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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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관계도형 가운데 삼각형이 가장 안정된 것이라고 하는데, 인간 관계에서도 삼각관계가 가장 안정적일 뿐 아니라 기본이 되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가정은 부부만 있을 때보다는 자식이 생겨나서 삼각구도를 이룰 때 더 안정적이 된다. 아이도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동시에 사랑을 받는 삼각구도 속에서가장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TV 드라마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것도 삼각관계이다. 어느 한 여자가 돈 많은 남자와 가난한 남자 사이에서 갈등한다거나,결혼한 남자가 우연히 옛날에 사귀던 사람을 만나서 그와 아내 사이에서 갈등한다는 식의 이야기이다. 뻔한 얘기인 줄 알면서도 보는 사람은 그 삼각관계에서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 이야기에 빨려들게 된다.대개 이런 삼각관계는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것인데, 주인공은 그런 긴장관계에서 벗어나려고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그러면 삼각관계는 일대일로 대응하는 직선적 관계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직선적인 관계는 일시적인 것이며 사람들은 다시 그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게 된다. 두 개의 점 사이에선 선분만이 존재할 뿐 도형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뭔가 더 큰 공간과 관계를 이룰 수 있는 한 점을 필요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 한 점은 그들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이거나, 친구이거나, 일터의 동료이거나,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한 삼각관계 속에서 비로소 더불어 사는 삶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가능하며, 슬픔과 기쁨 그리고 시련과 극복이 있는 역사가 시작된다.성서에서 나타나는 삼각관계에덴 동산에 아담과 하와만 있었다면 거기에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뱀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삼각관계가 형성되었으며, 뱀의 유혹은 아담과하와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뱀의 유혹에 넘어간 그들은 낙원에서 Wruskrp 되었으니 사람들이 처음으로이룬 삼각관계는 비극적인 것이라 하겠다. 낙원에서 ㅉ겨나면서 온갖 인간의 비극은 시작이 되었지만, 동시에 거기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이 되었다고 할수 있다. 그러니 삼각관계는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서에나오는 흥미진진한 이야기 가운데는 삼각관계를 그 기본 구조로 하고 있는 것이 많은데 그것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아브라함-사라-하갈이삭-야곱-에서야곱-라헬-레아사무엘-사울-다윗사울-다윗-요나단다윗-밧세바-우리야바리새파 사람들-죄인과 세리-예수예수-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제자들강도 만난 사람-제사장과 레위 사람-선한 사마리아 사람마르다-마리아-예수18년간 앓은 여자-안식일에 그를 고쳐주는 예수-비난하는 회당장부자-빚진 사람들-불의한 청지기부자-거지 나사로-아브라함삭개오-삭개오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사람들-예수간음하다 잡힌 여인-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예수이런 이야기들은 그 기본 구조인 삼각관계를 잘 보고 그 관계 속에서 각자를 이해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런 삼각관계를 의식하지않은 나머지 쉽게 어느 한 쪽을 잘라내 버리고 둘만의 관계로 보는 잘못을 범하곤 한다. 그리하여 삼각관계는 사라지고 둘만의 직선적 관계나 혼자만의 개인이 남는다. 성경이 보도하는 구원 사건은 사라지고 개인 윤리나 구원의 의미 같은 것만 남는다.신약성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삼각관계는 '바리새파 사람들-세리와 죄인들-예수'의 관계이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께로 왔을 때 예수는그들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 이 일을 두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죄인과 어울린다면서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면서 세리와 죄인들의 권리를 회복시킨다. 이 관계에서 세리와 죄인,바리새파 사람, 예수라는 세 꼭지점은 어느 하나도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거나뒤로 물러설 수 없는 확고한 자리를 갖고 있다.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 예수가 한 일이 어떤 일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리새파라는 꼭지점이 분명하게부각이 될 때에, 그런 비난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예수와 '세리와 죄인들'이 더불어 이룬 사랑의 사건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문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당연히 나쁜 사람, 구원받지 못할 율법주의자로여겨서 논외로 해버리는 것이다. 삼각구도에서 한 점을 잘라내 버리는 것이다.남는 것은 '죄인과 세리'와 예수 사이의 직선적 관계이다. 그리고 죄인과 세리의자리에 독자 자신을 대입시키고 예수의 자리에 영광받으신 그리스도를 대입시킨다. 그러면 그 삼각관계가 본래 담고 있던 사랑의 '사건'은 사라지고 속죄론적'의미'만 남게 되는 것이다.세 꼭지점사람들에게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잃었던 아들의 비유'(눅 15:11-32)에서 나타나는 기본 골격도 아주 분명한 삼각관계이다. 성실하게 열심히 일하는첫째 아들-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온 둘째 아들-그런 둘째 아들을 책망하지 않고 영접하는 아버지가 세 꼭지점을 이루고 있다.사람들은 흔히 이런 명백한 삼각관계를 잘 보지 못하는데, 그것은 먼저 아버지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입하고, 다음으로 두 아들의 자리에 임의의 사람을대입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자리에 하나님을 대입하고 나면 삼각관계는 사라지고 두 개의 직선 관계만 남는다. 