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론
본문
- 들어가는 말 -
본래 신학은 신에 대한 논의 즉 신론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학의 중심, 특히 조직신학의 중심은 신론(성부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신학적 논의의 중심도 하나님에 관한 문제, 즉 신론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면 이제 신학의 중심 주제인 신론(성부론)을 논의함에 있어서 먼저 성서에서 어떻게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 후에 본격적인 신론의 문제를 다르기로 하겠다.
본 논의의 수준과 깊이가 전문성을 띤 학문적 방향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들이 조직신학적 입장에서 신론(성부론)을 개괄하는 데는 충분할 만한 논의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방향에서 본 논의를 개괄하고자 한다.
Ⅰ. 성서 속의 하나님
Ⅱ. 성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
Ⅲ.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관한 논의
Ⅳ. 하나님의 속성 및 특성
Ⅴ. 삼위일체론
Ⅵ. 섭리론 - 하나님의 경륜
Ⅰ. 성서 속의 하나님
1. 초월자 하나님(성부)
성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 세계에 대하여 초월해 있으며, 전적타자로서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특징은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출3:13,14 이라고 생각된다. 이 구절은 모세가 불붙는 가시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 고난받는 자기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광경이다. 이 본문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이름으로 확정함과 동시에 그 이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나는 곧 나다'. 하나님의 이 대답은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기보다는 도리어 자기의 이름 알려 주는 것을 거절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곧 나다'라는 하나님의 자기 진술은 하나님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 그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원어적인 해석을 해보면 '내가 누구인지를, 어떤 자인지를 역사 속에서 보이겠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 도 <창32:29; >사13:18등에도 이러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하나님의 초월성을 볼수 있다.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의 이름을 갖고 있다. 이러한 하나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사물의 세계에 속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성서의 하나님은 그 이름에 대한 질문을 거절함으로써 이 세계에 속하기를 거부한다. 이름이란 일종의 정의(definition)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정의(definition)는 언제나 다른 존재와의 비교하에서 성립되며 또 무엇과 무엇을 비교한다는 것은 두 사물 사이의 유비(analogia)를 전제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성서의 하나님은 그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이 세계에 속한 사물들과의 유비를 갖지 않으며, 이 세계 내에서 정의 내지는 제한될 수 없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하나님은 이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 즉 초월된 자요, 이 세계에 대하여 은폐되어 있는 존재로서 '비밀'이신 자다. 그는 인간이 규정하는 개념을 자신의 개념과 인간의 모든 생각 위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의 힘보다 강하다(참조, 고전1:25). 그는 인간의 생각이 미치는 영역 밖에 있다. 그는 피조물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 피조물의 세계 위에, 이 세계밖에 있는 분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어떤 상(像)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모습, 즉 이 세계에 속한 사물의 모습에 따라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표현되는 하나님은 이 세계에 속한 것과 유비(analogia)를 가진 존재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 표현과 함께 제한될 수바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의 생각, 자기가 희망하고 기대하는 것을 이 상(像)안에 투사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상을 지배하고 자기를 정당화시키는 결과가 야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제 2계명에서 거부하신다.
2. 인간과 관계를 가지시는 하나님
세계에 대하여 초월하시고 전적타자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과 관계하고자 하는 분이다. 그는 오로지 인간의 하나님이기를 원하며 인간이 그 중심을 형성하는 이 세계의 하나님이고자 하신다. 오트(H. Ott)라는 신학자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하여 '이야기될 수 없는 분'임과 동시에 인간 가까이에 계신 분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이야기될 수 없이 가까운 분'(der unausprechlich-N he)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출3:15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특별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인간에 의하여 정의되거나 제한되지 않은 하나님은 철저히 인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는 인간이 있는 곳에 함께 계시며, 인간이 어디를 가든지 거기에 함께 계신 분이다. 그는 철저히 인간과의 관계 속에 계시고자 하며 그리하여 인간의 현실을 다스리고자 한다. 그는 인간 세계에 대해서 초월 하신 가운데에서도 인간과 구체적으로 만나는 분으로서 그는 인간에 의하여 파악되지 않는 비밀이다.
