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가 낳은 분노
본문
질투의 감정은 언제나, 질투의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하여금,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질투가그 사람에게 그저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때로 질투의 감정을 품은 사람이, 극단적으로 파괴적인 분노를 터뜨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 의학계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살인 죄목으로 기소된 사람의 12퍼센트에 해당하는많은 숫자가, 단지 {질투}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심각한 죄를 범하게 된다고 합니다.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질투의 감정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사기와 분냄과 당 짓는것과 분리함과 이단과."등등의 죄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죄가, 우리 주위에서 거침없이 행해지고 있습니까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바울 사도가 이렇게 문제를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문제의 해결책을 함께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그릇됨을 극복하는 길은, 성령의 권능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5장 22절로 25절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말지니라."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고 계십니까 그러면 조심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자 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는 이 땅에서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먼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십시오. 그리고 우리 삶에 간섭하셔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신뢰하고 배우며 기도하고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분명히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오늘도 육체의 욕심에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하루가 되길기도합니다.<발행인 김용호>그리스도의 질투()요 2:13-17어느 저명한 신학자가, 여러분의 교회를 방문해서 하나님의말씀을 전하기로 했다고 상상해 봅시다.그런데 이 분이 설교하시다가 갑자기, 회중으로 뛰어나와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외치면서, 성가대 석(席)에 있는 책상을부수면서,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쓸어 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만약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게될까요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이셨습니다.요한복음 2장 15절로 17절 말씀을 보십시오."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신약 성경은 {열심}을 나타내는 형용사(zeal)와 {질투}를 나타내는 형용사(jealousy)를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예수께서 보이신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라는 말은,다시 말하면 {주의 성전을 사랑하는 그분의 질투}라고 이해해도좋을 것입니다.성전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만, 주님은 여전히 이 땅에 그분의 집을 세우고 계십니다.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집은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2장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땅에 있는 {거룩한 집}은 곧 "교회"를 말합니다.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를 세우려는 {열심}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이단이나 죄악에 대해서는 커다란 관심과 열심을 가지고 대응하지만, 주께서 그토록 열심으로 나타내셨던, 교회의 사명과 도덕적인 순결성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것 같습니다.우리가 속한 교회가 말씀에 따라, 말씀이 가르치는 그 표준에따라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주신 진리의 말씀을 열심히 따르는 교회만이, 세상을 향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오늘도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고 행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발행인 김용호>또 다른 한 사람전 5:22-23어느 부인이 남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남편이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론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부인은 이런 남편의 시큰둥한 대답에 만족하지 않고,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또 질문합니다.그러면 대부분은 남편은 대답하기 귀찮은 듯이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이랑 결혼했겠느냐}고 말합니다.그래도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내 말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냐는 뜻}이라고 중얼거리는 겁니다.이것은 중년에 이른 부부들 사이에서 충분히 오갈 수 있는 대화 내용입니다.이렇게 질문하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이부부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부부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아내가 남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대화 가운데 명백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시무룩한 대답을 하는 남편에게도 {아내의 관심과 돌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부부가 서로를 돌보기 위해서는, 서로 대화해야 합니다. 만일아내가 남편이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느끼게 되면, 아내는 그런남편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남편도마찬가지겠지요.그런데 인간에게 있어서, 상대방에게 관심을 표현하는 제일좋은 방법은 {서로 대화하는 것}입니다.때로 부부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있다는 만족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고르는 것,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마치 화난 사람처럼 입을 꼭 다문 채 신문만 바라보지 않는 것, 또 가끔씩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기 위해함께 외출하는 여유까지, 이것은 모두 상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자, 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즘 모(某) 회사의 세탁기 선전은 {아내를 위해 빨래를 하자}고 외치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는사실을 잊지 마십시오.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부부가 서로 돌보기를 원하십니다.그래서 그리스도가 교회를 돌보는 것과 같이, 부부가 서로 돌볼것을 요구하십니다. 에베소서 5장 28절과 29절을 보십시오."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 같이 할지니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오늘도 아내와 남편이, 주께서 보이신 본을 따라, 서로 이해하고 화합하며 사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발행인 김용호>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