하나는 '첫째 아들-아버지'의 관계이며, 다른하나는 '둘째 아들-아버지'의 관계이다. 이 가운데서도 대개 전자보다는 후자,곧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탕자'와 그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하나님의 관계만부각이 된다. 삼각관계가 부각되지 않음과 동시에 이 비유에서 말하려고 한 사건은 사라지고 개인 윤리적 교훈만 남는데, 곧 회개이다.이런 해석을 한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 교회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이다.그는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한다. 아버지 하나님 만큼 그렇게 진실하며 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우리가 그 탕자와 같이 죄를 지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를 받아주신다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회개와 자백을 조건으로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의 행동 하나 하나에서 종교적 의미를끌어낸다. 탕자에게 입히는 새 옷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는 것을, 반지는 세례를, 잔치와 살진 송아지는 성만찬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해석에서는 본래의 비유가 갖고 있던 세 꼭지점은 없어지거나흐려져 버리고, 오직 회개하는 죄인과 용서하는 하나님 사이의 수직적 관계가있을 뿐이다.이러한 해석이 이 비유의 본래 의도에서 한참 벗어나 있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후대의 주석가들은 이런 해석의 문제점을 느끼고 그것을 극복하려고많은 노력을 했다. 많은 성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큰 틀에서 볼 때에는,후대의 여러 해석들도 이러한 해석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서,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반지는 무엇을 상징하며 송아지는무엇을 상징한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 점에서는 터툴리안과 다르지만, 이 비유의 핵심이 돌아온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에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는터툴리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이 비유의 주인공이 돌아온 아들이냐 아버지이냐를 묻는 것은 그 자체가이 비유를 곡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런 물음은 이 비유가 본래 갖고 있는 뚜렷한 삼각관계를 임의적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물음에서 이미 첫째 아들은 액스트라 역으로 바뀌거나 아니면 무대 뒤로 사라져버린다. 돌아온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서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아버지는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보기 때문에,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한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타날 뿐이다. 그것은 결국 한 개인에게서, 더 엄밀히 말하면개인의 사유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회개, 고백, 그리고 용서받음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가 이 비유를 말할 때 정말 이런 의미를 말하려고 한 것인가그러나 예수는 뚜렷한 삼각관계 속에서 이 비유를 말하였다. 그 세 꼭지점은 예수에게 몰려드는 세리와 죄인들-그들을 영접하여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그런 예수를 비판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다(눅 15:1-2). 여기에서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하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예수를 비판하는 자들은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다. 예수는 이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세리와 죄인들의 권리를 복권시켜 주려고 이 비{{}}유를 들었다. 이런 맥락에서 어떻게 예수가 개개인의 회개를 촉구하거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설명하는 어떤 비유를 말할 수 있겠는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빗발치는 공격 속에서, 예수는 한 편으로는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이룩한 사랑의 사건을 계속해서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말한 것이 이 비유이니, 우리는 이 비유에서 이런 뚜렷한 삼각관계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이 그대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이때에 조심할 것은, 이 비유의 삼각관계와 이 비유를 말하게 된 그 상황의삼각관계를 일대일로 대응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아버지와,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첫째 아들과, 세리와 죄인들을 둘째 아들과 일대일로 대응시켜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다시 터툴리안이 범한 잘못을반복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의 삼각관계가 드러내는 전체 상황이 다른 삼각관계가 드러내는 전체 상황과 대응한다고 보는 것은 옳다.역할극이 비유에 나오는 삼각관계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그비유의 세 등장인물 가운데 어느 한 역을 맡아서 역할극을 해보면 좋다. 이런역할극 속에서 우리는 쉽게 삼각관계를 변경시켜서 직선적 관계나 한 개인의내면적 관계로 바꾸어버리는 잘못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첫째 아들 역, 둘째 아들 역, 그리고 아버지 역이 있다. 자, 어느 역을 맡을것인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둘째 아들 역을 맡을 것 같다. 그동안 자신을 많이 대입시켜 본 익숙한 역이니까 말이다. 첫째 아들 역을 맡겠다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래도 성실한 장남이니 말이다. 문제는 아버지 역을 맡겠다는 사람이있을까 하는 것이다. 누군가 맡기는 하겠지만 웬지 자신의 역이 아닌 것 같다는느낌들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 역은 늘 하나님이 맡아주는 것이라고 우린 생각하곤 했으니까.