이러한 일련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엘로힘(Elohim)에 대한 신앙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일신을 믿지 않고 다신을 믿었다는 것을 말하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한계를 넘어서며 인간의 역사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성서의 하나님은 고대의 종족들이 가진 종족신이나 민족신이 아니라 인간이 거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계시는 만유(萬有)의 하나님, 전재(全在)의 하나님 이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세계를 찾아오시고 모든 인간 가운데 계시며, 모든 인간과 화해하시며 모든 인간의 주님으로서 교통하시고자 하는,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는 그 곳에서 철저히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인간과 사귐을 가지시는 인간의 하나님이다.
3. 역사 속으로 오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위에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과 인간과 관계를 깊이 맺고 인간이 거하는 곳에 내재(Immanent)하시는 하나님은 언뜻 보기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모순되거나 파괴도지 않고 역사의 방향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잘 조화되고 있다.
이 세계 밖의 타자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계 내에서 존재하실 수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신학자 판넨베르그(W.Pannenberg)는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을 공간적이라기 보다는 시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성서의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앞에, 인간의 미래에 계시면서 인간을 향하여 인간 안으로 오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서적 근거로 볼 때 그는 인간과 인간이 사는 세계가 기다리고 희망해야 할 미래적 존재이다. 즉 그는 우리 '위에' 혹은 '안에'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우리 '앞에' 계시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는 미래를 그 자신의 존재적 성격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종말론적으로 미래적인 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현재적 삶고 전혀 무관한 미래적 존재인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미래적 존재라고 말할 때 미래에 해당되는 말로 'adventus'를 사용한다. 여기서 adventus는 헬라어 'paronsia'에 상응하는 말로서, 과거나 현재에는 있지 않았던 것, 즉 완전히 새로운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의 시간 진행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가 현재로 진입해 오는 사건적 진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삶의 역사적 현실과 상관없는 미래적 타자가 아니라 그 자신의 새로운 미래로부터 우리의 현재로 오시는 분이다. 성서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오심은 미래의 구원에 대한 언약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새로운 구원의 세계를 약속하고, 그는 또 모세에게 찾아와서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을 약속하고 사명을 맡긴다. 궁극적으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 세계에 찾아오셔서 인간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한다.
또 하나님의 오심은 하나님이 약속하는 미래의 시간 앞에서 인간 자신이 자기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일과 직결되어 있다. 인간은 본래 창조시 하나님 앞에서(Coram D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향하여 살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할 존재였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본래적 속성을 상실하고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게 되었다. 즉 인간은 자기의 본래적 속성을 유실한 반본래적 존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의 오심은 인간이 자신의 반본래적인 모습을 깨닫고, 그의 본래적 모습으로 돌아가는 새 창조의 일과 결부되어 있다.
Ⅱ. 성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
1. 하나님의 자기 계시
자연과 양심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자연과 양심을 통한 일반적 자연계시만이 계시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인해 마음과 눈이 멀어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임에 있어서 자연적 계시로는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직접적인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서이다. 이 성서의 직접적인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에로 인간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역사적 사건을 통한 계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사건으로 그 자신을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섭리를 이루시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신다. 이러한 역사적 자기 계시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부터, 출애굽, 예수의 성육신, 사도들의 선교에 이르기까지 성서의 사건 속에서 볼 수 있다.
2) 말씀을 통한 계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이 의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그의 행위 속에서 그 자신의 속성을 나타내 보이신다. 그리고 자신이 인간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백히 보여 주시며 또한 그의 행위에 대해서도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말씀으로 기록하신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
성육신하신 성자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난 계시이다. 구약에서는 족장들, 왕들, 예언자들, 제사장들을,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을 사도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친히 말씀하시고 행동하시기 위해 인간 세계 속으로 성육신(Incarnation)하셔서 결국 인간이 보거나 직접 경험할 수 없었던 하나님은 이제 그 자신을 인간이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존재가 되게 하셨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육체로 오시는 임재를 인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다.
