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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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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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쟁이치고 말 못하는 이가 없고, 노래 못하는 이가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그 신앙적인 활동에 있어 전도와 음악을 그 만큼 중요하게 인식시켜 왔다는 뜻이 될것입니다. 요즈음에는 말뿐아니라, 음악에 복음을 실어 전하는 것도 많이 보게 됩니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종교에 있어 음악적인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종교에 있어서도 음악적인 역활을 배제한 종교는 없을만큼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종교적인 예식과 의례에 있어서 음악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여 왔습니다.그러나 기독교에 있어서는 그런 보편적인 역활과는 조금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음악을 조력(助力)적인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본질(本質)적인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으신 목적이 찬송을 부르게 하려는데 있다고 말합니다(사43:21). 그것은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찬양을드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런 점을 깊이 인식하지만, 그와 함께 다른 갈등을 안고 있는것이 사실입니다. 이 시대는 찬양과 세속적인 음악이 너무 많이 혼합되고,뒤섞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속의 멜로디와 리듬이 갑작스레 교회 안으로 들어와 혼동을 주는가 하면, 교회의 거룩한 성가들이 세속적인 가사로 뒤바뀌어 무대에서 불려지기도 합니다. 어제는 강단에서 경망스럽다고 질책을 당하던 악기들이 이제는 '찬양예배'라는 교회의 새로운양식을 따라가기 위하여 교회마다 앞다투어 구입하는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옳은 것일까요 정말 키타를 치면서 예배시간에 찬양을 드려도 되는 것일까요 또는 어떤 리듬, 어떤 형식까지를 우리는 찬양으로 인정하여야 할까요 이런 것들이 찬양을 하는 현재의 우리들에 있어서 고민거리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18세기 말에 세속의 음악을 연주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던 피아노는 현재에 거의 모든 교회에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의 교회에 있어서는 대단한 반대를 겪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아노는 경건한 예배용 악기가 될 수 없으며, 예배는 오르간만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모짜르트(W.A.Mozart 1756-1791)의 몇몇 교회음악은 음표가 너무 많다는이유로 교회 지도자들의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바하(J.S.Bach1685-1750)의 교회음악도 너무 기악적이라는 이유로 충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이는 음표가 너무 많으면 예배에 적당한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모짜르트나 바하보다 200년이나 앞선 16세기의 음악에 있어서도세속음악에 대한 논쟁은 마찬가지였습니다.1517년 루터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후, 북부 유럽은 거의 개신교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습니다. 구교인 카톨릭에서는 점차 내부개혁의 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는 반동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 1545년에서 1563년까지 이태리 북부 트랜트에서 열렸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트랜트 종교회의(The council of Trent)'입니다. 이 회의에서도 당시 교회음악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첫째, 교회음악이 세속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의 음악을 정선율로 여 작곡을 한다든가, 세상의 음악을 모방하여 예배음악에 사용하는 일이 빈번하게 행하여졌기 때문입니다.둘째, 너무 복잡한 다성적 선율로 인하여 청중들이 가사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세째, 교회 내에서의 과다한 악기 사용에 대하여도 비평의 소리가 나왔고, 그 외에 성가대원들의 불경건한 태도나 나쁜 발음에 대하여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교회지도자들은 교회 안에서 다성(多聲)음악의 금지조치를 취하기를 원하기도 했습니다.그러나 복잡하다고 여겨지던 당시의 다성음악,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이라고 불리던 16세기의 다성음악은 18세기 바하의 다성음악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을만큼 단순한 음악이었습니다.팔레스트리나(G.P.Palestrina 1525-1594)는 교회음악에 대하여 논의하고있는 트랜트 종교회의에 6성부 미사인 '마르셀로 미사(Mass of PopeMarcellus)'를 보내어 다성음악도 영적으로 경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고 합니다.오늘 우리는 우리의 고민을 '역사적인 고민'이라고 받아들여도 무난할것같습니다. 시대마다 교회가 세속화(世俗化) 되어간다는 자각(自覺)의 소리는 있어왔고, 그런 소리에 의하여 우리의 교회가 여기까지 그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혹시라도 우리 자신의 아집(我執)에 사로잡혀 나와 다른 것을 무조건 무시하는병패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교회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교회에 음악적인 다양성을 인정하고 받아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에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음악을 오늘 받아들인다는 것은 실로 인간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취향이 변하신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음악보다 심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단지 귀에 들리는소리의 규칙적인 구성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나아가서는 영적인 메시지를담고 있는 하나의 의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 있어 찬양의내적인 의미는 그 그릇을 달리할 수 있지만, 역시 그 내면에 흐르는 중심(中心)은 같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단순한 선율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람들의 정서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화려한 선율과 다양한 리듬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람들의 정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우리 모두 랩을 부르며, 디스코에 맞추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만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유일한길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젊은 사람들은 기성세대의 정서를 이해하고, 기성세대는 젊은 사람들의 정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찬양의 바른 회복은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고,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라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의식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합일을 이룰 때, 우리는 이 시대에옳은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브리서 13장 1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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