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
본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타락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적 인간론의 기본 주제임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아 잘 알고 있다.'그 원죄의 결과로 인해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로운 선택으로 선악간에 결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많은 토론을 낳았다.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인간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 이러한 자유의지를 다른 능력들, 즉 이성, 감성 등과 함께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으로서 부여받았다는 것이다.그런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였을 때,그는 과연 자유의지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타락한 것일까,아니면 예정론자들의 결정론적 주장처럼 이 타락조차 하나님의 전능하고 영원하신 뜻에 의하여 예정된 것이므로 인간 편에서의 자유의지는 없었던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타락한 것이 그가 창조시 누렸던 자유의지를 악의 방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며,하나님은 인간이 이처럼 가변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락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인간의 선택에 맡기고 그의 타락을 허락했다고 보는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참고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이나, 더 나아가서 그 전거인 후기 어거스틴적으로 경직화된 예정론에는 반대되는 생각이지만, 인간은 로봇 (ROBOT)처럼 아무 선택적 자유의지 없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로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동의할 수 있는 존재이다.비록 유전과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 제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고, 인간의 인격의 자유는 선악간에 자신의 삶을 자유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웨슬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은 죄에 대하여 비난하시거나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느냐고 논증하였다.
어거스틴의 경우, 우리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그의 초기의 글「자유의지론」에서 어거스틴은 마니교적 이원론과 결정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이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할 것인지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에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의 심각성에 따라 -사도 바울을 더 의존하면서 - 펠라기우스를 반대했던 입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좀더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자유의 지론은 은혜론과 상관관계 속에 있지, 전적인 배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자유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려의 은사 속에서 인간이 은혜를 받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곧 참된 자유이다.
(「영과 문자」). 자유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은 사랑을 열쇠로 하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인 사랑 속에서의 인간의 책임적 응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그의 은혜와 협력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뜻한다고 보면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율적 단독성을 반대하는 것이지, 협력적 자유의지와 동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그러나 개신교의 전통에서는 자유의지에 대하여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따라서 루터나 칼빈은 노예의지나 예정론에 더욱 많은 신학적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조나단에드워즈와 같은 미국의 칼빈주의자에게서도 비록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인간이 본질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보며 하나님께서 악의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웨슬리를 포함한 이러한 예외를 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인간의 죄성과 전적 타락성을 강조하면서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타락한 것이 그가 창조시 누렸던 자유의지를 악의 방향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며,하나님은 인간이 이처럼 가변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락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인간의 선택에 맡기고 그의 타락을 허락했다고 보는 웨슬리의 신학적 입장을 참고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종교개혁자들이나, 더 나아가서 그 전거인 후기 어거스틴적으로 경직화된 예정론에는 반대되는 생각이지만, 인간은 로봇 (ROBOT)처럼 아무 선택적 자유의지 없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주제로서 하나님의 뜻에 응답,동의할 수 있는 존재이다.비록 유전과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 제한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할지라고, 인간의 인격의 자유는 선악간에 자신의 삶을 자유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웨슬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은 죄에 대하여 비난하시거나 책임을 물으실 수 있느냐고 논증하였다.
어거스틴의 경우, 우리가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알고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그의 초기의 글「자유의지론」에서 어거스틴은 마니교적 이원론과 결정론에 반대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것은 우리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간이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할 것인지 미리 아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에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의 심각성에 따라 -사도 바울을 더 의존하면서 - 펠라기우스를 반대했던 입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거스틴을 좀더 전체적으로 보면, 그의 자유의 지론은 은혜론과 상관관계 속에 있지, 전적인 배타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이 자유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을 결코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려의 은사 속에서 인간이 은혜를 받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곧 참된 자유이다.
(「영과 문자」). 자유 속에서 성장하는 인간은 사랑을 열쇠로 하며 결국 하나님의 은혜인 사랑 속에서의 인간의 책임적 응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그의 은혜와 협력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뜻한다고 보면서,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율적 단독성을 반대하는 것이지, 협력적 자유의지와 동의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그러나 개신교의 전통에서는 자유의지에 대하여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따라서 루터나 칼빈은 노예의지나 예정론에 더욱 많은 신학적 중점을 두었다. 하지만 조나단에드워즈와 같은 미국의 칼빈주의자에게서도 비록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인간이 본질적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보며 하나님께서 악의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발견하게 된다.웨슬리를 포함한 이러한 예외를 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개신교는 인간의 죄성과 전적 타락성을 강조하면서 타락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