4) 성령을 통한 계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인 종들을 인도하시고 성육신하신 성자를 충만케 하며, 성서의 말씀을 조명하여 사람들에게 심령의 눈과 귀를 열어 주어 회개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역사하신다. 그리고 성령의 계시에 있어서도 하나님 자신이 계시의 전과정을 관할하시며 무엇보다도 성육하신 말씀을 토대로 하여서 그 자신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낼 때 자기 계시를 통하여 알려 주신다. 즉 그는 인간이 그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면서 자신을 내보인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소재를 평가하고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인간이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그리고 깊이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부를 아는 것에 불과하다.
2. 올바른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기를 계시하면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 계시를 통한 올바른 하나님 인식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를 가진다.
첫째, 철저히 성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인식이어야 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심으로 성립되는 신 인식이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에 힘입어 성립되는 인식이어야 한다.
넷째,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대상들을 안다는 차원과는 다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객관적 대상으로서 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즉 신앙의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다.
다섯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아 헌신하는 삶과 연결된다.
여섯째, 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고난에의 참여를 뜻한다.
일곱째, 하나님에의 인식은 항상 완결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미래를 향하여 열려진 개방성을 지닌다.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인식할 뿐이나 그 때 즉 종말의 때에는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다.
Ⅲ.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관한 논의
1. 히브리적 사고와 헬라 철학의 만남
초대 기독교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신앙의 실체에 대해서 조직적인 체계화를 위한 지적인 개념들과 기본적 범주들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적 체계들은 헬라 철학에 의해서 영향받고 제시되었다. 기독교가 종교적 신앙의 영역 안에서 고대 세계를 정복했다고 한다면 인간이 받은 구속의 본질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신학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고 준비시킨 것은 헬라 철학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를 체계화시키는 데 있어서 헬라 철학은 한편으로 복음의 진수들을 더 잘 드러나게 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헬라 철학으로 인해 기독교의 신앙이 왜곡되어지고 복음의 진리가 헬라화 되기도 하였다.
비록 헬라 철학의 영향이 지대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헬라 철학의 영향을 확고하고 변하지 않는 단일한 요소로 간주하거나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에 대한 영향을 유일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2. 우주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은 그 논의의 출발점이 우주에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부른다. 이 증명 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의 작품에 있는 것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방법에 의거하여 하나님을 증명한다.
1) 운동으로부터 출발
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운동은 가능성(potentia)에서 현실체(actus)로 발현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련의 모든 가능성은 다른 가능성으로 소급되는데 그렇다고 이 소급은 무한히 소급되는 것은 아니다. 무한히 소급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다른 가능성으로 더 이상 소급되지 않는 존재, 즉 자기 자신은 전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운동하지 않으면서 최초로 다른 것을 운동케 하는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2) 원인으로부터 출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어떠한 원인으로부터 파생한 결과이고, 이 원인은 또한 다른 원인으로부터 오는 결과이다. 이렇게 하여 계속 높은 원인으로 소급하게 된다. 그러나 무한히 소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른 어떤 원인을 갖지 않는 최초의 원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최초의 원인이 하나님이다.
3) 가능적 존재와 필연적 존재로부터 출발
이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며, 이 모든 가능성의 존재는 그것을 존재케 하는 필연적 존재로 소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무한히 소급되지 않고 어떤 다른 필연적 존재로부터 오지 않는 존재, 즉 자기 존재의 필연성을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는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다.
4) 존재의 단계로부터 출발
이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존재의 단계에 있어서 상이한 단계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존재에 있어서 큰 단계는 작은 단계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가장 큰 단계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 가장 큰 단계의 존재가 곧 모든 사물을 존재케 하는 원인인 하나님이다.
3. 목적론적 증명
이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출발하는 데에 있어서 모든 사물들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들이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존재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이 최상의 목적, 즉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목적이 되는 존재는 곧 하나님이다.
