 통장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자기 통장에 그런 돈이 들어오면 곧 바로 저에게 신고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날아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 추락하고 핵폭탄이 갑자기 터지는등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위해서 선진국에서는 벌써부터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걱정입니다. 이것이 쉽게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만에 되는 것이 아니고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데만 해도 몇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불과 1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요.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여러분 지구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이 세상 사람들에게 많은 만큼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 지구의 마지막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엄청 많습니다. 종말에 대한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 휴거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휴거는 공중으로 올라간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휴거를 할 것이다. 92년 10월 28일 휴거가 있을 것이다 해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한 이 장림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들이 휴거를 주장한 것은 꿈 속에서 봤다는 것입니다. 하늘 왼편에 10자와 오른편에 28숫자가 적혀 있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휴거했습니까? 예수님이 재림했는가요? 항상 보면 봤다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나는 봤다. 나는 봤다. 뭘봤습니까?

 그들은 예수님 재림이전에 7년 대환란이 있다는 것입니다. 3년반씩 나우어서 앞의 3년 반 시간에 아무도 모르게 일상 생활이 지속이 되는 가운데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을 하셔서 공중 휴거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남아 있어서 마지막 전도를 하고 환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교주였던 이 장림은 만기가 93년도, 94년도인 적금 통장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경찰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92년이 지구의 마지막이라고 했으면서 어떻게 이런 통장을 갖고 있느냐? 그때 그가 대답한 것이 이 7년 대환란을 근거로 말을 했습니다. 나는 휴거 계시를 직접 받지 못해서 아마도 지금 휴거를 받지 못할 것 같아서 다음 3년 반을 준비하기 위해 저금 통장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지요. 우리 한마디 해 줍시다. 에라 나쁜 놈아.

 그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말씀은 살전 4:16-17절 말씀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니’

 이중에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이 말씀이 그들에게는 중요한 문구입니다. 그런데 처음 표현에 보면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을 보면 그날은 하여간에 시끄러운 날인데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이 공중 재림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두 번 재림을 하셔야 합니다.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그날 정말로 예수님이 오셨어도 그들은 이단입니다. 앞으로 하여간에 언제 누가 온다고 말하는 사람들 절대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침을 튀겨 가면서 까지 말을 했는데도 꼭 보면 그런데 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한마디 해 주십시다. ‘에라, 바보야’


 둘째,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이 있습니다. 계7:4절을 근거로 해서 그들은 144,000명만 구원 받는다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도 종교적 에고이즘에 빠져 있는 모습이지요. 자기들 여호와의 증인만 해도 144,000 넘겠다. 이 144,000은 완전수 12x12X1000을 하면 나오지요. 이것은 많은 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소아시아 사람들은 고통 가운데 구원받지 못한다는 절망가운데 있는데 요한이 두려워 하지 말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계시록 말씀을 잘 읽어야 문제가 없습니다. 이단들 중에 보면 이 계시록 말씀을 잘 해석하지 못해서 이단으로 빠지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사람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지요. 계시록은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에 있을 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제에 식민지로 있을 그런 시기에 쓰여졌던 말씀입니다. 그래서 직접 쓰지 못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일본놈 나쁜 놈이다’를 말하기 위해 ‘여자를 조심하라’라는 식으로 비유적으로 쓴 것이 이 요한계시록인 것입니다.

 계14:3-4절을 보면 144,000이 나옵니다. 4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자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자 경험을 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그리고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는다면 결혼한 사람은 구원을 못받습니까? 그리고 여자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남자만 받는 것입니까? 계시록에서 여자는 큰 음녀 바벨론 다시 말해서 로마 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로마 제국에 우상숭배 하지 않는 사람이 그렇게도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쓸데 없이 아무런 근거 없이 혹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 시대를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메시지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롬 14:8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이것이 바로 종말에 대한 바른 삶의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이 세상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나에게 호흡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지요. 나의 처음과 끝을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셨기에 나는 주님, 그분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너무나 우리는 일상적 삶을 그냥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넘들 하는 것 그냥 다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내가 주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있게 아니 자신 있게는 아니어도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죽는 것도 나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친구를 위해 죽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나의 영광과 나의 명예와 나를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목숨도 바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인 것입니다.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지요. 내가 지금 숨쉬고 살아가고 있는 것도 주님이 주신 것이고 그리고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살아도 당신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당신을 위해서 죽겠습니다. ONLY YOU. 이 사람은 눈에 꽁깍지가 덮어 씌어야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고는 아무리해도 그렇게 살지 못하지요. 누구에게든지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삶과 죽음의 모든 순간순간은 주님을 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우리 앞에 다가와도 우리가 슬퍼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존재의 눈에 콩깍지가 씌어야지요. 다시말하면 바로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으로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고백을 해야 할 것입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우리는 이제 이 문장에다가 다음과 같이 붙여야 합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but, I will live for Jesus christ.'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But, I will live for Jesus ch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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