그러나 이런 역할극의 포인트는 바로 이 세 번째 역에 있다고 할 수 있다.우리가 그 동안 맡아오지 않은 역, 당연히 우리의 역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 역을 맡아 볼 때 이제까지 우리가 놓쳐 온 이 비유의 핵심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 속에서 뭔가 보장된 미래를 위하여 성실하고 겸손하게 일하지만, 그러나 그 보장된 미래가 조금이라도 위협을 받을 때는 얼굴을바꾸고 버럭 화를 내는 큰 아들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다.뭔가 불리한 듯한 여건을 타파해보려고 자기 몫을 강하게 주장도 하고, 모험적으로 사업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실패하고 좌절하는 가운데 부모에게 돌아와 도움을 청하는 둘째 아들의 모습 역시 오늘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문제는, 그와 같이 실패하고 상처받은 채로 돌아온 아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맞아들이며, 거기에 대해 얼굴을 붉히며 항의하는 큰 아들을 '내것이 다 네것인데 뭘 그러니' 하면서 너그럽게 감싸는, 그리하여 두 아들 가운데 어느 한편도 배척하지 않고 다 포용하여 아름다운 삼각관계를 이루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 모습 또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는가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의 역할은잘 떠맡으면서도, 아버지의 역할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기거나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우리가 이 세 역할에 몰입하여 잘 해낼 때 우린 전체 극 속에서 일어나는사랑의 사건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의 사건은, 바리새파 사람들과율법학자들-세리와 죄인들-예수의 삼각관계에서 일어난 사랑의 사건과, 2000년이라는 시간 상의 거리를 뛰어넘는 어떤 일치점을 갖는 것이다.이렇게 해석할 때 우리는 두 아들 가운데 어느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그르다는 식의 흑백논리를 극복할 수 있다. 문제와 씨름하는 현실의 사람들이이루는 삼각관계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을 무시한 채, 수평적인 윤리적 의미 또는 수직적인 종교적 의미만을 추구해 온 잘못을 극복할 수 있다.그리고 예수가 본래 말하려 했고 또 실천한 사랑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수 있으며, 우리 삶 속에서 계속되게 할 수 있다.남북이 벌이는 역할극남과 북이 이런 역할극을 해보면 어떨까 우선 남이 첫째 아들 역을 맡고북이 둘째 아들 역을 맡게 되기가 쉬울 것이다. 현재로서는, 남은 북보다 잘 살며 안전 지대에 있고, 북은 모험적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다가 망해서 굶주리는처지에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누가 아버지 역을 맡느냐는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은 이 역을 맡을 수 없다. 그들은 절대로 북한을 위해서 송아지를잡지 않는다. 기껏해야 누군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였을 때 거기에참여하는 이웃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역은 분명히 이 한반도 내에서 누가 맡아야 한다.그 역할을 맡을 사람은 누구인가 교회는 또다시 하나님께 그 역할을 떠넘길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기도만 하고 손발을 묶고 있는데 하나님이 북한에비를 내리듯이 쌀을 내려 주지는 않으실 것이다. 교회가 그 역을 맡아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를 먹여서 살려야 한다. 또 한편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북한에 군량미를 제공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면서 볼 멘 소리를 하는, 남쪽의 사람들까지도 설득하고 포용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남북이 하나로 어우러져 송아지를잡아 잔치판을 벌일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이다.예수의 역할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세리와 죄인들-예수가 이룬 삼각관계 속에서 예수는 자신의 역할을 하나님께 떠넘기지 않았다. 그가 십자가를 진 것도 그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그 역할을 잘 해 냈으며, 우리에게도'나를 따르라'고 한다. 우리가 그를 따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다. 때로 그것이 아버지 역할일지라도 말이다.가정, 교회, 직장 그 어디에서나 일대일의 직선관계에서 일어나는 대립과갈등과 미움은 끊이지 않는다. 첫째 아들 역이나 둘째 아들 역을 맡으려고 하는사람들은 많지만 아버지 역을 맡으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들 한다. 그렇지만 이런 세상 속에서도 그래도 세상은살만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직선적 대립밖에 없는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끼여서 직선을 삼각형으로 만들며, 사람들 사이를 훈훈하게 하며,얘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함께 이야기하고, 같이 걷고, 또 다시 만날 약속을 할 때이다. 그렇지만 그는 꼭 무엇을많이 가지거나, 많이 배우거나, 잘난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그저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을 밝게 하며, 그런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꼭 온세상이 어두워지는 것 같고 적막하기까지 한 것이다.예수는 그런 분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이 비유를 읽으면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보다는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의 가슴을 갖고서 일어서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리라.-------------------------------------------------------------------------[살림]의 구독 신청, 문의는, 한국신학연구소 전화: 02)588-5734~6 팩스:588-5737PC통신: 천리안,하이텔: ktsi 로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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