4. 존재론적 증명
이 증명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안셀름(Anselm)이다.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이 우주로부터 증명을 시작하는 반면에 존재론적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안셀름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러한 존재를 상정할 때 그것은 우리(인간)머리 속에 있게 되고 더 나아가서 현실적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 곧 만유의 하나님은 머리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증명 방법은 데카르트, 라이프니찌, 스피노자, 헤겔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
5. 도덕론적 증명
인간은 누구든지 행복을 추구하는데, 참된 행복은 도덕법과 일치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 세계에서 행복과 도덕은 일치할 수가 없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의 결과로서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고의 선의 가능성을 위하여 행복과 도덕을 합치시킬 수 있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 자신은 이러한 것을 신 존재 증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신은 이 세계에 대하여 완전히 초월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신은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실천적 측면에서 요청될 수만 있기 때문이다.
Ⅳ. 하나님의 속성 및 특징
정통 신학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가진 성격을 본성이라고 불렀고 하나님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속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대개는 속성이라는 말로 통칭하여 사용한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개신교 신학자 흘라츠와 크벤슈테트는 다음과 같이 구분하다.
① 절대적 내재적 속성 : 인간 세계와의 관계를 떠나 하나님 자신 속에 내재하는 속성으로 영원성, 완전성, 단일성, 진리성 등을 말한다.
② 상관적 활동적 속성 : 인간 세계와 관계된 하나님의 활동적 속성으로 생동성, 불변성, 전지 전능, 자유, 사랑, 자비, 은혜, 거룩하심, 진실하심, 무소 부재, 의로우심 등을 말한다.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범주의 속성은 사실상 분리될 수 없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거기에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하나님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과의 관계 위에 설정된 삶이고 사랑이다. 따라서 그의 존재는 피조물에 대한 그의 역사하심 속에 나타난다.
1)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affection)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하여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될 속성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결단코 자기 자신 안에 스스로 홀로 계시고자 하시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족하지도 않는다. 그는 항상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응답을 기다리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켜 우리는 사랑이라고 칭한다. 그는 사랑하시는, 즉 사랑을 행하시는 존재일 뿐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시다(참조: 요일4:8,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사랑을 행하실 뿐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할 때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자극받거나 강요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유 가운데 거하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은 완전한 자유자로서 존재하신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고, 자신을 통하여 규정되고 발현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중요한 사랑은 자유를 반드시 수반한 것이다.
2) 하나님의 특성인 정의(righteousness)
성서상의 의, 즉 하나님의 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 의미의 법적인 개념이나 일반 철학에서 말하는 윤리적 규범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그의 백성을 위해 역사 속에서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위가 지닌 특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뜻하는 다른 언어들, 특히 '헤쎄드'와 연관되어 있다(참조; <시40:10; >호2:19).
사사기에서 '사사'는 행동하는 자다. 그의 특징적 역할은 이스라엘이 처한 위기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정의'를 얻어내는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특별한 사건들 속에서 개인들이, 혹은 부족들이 정의를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은 계약 공동체를 보존하시고 섭리하시는 일을 행하시는 이스라엘의 사사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시내 산에서의 율법 수여는 여호와의 구원 행위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적 표징이었다. 여호와는 모든 관계와 규정들을 자신의 의지적인 통치하에 두고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존하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항상 성서 속의 하나님의 행위들은 백성들을 불의와 도탄에서 구원하시는 행위들이었다. 이것을 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의'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인 면에서나 공동체적인 면에서 역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절대적인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 실제적 관계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 일률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각 구성 요인이 맺고 있는 특수한 관계에서 준수해야 될 일들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그 관계들 속에서 '의'를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그 공동체나 사회의 손상될 것이고 평화는 결핍될 것이다. '의'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공동체 내에서의 정당한 위치를 얻도록 하거나 공동체가 외부의 어떤 세력으로부터 위협에 직면해 있을 때 그 옹호하고 유지시키는 자가 가지는 특징 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 자신들의 정당함을 증명해 주기를 청원한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의롭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이 강하게 강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중심 축으로 하여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법적으로 의존할데 없는 자들의 사회적 권리를 옹호하시는 분이시다.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그의 모든 관계가 '의'에 의하여 특징지어 줄 것을 요구하신다(참조, 암5:24). 그리고 인간들이 그러한 생활을 가지지 않을 경우 여호와께서는 직접 개입하셔서 올바른 질서를 향한 심판을 단행하신다.
