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모음(성자 가가와 도요히꼬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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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모음(성자 가가와 도요히꼬 외)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꼬는 말하기를 '신앙세계에 있어서 큰 일한 사람들은 모두가 기도의 사람이었고, 큰일을 위한 기도일수록 응답을 늦게 받은 것을 우리는 교회사에서나 신앙인들을 통하여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일본 최대의 고아원을 창설한 이시이 쥬지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시이 쥬지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은 휴우가 고아원의 본관에는 그가 매일 정좌하여 기도하기 위한 돗자리가 있었습니다. 그 돗자리에는 깊이가 무릎 모양만큼 파져 기도한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위대한 작곡가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하기를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늘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작곡한 유명한 곡 가운데 '천지 창조'가 있습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 창조'를 작곡했습니다.
그가 죽기 일 년 전 이 곡을 비엔나에서 공연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날 지휘자는 이 곡을 훌륭하게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이든은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아니오. 아니오. 저 곡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오. 저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라고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하고는 서둘러 그 홀을 빠져나갔습니다.
이것이 곧 진실한 성도의 기도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못난 소나무가 고향선산을 지킨다.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산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습니다.
자식들을 좋은 대학에 진학시켜서 큰아들은 현재 미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서울에서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는데, 정작 그 어머니는 여주에서 혼자 쓸쓸히 지내고 계시는 분의 얘기를 하다가 그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아주 잘 키우면 국가의 자식이 되고, 그 다음으로 잘 키우면 장모의 자식이 되고, 적당히 잘 키우면 내 자식이 된다는 얘기도 하였습니다.
웃자고 하는 얘기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야 집에 하수도가 막혀도 '누구야? 하수도가 막혔다. 얼른 와서 해결 좀 해라'하고 편하게 부를 수 있고, 방안의 전구를 바꿀 때도 '누구야? 얼른 와서 전구 좀 바꿔라'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A living ass is better than a dead docter' '죽은 박사보다 살아 있는 멍청이가 낫다.'
하수도가 막혔다고, 전구가 나갔다고, 미국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 없고 서울에 있는 아들을 부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볼까 말까하는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할 수가 없고, 평생에 한두 번 볼 수 있고 사진을 통해서나 겨우 만날 수 있는 손자들이 내 손자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소리만 요란하고 결과는 없다.
빵 한 덩어리가 수많은 새들의 노랫소리보다 낫다. -좋은 글에서-
▶진시황은 38세에 중국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불로 장수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그였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영원토록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서 불로초까지 먹었습니다. 그랬던 그도 결국 50을 넘기지 못하고 49살에 죽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절세 미인 양귀비도 그렇습니다. 임금의 총애를 받고 부귀영화가 한 몸에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녀도 난리가 나서 도망가다가 37살 한창 나이에 목매어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 사는 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7-80년 살다가 결국 한두 평 무덤으로 끝나는 게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도 인생을 '생로병사'라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게 인생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하고 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절대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우주만물을 운행하십니다.
지구는 한 시간당 1.600km의 속도로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지구가 자전속도를 10분의 1로 줄여서 시간당 160km로 자전한다면 밤과 낮의 길이가 10배나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낮 120시간, 밤 120시간, 그렇게 되면 낮의 태양은 모든 식물을 태워 죽일 것이며 밤의 추위는 모든 생명을 얼어죽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는 매 시간당 1,600km의 속도를 유지하며 지금도 돌고 있어, 하루는 24시간 낮과 밤이 적절히 교차하며 흘러갑니다.
지구와 태양은 너무나도 정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표면은 섭씨 6000도입니다. 조금만 가까워지면 지구는 다 타 버릴 것이요, 조금만 멀어지면 지구는 곧 얼음 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지구가 23도 기울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23도쯤 기울어져 있기에 우리에게 4계절을 만들어 줍니다.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증발된 수증기는 전부 남쪽과 북쪽으로 이동하여 온 대륙은 얼음 덩어리로 가득 차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확한 대기권의 두께입니다. 지금보다 얇았다면 하루에도 수백만 개의 별똥별들이 대기권을 통과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표면에 떨어져 순식간에 지구를 불바다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모든 동식물의 신체적인 성장이 적절하게 제한되고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천 억의 곤충이 있습니다. 그런데 곤충들이 지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소유한 폐가 없기 때문입니다. 관을 통해서 호흡하는데 곤충들이 성장하면 몸은 커져도 호흡하는 관은 커지지 않기에 성장의 제한을 받습니다.
만약 곤충들에게 신체적 성장의 제한이 없었다면 사자처럼 큰 벌을 만들 것입니다. 인간은 벌에 쏘여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같은 일들이 우연히 되었겠는가? 성경을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19: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도다.'
히3:4절에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성경에 보면 여호와 이름과 연결되어 나오는 명칭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닛시'(Jehova-nissi)라는 명칭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호전적인 아말렉 군대와 싸워 이긴 모세가 르비딤에 전승 기념비를 세우고 그곳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출17:15)라고 부름에서 연유된 명칭입니다.
