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의 원인
본문
1882년 임오년,그 당시 군인들은 근 일년동안이나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이때 나이 2살에 세자로 책봉된 바 있는 자기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느라고 민비는 무척이나 흥분해 있었다. 아들의 나이래야 고작 8살이었다. 이 결혼식은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호사스러운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세자의 혼수 이불만 무려 560채나 되었다고하니 다른 것이야 더 일러 무엇하겠는가그 호사스러움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이때 군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야할 생활비를 이 따의 호사스러운 궁정 결혼비용으로 전용하고 말았다고 이를 갈았고 백성들은 이 어처구니없는 호사스러운 결혼식에 혀를 찼다.그 결과 몇개월이 못가서 군인들은 임오군란이라는 폭동을 일으켰고 그때 민비는 죽음의 위기를 맞기까지 했다. 천하만민의 비웃음과 저주를 받으며 엄청나게 성대하게 치러졌던 결혼식의 결과를 살펴보자.당사자 순종은 일점혈육도 못남겼고,마침내 조선왕조 500년을 말아먹는 임금이 되고 말았다. 나라를 송두리째 일본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그리고 매사에 호사를 즐기던 민비는 국가와 민족을 골병들게 만들어 놓더니 결국 자신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큼 횡액을 당하여 불태워지고 말았던 것이다.이것이 호사의 종말이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