시편의 많은 글들 중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잘못된 것들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는 확신의 신앙을 가지고(참조; 시7,10,26,35,43편등) 여호와께 호소하는 사람들의 간구들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과 궁지에 몰린 자들은 아무도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여호와께 구원을 청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불의한 관계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적과 싸울 때에도 여호와께 도움을 청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정당함을 입증해 주는 능력의 신이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의'라는 말의 의미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여호와의 의로 우심이 그의 구원의 행위와 동의어로 쓰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사야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이다. 그의 일은 그의 백성들에게 정당한 정의의 관계를 베푸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로운 자에게서 나타난 그의 구원 행위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게까지도 확장된다(참조, 사49:5,6). 하나님 즉, 고난받는 종은 많은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고난을 받았다. 그러므로 그의 삶과 증거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민족들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그로 인해 이 땅에 정의가 세워진다.
Ⅴ. 삼위일체론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진술들은 항상 삼위일체론과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에 관한 어떤 이야기나 진술들이 기독교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론을 간략하게 성부편에서 다루기로 했다.
1. 삼위일체론의 의미
삼위일체론은 어떠한 이유로 형성되었으며 또 무엇을 의도하는가?
1)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원래 삼위일체론은 초대 교회에서 신학자들이 의도적으로 형성해 놓은 사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대한 신앙 고백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는 성자로서의 하나님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인간, 순순한 인간이거나 반신 반의의 존배라면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한 구도자의 죽음을 뿐이고 그는 더 이상 메시야도 구속주도 아닌 일개 종교 운동가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있음을 몸으로 체험했고 그들이 기다리던 참메시야를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함으로써 그의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 사건으로 고백하고자 하는 의도이고,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던 말씀이고(참조, 요1:1), 하나님과 본질상 같은 분(빌2:6)임을 말하는 것이다.
2)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다.
초대 교회는 구원의 사건을 통하여 성령의 사역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다. 사실 예수님 자신은 성령에 대해서 거의 말하지 않았으나 예수의 모든 사역은 성령을 통한 역사였다. 즉 예수의 영, 성령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령으로 사는 삶을 가졌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십자가의 역사는 종말을 향한 시작을 뜻하는 것임과 동시에 완성에 대한 언약이기도 하다. 이 언약, 즉 새 언약은 인간 역사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을 통한 이 구원의 활동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이시며 성령은 하나님의 일부분적 존재가 아니라 영으로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과 동일한 성령의 신성을 신앙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성령의 사건으로 고백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오신 하나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고백하는 것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장래에 종말론적으로 임하실 분이시지만 동시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한 인간을 찾아오셨고 지금 이 순간도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감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2. 삼위의 관계
하나님의 신적인 세 위 즉 세 인격은 하나의 신적 본성을 가진 존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 인격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세 인격의 고유성과 상이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세 인격은 각자의 독특성, 아버지로서의 신분과 아들, 혹은 성령으로서의 신분과 그 특징적 역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세 인격으로 독립되어 있어 서로 아무 관계도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각 인격이 각기 지닌 개체적 인격성 내지 독특한 성격은 각 인격이 다른 인격들로부터 서로 분리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인격들과의 밀접한 관계를 중심으로 유기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위는 상호간의 관계를 통하여 이 관계 속에서 나타나고, 그들의 관계는 세 인격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토대로 한다. 각 위는 다른 두 위로부터, 다른 두 위들 안에서 상호 공존한다. 상호간의 사랑의 힘으로 각 인격은 초월적 타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각 인격은 그의 존재와 기쁨을 다른 인격들 안에서 발견하고 다른 인격들로부터 충만에 넘치는 삶을 누린다. 여기에 세 독립된 위(인격)의 하나 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삼위의 사역
