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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공 김청송의 서간도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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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쓰목사가 최초로 한글성서 출판을 위하여 상하이로부터 인쇄기를 구입해 온 것이 1881년으로, 그는 곧 심양에 인쇄소를 설치하였으며 1882년 이른봄에 백홍준,서상륜,김진기를 동반하여 갔다.이렇게 하여 인쇄의 준비를 갖추었으나 인쇄의 기술자를 구하는 것이큰 문제이었다. 마침 중국인 신자 중에 인쇄에 경험있는 사람이 있다하여 그의 도움을 얻으면서 인쇄에 착수하였다.그렇지만 한글을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인의 손으로 작업에 지장이 너무나 많아 성서 전권을 도저히 인쇄할 것 같지 아니하였다. 로쓰목사는몸소 문선,식자,조판,기계사용에 이르기까지 설명서를 보면서 일일히지시하였으나 인쇄의 작업은 지지부진하였다.그러한 때에 김청송이 나타났다. 그는 서간도의 한인촌에 살고 있었으며 매우 성실하다는 평이 있어, 로쓰목사는 그를 식자공으로 채용하므로 1881년 9월부터 인쇄작업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성격은치밀하여 인쇄하는 과정에서 복음서를 읽는 중에 은혜를 받고 누가복음의 인쇄가 끝나자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고 로쓰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John Ross,The Christian Down in Korea,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1890,p,243).1882년 누가복음의 첫번째 인쇄가 끝나면서 김청송은 전도인의 새로운임무를 맡고 서간도 한인촌에 가서 전도하게 되는 사명을 로쓰목사로부터 위촉받았다. 김청송은 6개월에 걸쳐 한글복음서를 배포하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주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게되자 감격하였다.이역 만리에서 고국을 그리는 생활을 보내고 있는 저들로서 모국의 글로 된 책을 손에 들게 되자 눈물이 앞을 가리었으며 또한 그속에 기록된 말씀이 복음으로 마음을 한없이 위로하였음은 두말할 것 없다.성경을 읽은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 개종할 뜻을 표시하면서 복음은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로쓰목사의 논문에 의하면 그들 중에는 임오군란에 변경으로 좌천된 군인들이 여럿이 있었으며, 불만을 품고 즙안현 한인촌에 망명해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John Ross,Corean Co-verts,The Missionary Review,May 188.)기독교의 진리를 확실히 알기를 원하는 몇 사람은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김청송은 서간도 일대의 신앙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를 만나고자 희망하고 있으니 속히 방문해달라고 간곡히 청원하였다.그의 보고와 간청에 감동된 로쓰목사는 1884년 11월 중순에 윕스터(J-ames Webster)목사를 동반하여 서간도 한인촌으로 찾아갔다. 로쓰목사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John Ross; the Christian D -own'in Korea)[우리들은 7일간 마차를 타고갔으나 눈이 너무 쌓여있어 부득이 다음1주간은 나귀를 타고갔다. 영하 20도의 추위는 몹시 괴로웠다. 우리는첫한인촌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의 호의와 친절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들은 20년간 고생하면서 골짜기를 개간하며 농사를 지어왔는데 2년전부터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와 큰 변화를 일으켰다. 수백명의 한국인이구원의 길을 찾아 날마다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방문한네 촌락에서 75명에서 세례를 베풀었다. 이 교회가 잘 자라서 수년안에모국에 복음을 전파하므로 북한 전체가 복음화될 것을 기대하여 마지않는다.]즙안현 이양자에는 약 3천명 교포가 살고있었다. 이듬해에 로쓰목사는다시 찾아가 2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그러나 중국인의 박해로 중도에 귀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한인촌에교회가 생기고 서양선교사가 왕래하자 불의의 변이나 일어나지 않을까염려하여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러나 복음의 씨앗은 박해 속에서 자라나 1년도 못되어 1백명 세례교인의 결실을 맺었으며, 이곳에서 복음서를 가지고 귀국한 이승락은 평북 초산교회를 창솔하는 공을 세웠다.김청송은 믿음과 전도는 한국인의 교회를 국내가 아닌 만주 서간도에,고구려의 옛 수도인 즙안현 이양자에 먼저 설립하는 기초가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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