또 '여호와 샬롬'(Jehovah-Shalom)이라는 명칭도 있습니다. '여호와는 평강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미디안군과 싸우라고 계시를 내렸습니다. 산지에서 농사를 짓던 기드온이 너무 당황해서 거절하다가 계시자를 시험하며 내가 바가지에 국물을 가져다 땅에 부을 것이니 한번 태워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그 국물을 다 태웠다고 했습니다. 그때 기드온이 너무 놀라서 '내가 감히 여호와를 시험했습니다'하고 두려워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걱정마라, 너는 죽지 않으리라'. 그때 기드온이 '여호와 샬롬'(삿6:24)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 '여호와 이레'라는 말도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Jehova-jere)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신명을 받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도착하여 이삭을 잡으려 할 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 내가 네 믿음을 보았느니라.' 그리고 뒤를 보니 하나님께서 대신 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준비된 양을 잡아 제물로 바치고 한 말이 '여호와 이레'(창22:14)라는 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모리아산은 '여호와 이레'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생각밖에 일이 잘 될 때 우리는 '여호와 이레'라고 말합니다. 나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미 여호와께서 다 준비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영국의 대 철학자였고 수학자였던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우리가 잘 아는 철학자 버드란트 러셀의 스승이기도 하고, 또 두 사람이 함께 여러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본시 교육가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물론 대대로 믿어오던 기독교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젊은 시절 철학과 수학에 심취하면서 그만 신앙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대대로 이어받았던 신앙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회와도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그도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그가 살고 있는 도시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습니다.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웬 노파 한 사람이 눈 구덩이에 빠져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뜨였습니다. 노 교수는 다가가서 그 노파를 부추겨 눈 구덩이 속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노파는 노 교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내게 이와 같이 큰 친절을 베풀어주시는 것을 보니까, 댁도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어느 교회에 출석하고 계십니까?'
아마 주일날 한 번 찾아가서 뵙고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노 교수 화이트헤드는 겸연쩍은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또 제게는 신앙심도 없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의외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다 늙은 사람이 어쩌자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다가 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저 눈 구덩이 속에서 죽는 줄 알고 계속해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구먼.'
그 말을 듣는 순간 노 교수는 절로 숙연해 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노파로 하여금 저토록 확신 있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일까? 내가 지금 탐구하고 있는 철학과 수학, 아니 전 영국의 모든 학문을 통틀어서라도 저 노파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확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자기가 탐구해 왔던 학문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젊어서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들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추구해 왔던 학문에 대한 회의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급기야 그는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시금 출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매우 기뻤습니다. 화이트헤드와 같은 세계적인 대 석학이 자기 교회에 출석한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그 목사님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심혈을 기울여서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열심히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의 내용들이 대충 이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철학과 신앙의 대화', '수학과 신앙의 만남', 대 석학을 앞에 놓고 설교를 하려고 하니까, 자기 나름대로 그것이 좋을 줄 알고 그렇게 설교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노 교수가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자기가 오랫동안 담쌓고 지냈던 교회를 다시금 찾았는지, 그 동기를 말씀드리면서 정중하게 목사님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아무래도 목사님께서 요즘 설교하시는 내용은 제가 목사님보다는 전문일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설교 마시고, 그 날 눈 구덩이 속에서 그 노파가 가졌던 진리에 대한 확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신앙을 제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정말 고맙겠습니다.'
여러분, 이 일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마땅히 소유해야 할 것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분노의 포도'라는 글을 써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 1902-1968)이 쓴 글 가운데, '진주'라는 중편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키노와 그의 아내 조안나는 고기를 잡으면서 살아가는 어부였습니다. 그들은 이따금씩 바다 속에 들어가서 진주를 채취하기도 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그들이 어느 날 보기 드문 큰 진주를 찾은 데서 시작이 됩니다. 그들은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가난이 끝나고 행복한 삶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이 큰 진주를 찾았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값진 진주를 구경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듯이 늘 키노의 오두막집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부부가 병이 들었습니다. 병원에 갔습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아이가 전갈에 물렸을 때,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던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과잉친절을 베풀기 시작했습니다.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몇 번씩이고 키노의 오두막집을 찾아오곤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병을 낫게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병이 더 오래 가도록 처방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주가 탐이 났기 때문입니다.
도회지의 진주 장사들은 키노가 가진 값진 진주를 헐값에 사기 위해서 온갖 농간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안되니까 폭력배를 동원해서 그들 부부를 협박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밤중에는 강도가 침입하기도 했습니다. 키노는 진주를 지키기 위해서 격투까지 벌여야 했습니다.
진주가 그들의 삶에 행복을 준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진주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값진 진주를 깊은 바다 속에 다시금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진주가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불행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존 스타인벡이 쓴 글로서 진주를 소재로 한 또 다른 글이 있습니다. '흠 있는 진주'라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어느 진주 수집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소원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진주를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진주가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어디든지 뛰어갔습니다. 아무리 비싼 값이라도 주고서 그것을 꼭 구입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말로 좋은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하고서 그것을 사왔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의 즐거움은 날마다 그 진주를 끄집어내어서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뜻밖에도 자기가 늘 황홀하게 쳐다보는 진주에 눈에 보일락말락한 바늘 끝같이 아주 작은 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는 고민하던 중에 진주의 흠을 없애기 위해서 그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조심조심 진주의 껍질을 벗겨 내었습니다. 흠은 더 작아졌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까 아직도 흠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흠이 없어질 때까지 미친 듯이 계속해서 진주의 껍질을 벗기고 또 벗겨냈습니다. 드디어 진주의 흠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진주도 함께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의 이런저런 진주들을 가지고서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만족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나름대로 다 흠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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