위에서 살펴본 바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하나의 신적인 본질이 세 인격 안에 존재한다' 혹은 '하나님은 하나의 본질이며 그것은 세 인격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삼위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1) 성부의 사역
삼위 하나님 중 성부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역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세계는 선한 것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 성부께서 세계를 지으신 후에 기뻐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셨는데 그의 형상(Imago Dei)을 따라 인간을 손수 빚으셨다. 그리고 성부께서는 인간이 그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가 창조한 세계를 인간에게 위임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와의 교통 속에서 세계를 만드시며 모든 피조물을 성자와 교통하시도록 섭리하신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자를 중심으로 존재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구원(구속) 사업과 하나님 나라 사역이 중심이 된다. 또 성부 하나님은 성령의 힘을 통하여 이 세계를 창조하신다. 따라서 성령은 창조의 영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영의 능력을 근간으로 존재해 간다. 이처럼 성부의 창조 사역은 성부로 말미암았지만 말씀으로서의 성자와 창조의 영으로서의 성령이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조는 성부 하나님의 사역임과 동시에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2) 성자의 사역
삼위 하나님 중 성자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타락한 피조계와 죄악으로 파괴된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다. 이 중차대한 사업을 위하여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육화(Incarnation) 하신다. 그는 인간과 피조계가 당할 고난과 심판을 대신 짊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을, 피조계와 하나님을, 인간과 자연을 평화로 화해시키고 구원하신다. 구원의 가장 중대한 의미는 인간의 죄를 사하심과 동시에 완성과 창조를 향하여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놓으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위하여 희생되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 즉 죄인을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로 만드신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새로운 의를 형성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은 단순히 칭의, 즉 죄의 용서를 넘어선 모든 피조계와 역사의 새 창조를 의미한다. 이른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참된 의미를 찾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참역사의 창출인 것이다.
이러한 성자의 사역에서 한 가지 더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그의 성육신(Incarnation)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케노시스, 하나님의 자기 비하라고 이름한다. 인간과 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창조를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다. 여기에 기독교의 가장 큰 신비가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으로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의 상황을 자기의 것으로 하시고 몸소 인간으로서 인간을 만나시고 인간 삶의 모든 것을 포괄하시며 담당하신 것이다.
3) 성령의 사역
성령, 삼위의 제 3위인 성령 하나님의 가장 큰 사역은 인간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내재하셔서 인간과 함께 하며 인간을 성화케 하는 일이다. 성령은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를 영접케 하시고 그를 따르게 하며 그를 증거하게 하신다. 그는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 친히 함께 하셔서 삶의 근원적인 원동력(dynamics)으로 존재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영광 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헌신하게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새로운 창조 세계의 귀중한 선물이고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성령 하나님과 함께 종말론적인 세계를 향한 희망이 신자들의 삶에 작용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성취하게 하며 이 세계 속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함께 하신다. 성령은 신자들의 개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을 넘어선 역사의 문제까지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계 속에서 이루어 가신다. 그리고 가장 공의롭고, 올바른 사랑으로 이 세계를 지배하시고 힘이 되신다. 또 성령은 믿는 자와 교회와 역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존하시며 지키신다.
Ⅵ. 섭리론(providence) 하나님의 경륜
기독교에서 말하는 '섭리'란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피조계를 그가 의도하시는 바대로 유지하고 보존하시며 발전케 하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헬라어 'paronsia'로부터 나온 말로 스토아 철학에서는 신적인 이성의 합목적적 질서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온 우주와 자연적 사건들, 인간의 운명은 이 질서에 입각하여 일어난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여 하나님의 구원론적이며 종말론적인 관점을 토대로 하여 수정, 보완하였다. 그러면 기독교가 말하는 이 섭리론의 근본적인 의도는 무엇인가?
첫째, 섭리론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과거에 발생한 창조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현재도 진행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둘째, 섭리론은 신학적 사변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과 절대적 신뢰를 주장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이 세계와 피조계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나'를 존재케 하셨고 '나'를 땅 위에 살게 하시는 분이기에 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세째, 섭리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인간의 신앙 고백적 선포이다. 이 피조계를 지배하는 것은 우연적 사건이나 어떤 법칙이 아니라 이 세계를 직접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운명에 얽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당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또한 섭리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향한 종말론적 기다림의 다른 말이고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있는 것임을 표현하는 말이다.
1. 섭리론의 출발점
섭리론의 본원적 근거와 증거, 즉 그 출발점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에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이서 하나님 자신의 가장 큰 의도와 섭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다. 단적으로 그것은 죄에 빠진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따라서 섭리론의 출발은 인간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섭리 신앙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기독교 섭리 신앙이 이 세계와 삶의 과정을 바라보는 다른 모든 시각들과 현저하게 구별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의 섭리 신앙은 성육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2. 섭리론의 구체적 내용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피조물을 돌보시는가? 이에 대해서 개신교 정통주의는 하나님의 세 측면에서의 역사를 주장한다. 하나님은 이 피조계를 유지하시고, 협동하시고, 인도하신다.
1) 유지하심
하나님은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는 한 번 창조하신 그의 세계를 유지하시고 보존하심으로 지속적 창조를 행하고 계신다. 그의 창조의 능력은 지금도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 피조물의 세계가 이렇게 존속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능력으로 인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유지는 곧 하나님의 계속적 창조이다. 그러나 이 유지와 창조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져야 한다. 즉 창조는 공허와 무로부터 존재케 하신 사건, 즉 세계의 시작이라면 유지는 하나님에 의하여 시작된 창조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피조 된 세계의 유지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유지될 수 있고, 또 유지되어야 할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왕 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있어지는 것이다.
2) 협동하심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실 뿐 아니라 직접 그가 피조물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시고 모든 사건 안에서 함께 활동하신다. 즉 인간과 동반하시며 협동하신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피조물의 활동을 규정지으며, 피조물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이러한 활동 안에서 성립된다. 이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당하기도 한 하나님의 활동을 의미한다. 바로 하나님의 이 십자가 활동 안에서 피조물의 활동이 발생한다. 하나님이 활동함으로써 피조물의 사건이 일어나고 그가 피조물의 세계에 임하심으로써 피조물들의 크고 작은 모든 사건 속에서 그의 섭리와 의지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우월성과 인간의 의지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서 이 세상의 동반, 그 활동으로 나타나겠는가 이다. 이 문제를 성서의 계약(covenant) 개념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는데 성서상에 나타난 모든 계약에 있어서 주체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계약에 있어서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또 이 계약 선상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허락하시고 그 자신의 의지적 결단을 촉구하신다. 즉 계약의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우월성은 인간의 의지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우월성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데 있어서 더 중요한 매개고리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협동하심은 피조물의 자유를 목적으로 삼고 있으며,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자유 가운데서 그들 자신 일을 수행한다. 피조물들의 이러한 활동 속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의 일을 이루시는 것이다.
3) 인도하심
개신교의 정통주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허용 :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셨으며 그들은 부여된 자유 가운데서 죄를 지을 수도 있으며 안 지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 전체적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둘째, 방해 : 피조물들의 활동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허용되어질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방해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은 방해하심으로 그의 섭리를 이루신다.
셋째, 방향 인도 :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활동 방향을 인도하셔서 그의 목적에 기여하게 하신다.
넷째, 결정 :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자연의 활동을 제한하시어 자기 자신의 의도대로 결정하시면서 그의 일을 이루신다.
4) 보편적 섭리와 특수한 섭리
하나님의 보편적 섭리는 피조계 전체에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며, 특수한 섭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구속의 은총을 말한다. 이를 일반 은총과 특수 은총으로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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